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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욥기 23장 1-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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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수인
댓글 0건 조회 1,424회 작성일 19-05-3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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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욥기 23장 1-17절)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1. 연단은 누구나 받는 훈련과 시험입니다.

성경에서는 영혼이 연약한 사람들의 믿음을 굳게 세워주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일컬어 ‘연단’ 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연단(鍊鍛, test, refine)’은 금속에 붙은 각종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뜨거운 불로 달구는 과정과 벌겋게 되면 꺼내서 망치로 수십 차례 때리고, 차가운 물에 급격히 식혔다가 또 때리고, 지지고, 때리고, 식히고, 때리고 그렇게 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물렁물렁하던 철은 엄청나게 단단해 집니다. 인내를 통해서 우리들의 인격이 단련된다는 것을 연단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물(말씀)과 불(기도)로 연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에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사람의 육체나, 인격, 혹은 신앙의 정도를 성숙하게 다듬어 가는 과정이 연단입니다. “나는 이렇게 연단 받았다”라고 대중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내 자신이 하나님의 혹독한 시험을 통해 신앙의 정도가 증명(인정)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연단은 시험이고, 그 시험은 바로 테스트요, 훈련입니다.

연단이 가져다주는 신앙상의 유익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로 살펴보면,

① 정결하게 만들어 주고(단 11:35; 12:10),

(단 11:35) 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몰락하여 무리 중에서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아직 정한 기한이 남았음이라(뜻 모를 은혜)

(단 12: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② 불순함을 제거하며(말 3: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③ 소망을 이루고,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결국 소망을 가진 자는 이깁니다)

④ 선악을 분별하게 하며. (히 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님의 자연 법칙과 그것을 이루시는 이치와 원리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 가는 지혜를 아는 자들입니)

⑤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해줍니다.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상대나 환경이나 스승이나, 부모로부터 받는 책망의 가르침을 통해서 보다 많은 것으로 감사와 은혜를 찾고 그 겸손과 섬김과 인내를 통하여 선한 하나님의 의에 열매를 맺게 함)

이런 결과론적인 이야기를 뒤로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근본이유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세워 주시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으로 선택하시고, 강하고 담대함으로 무장시키시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게 연단이 다가 온다면 두려워하지도, 거부하지도 마십시오, 그만큼 하나님이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시고, 나에게 특별한 일을 맡기시려고 선택하셨다는 반증이 됩니다.

연단 없이는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 큰일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강도(세기)와 방법만 다를 뿐이지, 다 하나님으로부터 연단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말입니다.

욥기 23장 10절 여기에서는 연단 대신 ‘단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연단’을 거꾸로 했으니 같은 뜻이려니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약간 다릅니다. ‘단련(鍛鍊)’은,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서, 망치로 마구 두드려서 단단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달군 쇠를 많이 두드리면 그 만큼 강도가 세집니다. 단련하지 않은 쇠는 너무 물러서 휘거나 부러지지만, 두드려서 만든 쇠 덩어리는 농기구와 병장기 같은 강한 철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쇠 덩어리가 좋은 제품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이러 저런 상황에 두들겨 맞아보는 단련의 과정이 없다면, 쉽게 넘어지고, 포기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신앙인들은 단 한 대도 맞지 않으려고 좋은 것, 편한 것, 쉬운 것을 찾아 단련 받기를 피해 다니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허약체질(쉽게 시험에 드는 불 같은 사람), 비실비실한 체력(너무 실망과 좌절로 자신을 방치하는 사람)으로 대충 대충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각오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선교초대 교회 모든 성도들을 강하게 두드려서 단련 하시기를 원하시고, 반드시 그렇게 해 나가실 겁니다. 이 땅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면? 반드시 우린 이 땅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이 반드시 있고 다음 세대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우린 주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선악과를 먹는 이 심판자의 교만을 쓸어버리지 않는다면ㄴ 여러분은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불 못의 백성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를 대비해서 우리 모두는 단련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합니다.

욥은 당대에 가장 의로운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극한의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절규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평온하고, 부유하게 살았으며,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 1:1)라고 평가 받았던, 인간 욥의 처절한 부르짖음에는, 너무나도 안일함과 나태함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울림을 가져다줍니다. 욥의 외침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수많은 단련의 과정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준비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서, 가혹한 단련을 하신다 할지라도 흔쾌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러나”라는 신앙고백과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그러나’는 10절의 말머리에 나옵니다.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앞 뒤 말(내용이나 뜻)이 완전히 상반될 때 쓰이는 접속사입니다. 1-9절까지의 내용을 한꺼번에 다 뒤집는 말이 10절의 ‘그러나’입니다. 그럼 9절까지의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욥이 당한 고난을 잠깐 정리해 드리면, 욥의 아들 일곱과 딸 셋은 갑자기 무너진 집에 깔려 죽었습니다. 많은 종들이 있었는데 이방인들이 쳐들어와 그 종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가 키우던 양 칠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소 천 마리, 암 나귀 천 마리는 다 빼앗겼습니다. 거기다가 몸에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질그릇 조각으로 가려운 몸을 긁어 대서 피가 나고 고름이 맺혔습니다. 욥은, 쫄딱 망하였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말이 바로 이런 상황이겠죠.

● 제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진짜 슬프고 화난 일이 있을 때, 땅 바닥에 철썩 주저앉아 고무신으로 땅을 치며, “아이고! 분하고 억울해서 내가 못살아~”대성 통곡하는 장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욥의 심정은 대성통곡을 넘어서 실성 상태였습니다. 갑작스런 이 상황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욥의 아내는, “아직도 (하나님에 대한)그 잘난 충성심이나 붙들고 있다니!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욥 1:9, 우리말성경)라고 비난을 가합니다. 욥이 당한 고난을 듣고 친구 세 사람이 위로하러 찾아 와서 한다는 말이, “네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 하였다면,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고, 심판 하실 리가 있겠느냐? 오히려 네가 죄악이 많고, 숨긴 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냐? 네가 권세를 이용하여 땅을 차지하고, 지위를 이용하여 이 땅에서 거들먹거리고 살았기 때문이 아니냐? (욥 22:4,6,8. 표준새번역) 라는 말들을 퍼부었습니다. 위로는 고사하고 죽기 일보 직전에 있는 사람을 확인 사살 하는듯한 가혹하기 그지없는 질책입니다.

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말씀 1-9절의 내용을 우리말성경과 표준새번역으로 요약해서 읽어 드립니다. “오늘까지도 내 쓰라린 원망은 계속되는구나. 내가 당한 일이 너무 심해서 신음소리도 나오지 않는구나(2절.우리말).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3,4절. 표준)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8절. 표준)

의 당시 심경이 어떠한지 조금이라도 느껴질 정도로 그야 말로 처절한 탄식의 소리입니다.

우린 조금만 누군가에게 책망을 받아도, 혹은 누가 나를 가르치는 조언의 말을 해도 “지가 뭔 대?” 혹은 “자기나 잘하시라고 해!” 등 자기의 잘못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울러 내죄는 연민으로 남의 죄는 더러운 것으로 알고 오히려 분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말 좀하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욥은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원망이나 불경한 말은 일절 하지 않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이 모든 문제가 단전에 해결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 인물 중에 아마도 욥과 같은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자 여기서 결정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러나’가 등장합니다. 욥은, 어느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참혹한 파탄지경에 이르렀음에도, “그러나, 그가 나를 단련하시고 계시는 중이시구나”라고 외쳤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욥과 같은 상황에 부딪치면, 자신의 처지를 심히 비관하고,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선택을 하려 할 겁니다. 아니면, 신에 대한 존재를 부정하고, 모독하고, 자신을 학대하며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괴물의 모습으로 살아 갈 겁니다. 하지만 욥은 ‘그러나’로 반전을 합니다. ‘그러나’를 외치면서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를 힘주어 말하면서 포기와 절망을 차단하고 희망의 끈을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가 없었다면 욥은 망한 상태로 인생을 허무하게 끝 마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는 우리가 성도로서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자신의 모든 처지와 상황을 멸망으로 가는 고난의 길이 아닌, 더 큰 승리를 이루기 위한 단련으로 인식하고, 빠르게 전환 시키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그러나’를 다른 말로 치환한다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법으로는,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는 말과도 유사합니다.

연단, 단련의 단어처럼 실제로 불에 던져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바벨론 왕이 만든 거대한 우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거운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아무 해를 입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이들이 풀무 불에 던져지기 전에 바벨론 왕에게 한 말이 기가 막힌 ‘그러나’, 혹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세 친구가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아멘. 죽음 앞에서 이런 배짱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저는 이 고백이 성경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히는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욥과 같이, ‘그러나’의 확고한 신앙에 붙잡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욥,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를 통해, 자신을 단련시켜 가시는 하나님을 무한 신뢰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결국 순금 같이 되어 나올 것이라는 소망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를 내 자신의 현재 신앙에 접목 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들에는, 각자가 처한 크고 작은 인생의 고난들을 단련으로 전환 시킬 수 있는 ‘그러나’의 반전을 이룰 수 신앙고백이 필요 합니다.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절실합니다. 반드시 통과의례로 이러한 고백을 할 때가 한번쯤은 와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단 한번 만이라도 자신 있게 ‘그러나’를 크게 외칠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순금 같은 귀한 보석이 되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발걸음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23장 10절 말씀을 올 한 해 동안 암송하시고, 묵상하시면서, 내게 주어진 여러 가지 고난을, ‘그러나’의 고백으로 바꾸셔서, 더위도 이기시고, 영과 육이 강건한 순금 같이 단련되는 믿음의 용사로 거듭나시기를 축복합니다.

2. 그리고 가장 핵심이 되는 지금부터의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외친 욥이지만, 정말 욥은 아무런 잘못이 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 중에 7절10-12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잘 들어 보시면, 욥이 주장하는 자기변호가 초점이 빗나가 있음을 느끼실 겁니다.

7절입니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7a) 10-12절입니다.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내 발은 오직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만 성실하게 걸으며, 길을 벗어나서 방황하지 않았건만! 그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계명을 어긴 일이 없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늘 마음 속 깊이 간직하였건만!”(10b;11;12). 어떻습니까? 욥이 하는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욥은 자기 의(義,righteousness, 정직, 고결)에 대해서 자기 확신이 너무나도 확고했습니다. 당당하고 떳떳한 태도입니다. “하였건만, 하였건만”이 반복되면서 욥 자신은 도무지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욥 같이 대단한 믿음의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을 이런 식으로 충분하게 변호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제가 욥 같았어도, “제가 잘못한 것이 뭡니까? 저한테 왜 이렇게 가혹하세요! 저 잘하고 있었잖아요! 대답 좀 해 주세요 하나님!!” 이렇게 하소연 했을 겁니다.

그런데, 욥의 자기변호가 정말 확실하게 맞는 주장이라면, 하나님이 틀렸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욥은 엄청난 착오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왜 고난당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욥이 이토록 모진 고난을 겪고, 단련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정직한 자든지? 거짓의 자녀이든지, 건강한 자이든지, 몸이 불편한 자이든지, 키가 크든지, 작든지,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그 어떤 상황에도 훈련을 받아 연단을 통한 시험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건강한 정금이 필요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들이 잘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하신 모든 역사의 주관자 이십니다. 인간에게 행하신 그 어떤 행위의 시작도, 과정도, 결말도 전부 다 하나님만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놀라운 사랑의 계획을 통해서 자녀들이 잘되고, 잘되는 길을 열어 주시기에, 참으로 복된 길을 구원의 십자가의 길로 푯대로 세워서 이끄시는 것입니다. 욥은, 비록 자신의 행위가 문제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덧입고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의로움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으레 그렇게 하고 있겠거니 라고 생각하며 무감각해져 있었습니다. 욥이 풍요롭고, 평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쫄딱 망해 보니,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자기 자신의 의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욥은, 자기 입으로는 자기 의를 계속 말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편하게만 지내온 신앙 매너리즘이 욥을 자가당착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의 껍질을 다 벗겨냈을 때, 우리의 삶의 가진 것들 전부를 다 없애 버렸을 때, 나의 인격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겨 졌을 때, 과연 내 모습에서 나만 남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모습이 남느냐가 진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욥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자기 의를 떼어 내고, 하나님의 가려진 영광을 온전하게 회복시키시려 하신 것입니다. 욥을 본보기로 해서,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스스로 쌓아 올린 자기 의에 두꺼운 껍질을 강권적으로 벗겨내려고 하신 겁니다. 욥에게 손을 대시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중에는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한없는 은혜와 복으로 귀결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이 오래되고, 깊어질수록, 내 자신이 많이 드러나는 것을 심히 경계해야 합니다. 물질을 주셨으면, 건강을 주셨으면, 예배당을 주셨으면, 가족과 회사를 주셨으면, 거기에서 나오는 풍요와 감사의 조건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야 합니다. 혹시, 그런 것들이 많다, 적다, 크다, 작다 로 인해 움츠러들거나, 고개를 높이 쳐드는 자랑으로 변질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리하시지 아니 할 지라도”의 신앙고백을 완전하게 뒷받침 하려면, 우리들은 육체의 뼈 속 깊은 곳 까지,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밑바닥까지 완전하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제 본격적인 불볕더위가 시작 되었습니다. 올라가는 온도만큼 짜증도 많이 나는 계절입니다. 짜증이 슬슬 올라올 때에, 불 속에 던져진 시험을 담대하게 이겨내고, 전 재산을 가져가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던 오늘 말씀의 주인공들을 기억하십시오. 나도 그들과 같이 될 수 있다고 믿음으로 선포 하십시오. ‘그러나’의 신앙고백을 기억하시고, 모든 상황 속에서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의 몸과 마음을 드릴 수 있는 순금과 같은 교회와 우리 모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어떤 고난과 역경이 온다 하여도, 사람의 방법과 사람의 습관과 관습이 나를 억누르고 불평케 할지라도, ‘그러나’의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사랑을 믿는 믿음의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도록 우리를 단련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올 때, 모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믿음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자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단련 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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