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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는 믿음 - 약 2: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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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수인
댓글 0건 조회 674회 작성일 19-12-0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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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는 믿음 - 금요기도회 2019.12.6.

약 2:14~19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마귀도 귀신도 알고 떠는데 결코 자신을 감사의 제사나 겸손과 용서와 헌신을 못함.>

우리는 다 믿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에는 산 믿음이 있고, 죽은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구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고 썩어질 것을 자랑한들 지금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론 과거가 있어서 지금 평안한 삶과 풍요를 누릴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편안이 없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말입니다. 과거를 자랑하거나, 역사를 많이 아는 것과 사람을 많이 아는 것을 자랑으로 삶을 사는 사람은 지금 아무것도 상대에게나 자신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을 알고, 또한 자랑과 과거를 말하는 지식의 믿음을 보여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교리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이란? 머리의 문제도, 입의 문제도, 아닌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불신앙의 생활을 뉘우치며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행함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마귀도 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었습니다. 행 19:15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시니이다.”라고 마귀가 예수를 시인하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지식적으로 승인하였다고 해서 믿음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 산 믿음은 보여지는 행동을 동반한 믿음입니다. 임신된 태아가 남아인지 여아인지는 분만할 때 아는 것과 같이 산 믿음인지 죽은 믿음인지는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 그의 믿음이 행동화 되는가 아닌가를 보면 압니다. 14절에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신자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받음이요, 그 행실은 남들에게 사랑을 내어줌입니다. 그렇게 될 때 믿음은 산 믿음이 되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고보의 신앙은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고전 13:2에서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한 것은 그의 신앙의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행실이 우리의 구원의 공로는 될 수 없으나 구원을 얻은 자의 믿음의 증거품은 되는 것입니다.

2.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15-18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말로만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일은 많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할 수 없고 물질이어야만 도움이 될 수 있는 가난한 자에 대하여 입술로만 평안히 지내라고 부탁하는 것은 도리어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믿음이 죽었다는 말은 죽은 자와 같이 믿음이 아무런 선한 동작을 가지지 못함을 가리킵니다.

3. 믿음이나 행함 중에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 모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산 믿음은 영의 일과 육의 일을 분별할 줄 아는 자입니다. 롬 8:5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죽은 것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의 일을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영이 산 증거요 영이 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극서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인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영에 속한 자는 육체 본위의 행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영에 속한 자는 세상일에 취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취한 자는 하나님의 일보다 육의 일을 중히 보고 천국의 소망보다 세상에서 더 재미를 보려 합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유대인들이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고도 신령한 것을 분별치 못하여 가나안 입국을 앞두고 광야에서 엎어졌습니다. 육에 속한 자는 불순종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산 믿음은 영의 일, 육의 일을 분별할 줄 아는 자입니다.

(2) 산 믿음은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먼저 사랑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후에 있어서 선택할 때 단연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것입니다. 돈이냐? 하나님이냐? 명예냐? 하나님이냐? 출세냐? 하나님이냐?, 이 모든 경우 우리는 단연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전부요 나의 생명이요 나의 구원이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이십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했지만은 그보다 하나님 안에서 주님을 먼저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3) 산 믿음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산 믿음에는 종교적 감화력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의 제사 번제에 이삭을 억지로 데려가서 강압적으로 제물을 삼으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노쇠했고 이삭은 홍안의 소년입니다. 힘으로 이삭을 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알고 믿었던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썩은 냄새가 날 뿐이나 산 믿음에는 타인에게 전해 주는 향기가 있는 법입니다. 위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은 그 사랑까지 이어 받게 되어 있습니다.

(4) 행함, 믿음, 양자, 모두 18-19절에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 중 어느 한쪽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 모두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균형이 잡힌 사람은 신앙(말씀)행동(기도)이 반드시 일치합니다. 신앙적 인간은 위대한 사상을 고찰하기 위하여 서재에만 앉아 있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잠잠히 기도합니다. 2) 균형이 잡힌 사람은 반드시 기도(행함)노력(의지)이 수반됩니다. 기도가 있는 곳에 의지의 노력이 따르기 마련이고 노력과 기도가 따를 때 일의 성사가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균형이 잡힌 사람에게는 반드시 신앙(믿음)행위(거룩)가 함께 있습니다. 신앙을 증명하며 논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행위를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행위가 시도되며 수행되는 것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신앙을 가질 때에는 행동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합니다. 그래서 그 신앙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균형이 잡힌 신앙생활 하기를 원하는 자는 신앙과 행위를 양자택일이 아니라 언제나 양자 모두를 택해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선한 행위에서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 가난한 어부

나이가 73세인 노인 어부가 있었습니다. 그의 집은 너무 가난해서 혹독한 겨울 동안 거의 굶으며 지내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해 겨울, 노인은 먹을 양식이 없어 더욱 힘든 겨울내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노인이 그렌펠 목사님을 찾아와 5달러짜리 지폐 12장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폐는 아주 더럽고 거의 찢어져 있었는데, 그의 마지막 비상금 이였다고 합니다. 노인은 목사님에게 그의 수입 전부를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양식을 사는데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렌펠 목사님은 그 노인의 청을 거절하면서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점점 나이를 먹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더 이상 고기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의 말에 노인은 얼굴에 주름을 가득 담고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목사님.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저를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을 믿고 있습니다. 만약 이 60달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의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반대로 이 돈을 사용한다면 그들은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돈을 받아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SOUTHERN CHURCHMAN)

요한이나 바울이나 예수님이었더라도 야고보의 생각에 맞장구를 치셨을 것이 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ergo, 에르고)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바울에게 있어 은혜와 믿음은 기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편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2)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큰 영적 은사입니다.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갈 5:6). 칼 바르트 마태복음 7:21누가복음 6:46을 주석하면서 말한 것처럼, 다만 "주여, 주여"하고 말하는 것이나 사도신경을 외우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자유롭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오직 믿음"(faith alone)이란 말은 무자격(無資格)한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구원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오직 믿음"이 "믿기만 하시오!" 라는 설유조(說喩調)로 바뀌어 버린다면, 그 때에는 믿음은 칭의를 위한 행위로 전락하고 말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의뢰심 ("염려하지 말라....", 마 6:25이하)은 결국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게 되어버리며 ("하나님, 당신께서 하시죠!"), 믿음에의 권면은 빈궁한 이웃에 대한 선심공작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저 믿기만 하십시오."). 그래봐야 그 불쌍한 헐벗은 이웃은 여전히 도움을 받지 못 한 채로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어려운 형편에 있는 그 이웃을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이웃 안에서 믿음과 행위는 다 같이-서로 보정(補正)하면서-현실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빈궁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진지하고 강렬하고 믿음 충만하다 하더라도 수만 마디의 말이나 잘되라는 인사로서는 그의 상태로 호전 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행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웃입니다. 그리고 더 아나가서 잃었던 형제이며 자녀인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잘되기 위해 이용해 먹어도 좋은 기회는 아닙니다(즉, 자기의 죄책감을 무마시키기 위한 적절한 방법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는 우리가 관계를 맺어야 할 한 천하보다 귀한 인간인 것입니다. 여기에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도들이 돈을 벌어서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물질과 권력이 있는 성도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숨기고 믿음이라는 것으로 하나님만을 떠 맞기는 태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행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0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0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0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마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의 안일과 부귀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닌가? 정작 하나님을 구하는가? 나를 도울 사람을 구하고 나를 풍요롭게 할 돈과 권력을 구하는가? 오늘 이 시간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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