말틴 루터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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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한스 루더와 마가렛 루더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중에 루터가 죽었을 때의 떠들썩함과는 달리, 그의 출생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친구들은 정확한 출생연도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일 정도였다.
루터의 아버지는 자영 농민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린데만가 출신이었다.
루터는 당시 관습에 따라 출생 다음 날(성 말틴의 날) 세례를 받고 그 날의 성인의 이름을 따라 말틴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2.루터의 가정은 엄격하면서도 다정다감하였다.그의 부모는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절약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또한 아이들에게 가족이 하는 모든 일은 존경을 받아야 하며 생산적이어야 한다고 배웠다. 루터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땔감을 구하러 다른 부인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시곤 했다고 회상했다.
루터의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서 커다란 야심이 있었다. 저들은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아이들이 잘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루터가 다섯 살 되던 해(1488) 만스펠트의 마을 학교에 취학하여 라틴어를 읽고 쓰는 교육과 성가대 찬송을 위한 음악교육을 받았다. 13살 되던 해(1497) 루터는 마그데부르크로 보내어져 성당 학교를 1년간 다녔는데, 교사들은 ‘공동생활 형제단’의 일원이었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청소년 시절에 중세시대 전체에 있어서 가장 깊은 차원의 평신도 영성 훈련에 익숙했고 친근해졌다.
이듬 해 루터는 아이제나하로 보내어져 3년간 공부하였다. 루터는 이 학교에서 그의 장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요한 트리보스 교장 선생님을 만났으며, 비간트 겔드누프란 스승과는 평생 계속되는 친교를 여기서 시작하게 되었다. 이 두 스승은 루터의 재능을 알아 보고서 졸업이 다가오자 대학에 가서 계속 공부하라고 추천하였다.
루터는 아이제나하에서 그의 발전에 중요한 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는 경건하고 학식있는 상류층 가문인 샬베와 코타의 집들을 자주 방문하면서 저들의 심오한 경건 생활에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이들 가정의 분위기에는 프란시스회의 영성이 물들어 있었으며, 음악성도 계발되었다. 루터는 아이제나하에서 많은 친구들도 사귀는데 이들 중 몇은 평생지기가 된다.
3.당시 루터의 부친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들을 대학에 보낸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아이제나하 선생님들의 대학 진학 계획에 찬성하였다.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어 좋은 자리를 얻게 하려고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시켰다. 루터는 이 대학 교양학부에서 삼학(三學 - trivium. 문법, 수사학, 변증법)과 사학 (四學 - quadrivim.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각기 마친 후 1502년 9월에 문학사 학위를, 1505년 1월에 17명 중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예비학교를 마친 루터는 5월에 본격적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
4.루터가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 하던 중,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7월 2일, 슈토테르하임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에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부르며 소리질렀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수도승이 되겠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이미 무르익었던 터라 루터는 뇌우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데전혀 주저하지 않았다.루터는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들어갔다.
5.1507년 5월 루터는 사제로 서품을 받고 부친이 참석한 가운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다음해 겨울 어거스틴파 수도회의 독일 지역 수장인 슈타우피츠의 추천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불려와 교양학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해 한 학기 강의하였다. 이 때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묵으면서 자신의 고해신부가 된 슈타우피츠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았다.
슈타우피츠는 루터가 영적으로 절망의 문턱에 다다라서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붙잡고서 우리의 죄를 위해 흘리신 그의 가장 고귀로운 피를 보라고 권면했다.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는 가르치는 한편 신학 강의를 들으며 분주히 보냈다.
비텐베르크. 1502년 프레데릭 현자가 세운 대학이 있던 인구 2000명의 도시.작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하지 않은 이 도시는 이제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된다.
6.루터는 1509년에 수도사들의 신학교육도 맡고 대학에서 자신의 신학교육을 계속하기 위해 에르푸르트로 돌아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다음 해 루터는 종단 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로 파견되었다. 당시 ‘교황의 교설(도그마)에 너무나 깊이 심취해 있던’ 루터는 로마에서 카톨릭 교회의 영적인 공덕에 참여하고자 미사도 집전하고 성당, 사원, 카타콤, ‘거룩한 계단’을 마치 ‘미친 성자처럼’ 방문하였다.
여행을 다녀온 후 그는 회고하기를 이 거룩한 도시를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땅에 엎드려 ‘오, 로마여! 축복받은 도시여!’라고 외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하나님이 교회를 짓는 바로 옆에 마귀는 자신의 제단을 놓는다.”고 한 말은 바로 로마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7.로마에서 에르푸르트로 돌아온 뒤 루터는 1511년 여름에 다시 비텐베르크로 옮겨와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1512년 10월 19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3일 후 슈타우피츠의 뒤를 이어 성경신학 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철학에 이어 본격적으로 성경을 강해하게 되었는데, 스콜라 신학으로부터의 ‘무대의 변화’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 사건이다. 그는 첫 성경 주해로 시편을 택한(1513 - 15) 뒤 이어서 로마서 강해 (1515 - 16), 갈라디아서 강해(1516 - 17), 히브리서 강해 (1517 - 18)를 계속했다.
8.수도원의 루터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 용서의 확신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롬 1:17의 말씀에서 복음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죄인이 의롭다고 칭하시는 의이며,인간은 이것을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받는다.
루터는 사망하기 1년 전 작성한 라틴어 저작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 때를 회상하고 있다.
“나는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양심으로 화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울의 그 말씀에 끈덕지게 매달렸고 아주 열렬히 성 바울이 원하는 것을 알고자 하였다.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로 밤낮으로 묵상하는 가운데 나는 그 단어들이 나오는 문맥에 주의를 기울였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거기서 나는, 하나님의 의는 이 의에 의하여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으로 살아가는 바 그 의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 여기서 나는 완전히 새로 거듭나서 열린 문들을 통하여 낙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 …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이전에 미워하였던 것만큼이나 이제 사랑으로 나의 가장 달콤한 단어로 찬양하였다. 이렇게 해서 바울의 바로 그 구절은 내게 진정으로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루터의 아버지는 자영 농민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린데만가 출신이었다.
루터는 당시 관습에 따라 출생 다음 날(성 말틴의 날) 세례를 받고 그 날의 성인의 이름을 따라 말틴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2.루터의 가정은 엄격하면서도 다정다감하였다.그의 부모는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절약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또한 아이들에게 가족이 하는 모든 일은 존경을 받아야 하며 생산적이어야 한다고 배웠다. 루터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땔감을 구하러 다른 부인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시곤 했다고 회상했다.
루터의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서 커다란 야심이 있었다. 저들은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아이들이 잘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루터가 다섯 살 되던 해(1488) 만스펠트의 마을 학교에 취학하여 라틴어를 읽고 쓰는 교육과 성가대 찬송을 위한 음악교육을 받았다. 13살 되던 해(1497) 루터는 마그데부르크로 보내어져 성당 학교를 1년간 다녔는데, 교사들은 ‘공동생활 형제단’의 일원이었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청소년 시절에 중세시대 전체에 있어서 가장 깊은 차원의 평신도 영성 훈련에 익숙했고 친근해졌다.
이듬 해 루터는 아이제나하로 보내어져 3년간 공부하였다. 루터는 이 학교에서 그의 장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요한 트리보스 교장 선생님을 만났으며, 비간트 겔드누프란 스승과는 평생 계속되는 친교를 여기서 시작하게 되었다. 이 두 스승은 루터의 재능을 알아 보고서 졸업이 다가오자 대학에 가서 계속 공부하라고 추천하였다.
루터는 아이제나하에서 그의 발전에 중요한 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는 경건하고 학식있는 상류층 가문인 샬베와 코타의 집들을 자주 방문하면서 저들의 심오한 경건 생활에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이들 가정의 분위기에는 프란시스회의 영성이 물들어 있었으며, 음악성도 계발되었다. 루터는 아이제나하에서 많은 친구들도 사귀는데 이들 중 몇은 평생지기가 된다.
3.당시 루터의 부친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들을 대학에 보낸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아이제나하 선생님들의 대학 진학 계획에 찬성하였다.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어 좋은 자리를 얻게 하려고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시켰다. 루터는 이 대학 교양학부에서 삼학(三學 - trivium. 문법, 수사학, 변증법)과 사학 (四學 - quadrivim.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각기 마친 후 1502년 9월에 문학사 학위를, 1505년 1월에 17명 중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예비학교를 마친 루터는 5월에 본격적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
4.루터가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 하던 중,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7월 2일, 슈토테르하임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에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부르며 소리질렀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수도승이 되겠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이미 무르익었던 터라 루터는 뇌우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데전혀 주저하지 않았다.루터는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들어갔다.
5.1507년 5월 루터는 사제로 서품을 받고 부친이 참석한 가운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다음해 겨울 어거스틴파 수도회의 독일 지역 수장인 슈타우피츠의 추천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불려와 교양학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해 한 학기 강의하였다. 이 때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묵으면서 자신의 고해신부가 된 슈타우피츠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았다.
슈타우피츠는 루터가 영적으로 절망의 문턱에 다다라서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붙잡고서 우리의 죄를 위해 흘리신 그의 가장 고귀로운 피를 보라고 권면했다.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는 가르치는 한편 신학 강의를 들으며 분주히 보냈다.
비텐베르크. 1502년 프레데릭 현자가 세운 대학이 있던 인구 2000명의 도시.작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하지 않은 이 도시는 이제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된다.
6.루터는 1509년에 수도사들의 신학교육도 맡고 대학에서 자신의 신학교육을 계속하기 위해 에르푸르트로 돌아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다음 해 루터는 종단 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로 파견되었다. 당시 ‘교황의 교설(도그마)에 너무나 깊이 심취해 있던’ 루터는 로마에서 카톨릭 교회의 영적인 공덕에 참여하고자 미사도 집전하고 성당, 사원, 카타콤, ‘거룩한 계단’을 마치 ‘미친 성자처럼’ 방문하였다.
여행을 다녀온 후 그는 회고하기를 이 거룩한 도시를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땅에 엎드려 ‘오, 로마여! 축복받은 도시여!’라고 외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하나님이 교회를 짓는 바로 옆에 마귀는 자신의 제단을 놓는다.”고 한 말은 바로 로마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7.로마에서 에르푸르트로 돌아온 뒤 루터는 1511년 여름에 다시 비텐베르크로 옮겨와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1512년 10월 19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3일 후 슈타우피츠의 뒤를 이어 성경신학 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철학에 이어 본격적으로 성경을 강해하게 되었는데, 스콜라 신학으로부터의 ‘무대의 변화’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 사건이다. 그는 첫 성경 주해로 시편을 택한(1513 - 15) 뒤 이어서 로마서 강해 (1515 - 16), 갈라디아서 강해(1516 - 17), 히브리서 강해 (1517 - 18)를 계속했다.
8.수도원의 루터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 용서의 확신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롬 1:17의 말씀에서 복음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죄인이 의롭다고 칭하시는 의이며,인간은 이것을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받는다.
루터는 사망하기 1년 전 작성한 라틴어 저작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 때를 회상하고 있다.
“나는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양심으로 화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울의 그 말씀에 끈덕지게 매달렸고 아주 열렬히 성 바울이 원하는 것을 알고자 하였다.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로 밤낮으로 묵상하는 가운데 나는 그 단어들이 나오는 문맥에 주의를 기울였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거기서 나는, 하나님의 의는 이 의에 의하여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으로 살아가는 바 그 의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 여기서 나는 완전히 새로 거듭나서 열린 문들을 통하여 낙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 …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이전에 미워하였던 것만큼이나 이제 사랑으로 나의 가장 달콤한 단어로 찬양하였다. 이렇게 해서 바울의 바로 그 구절은 내게 진정으로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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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곰님의 댓글
마른곰 작성일
첫 성경 주해로 시편을 택한(1513 - 15) 뒤 이어서 로마서 강해 (1515 - 16), 갈라디아서 강해(1516 - 17), 히브리서 강해 (1517 - 18)를 계속했다.
그의 나이 29세 부터 강해를 시작한다.
젊은이들이여! 비젼을 가지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