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 문화선교

초대교회

금요기도회

(계1:10)ㅡ나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노라ㅡ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마른곰
댓글 0건 조회 1,613회 작성일 08-02-18 12:43

본문

성령의 감동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1:9)

계시를 받은 사람이 누구이며, 그 당시에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상황, 계시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모습에 관한 말씀이다. 계시를 받은 사람에 대하여는 자신의 신분을 밝힐 때,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과 핍박가운데 처해있는 밧모라는 섬의 위치를 말했다. 그리고 그때가 주의 날이라 하였으며 상태는 성령에 감동되어 있었다고 증거 한다. 여기에서 세 가지로 나누어서 이해를 해야 되겠기에 대지를 셋으로 나누게 된다.



⑴. 대서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⑵. 계시를 받게 되는 과정은 어떠한가?

⑶. 이 계시를 받게 되는 교회들에 대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가?



계시를 받아 쓴 대서자

대서하는 사람은‘나 요한’이라고 시작한다. 요한은 사도가 분명한데도 예수의 제자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 당시의 특별한 상황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편지를 받게 되는 교회의 성도들은 ‘요한’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기 때문에 “나는 너희 형제요 환난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형제라는 말속에 담긴 의미: 예수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입장에서 형제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같은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너희들과 함께 구속받은 사람이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라는 의미를 첫 번째로 보아야한다. 고난을 통해서 같은 동질에서의 형제라는 뜻이다. 요한은 너희가 환난을 당하듯이 나도 환난을 당하고 있다. 너희가 환난 속에서 고난 받는 그 어려움과 같이 나도 너희들처럼 같은 조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같은 입장에서의 형제라 한다.

환난에 동참하는 자라: 너희가 하나님나라 때문에 환난을 받는 사람이 아니냐! 나도 너희들처럼 그런 환난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한이 환난에 참여한 그 환난의 내용이 무엇인가? 요한은 무엇인가 압박하고 짓누르는 것과 같이, 외부로부터 나의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압력이나 중압감을 갖도록 하는 것을 환난이라 한다. 고통과 환난의 차이점부터 알아두자.

내가 진리 앞에서 진리를 지키려할 때 나에게 어려움이 오는 것을 환난이라 한다. 그리고 내가 진리 앞에서 진리를 지키려하지 않을 때 나에게 어려움이 오는 것은 환난이 아니라 고통(고난)이다. 사람들은 내가 잘못하고 내가 하나님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으면서도 내게 오는 것을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핍박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라 악이 가져다주는 환난이며, 악이 나를 지배하고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와지는 징계가 고통이 되는 것이다.

요한이 당하고 있는 환난을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주후94년경에 도미시안 황제의 제사로 인한 종교탄압이 있었을 때 요한은 밧모라는 섬으로 귀양을 갔다가 주후 95년경에 도미시안황제가 죽으면서 풀려났다. 그때는 로마제국에 속한 모든 곳이 황제예배로 인하여 교회나 신자들은 핍박을 받았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이요 ‘나’ 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요한은 나도 예수 믿는 신앙 때문에 환난 받고 있는 그 환난에 동참한 사람이다.

당시에 로마사람들은 로마정부가 요구하는 황제예배와 황제경배 우선에 순종해야 했다. 먼저 황제에게 절한 다음에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게 예배하게 했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나의 죄를 도말시켜주시고 영원한 하늘나라 백성으로 만들어 주셨는데 일시적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제한된 인간이 우선이 될 수 없다는 신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먼저요, 그 다음에 군주인 황제이기 때문에 황제예배를 반대했었다. 이것이 환난의 근원이 되었다. 하나님이냐, 황제냐? 어느 편을 택하겠는가?

요한은 하나님을 택하였기에 밧모라는 섬으로 유배되었다. 멀지 않은 날, 대 환난 때에도 같은 상황이 적용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냐, 적그리스도냐? 선택하는 문제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예수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준비한 성도는 주님의 재림 때 구속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준비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냐, 적그리스도냐? 하는 상황이 그들 앞에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요한은 자신을 참음에 동참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참는다는 뜻은 어떤 상황에나, 환경에나, 대세를 따른다는 말이 아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참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대세에 치우쳐서는 아니 됨을 교훈한다. 바꾸어서 말하면 예수를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서라도 자신의 안전이나 안일을 찾기 위해서 상황이나 환경이나 대세를 따른다면 배교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참는 것은 예수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상황이나 대세나 환경의 외로움을 뚫고 나아가며 견디는 일이 참는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예수가 인류의 구주라고 선포하다가 핍박을 받으며 밧모라는 섬까지 귀양을 온 것도, 새 예루살렘의 왕권을 잃지 않으려고 환난을 당하고 있는 너희 형제라고 말한다.

요한은 자기가 있는 장소를 알리기 위하여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위하여 밧모라는 섬에 있다”고 알린다. 요한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다. 혹은 남의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다. 누구를 때리거나 하는 세상적인 범죄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인이 된 것 때문에 이렇게 당하고 있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예수를 증거 하는 일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다. 말세에는 주의 재림을 선포하게 되면 반드시 핍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처럼 부활의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고 하늘나라 왕권을 잃지 않으려면 어떠한 핍박이라도 참아야 된다.

계시를 받게 된 상태

요한이 계시를 받던 날은 분명하게 주의 날이었다. 주의 날에 대하여는 시편 118편과 재림에 대하여는 요엘서에서 잘 알려주고 있다. 주의 날은 창조하신 날이요, 부활하신 주님의 날이다. 이러한 주의 날에 계시를 받았고, 이 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⑴.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은 주의 날이라고 역사는 증명한다. ⑵.말씀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모세도 십계명을 주의 날에 받았다. ⑶.예수께서 부활하신 날도 주의 날이다. 오순절 성령감림 하시던 날도 주의 날이다. 요한이 이 계시를 받은 날도 주의 날이라 한다.

이 계시를 받을 때, 그의 상태는 성령에 감동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거나 말씀을 전하거나 기도할 때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받게 되고, 계시를 받게 된다. 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계시를 받은 것처럼 받을 수 있다.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 진 것 같이 요한도 성령의 감동으로 주는 말씀을 자세히 듣고 마음에 새겨두었다가 계시록을 쓴 것이다.

이처럼 신자는 말씀을 읽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기도할 때 환난을 피하는 길은 오직 진정한 구속이라는 부활/휴거의 길을 알려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그분의 소원이 구속에 있으며 휴거라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구속이라 하셨다.(엡1:5참조)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1:5-9)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에 부활과 휴거될 자들이 복된 자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공중강림 때 부활이나 휴거에서 탈락되면 대 환난에서 죽임을 당하고 하늘나라로 올라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속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하셨다(고전15:22-24). 여기에서 나중이니 하신 그 후가 언제인가를 알면 된다. 그 후는 둘째부활 때에 심판대 앞으로 나올 자임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속은 휴거 때를 말한다.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5-29)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때 들은 대로 행하여 주님의 공중재림 때 들림 받도록 준비하라고 알려주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감화 시키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사야를 통하여서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하시고“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 성령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니라”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모르는 이유의 첫째는 한 구절만 보고 성경전체 말씀의 흐름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기 멋대로, 자기 지식대로, 자기들의 교단원리대로 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생의 생명에 관련된 성경의 말씀임을 깨닫게 되면 그러한 오류에서 벗어나게 된다. 요한은 이 말씀을 들을 때 큰 음성이 나팔소리 같다고 분명하게 증거 하였다. 그리고 또“너는 보는 것을 책에 써서(Grapon)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꾸어 말하면 일곱 교회에 이 메시지를 써서 보내라는 음성이 큰 나팔소리 같더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보고 들은 것을 일곱 교회에 알리라는 큰 음성이다. 그래서 요한은 자기가 보고들은 것을 하나도 빼지 않고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낸 것은 명령에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에게 알려주신 동일한 성령께서 생명 강을 타고오실 주님의 재림을 보여줄 것이다. 그때 듣게 되는 소리를 사람의 경고로 받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된다. 왜 그런가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말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감동시켜서 알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역사를 볼 때 많은 실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언제나 성경에 조명하여서 진부를 가려야한다.

성경의 말씀은 믿는 자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 하더라도 인간의 환경이나, 의지, 또는 생활 상태에 따라서 환상이나 꿈으로 잘못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심판에 대한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믿고 말씀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성경을 하나님보다 위에 올려놓아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성경 속에 가두어서 그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무모함이 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서 말씀을 하시지만, 성경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일곱 교회와 예수님의 모습

계시를 받고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하여 2-3장에서 교회별로 특성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12-20절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일곱 교회를 대표하여 예수님의 신성만을 보았다. 12절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 중에서 일곱 금 촛대를 요한은 보았다. 이 모습은 에베소교회 상황을 서술하면서 발끝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띄고, 죽었다가 산 자라고 서머나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13절의 말씀에서 발에 끌리는 옷에 대한 세 가지 내용은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사명을 구약의 제사장들이 지성소에 출입 할 때 입었던 특별한 예복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의 선지자의 사명을 구약에서 예언자들이 입었던 예복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을 재림주로 오시는 만왕의 왕으로서 왕궁에 있는 왕의 옷차림으로 중요한 직책들로 알려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땅에서는 선지자와 예언자로 살았다. 승천해서 재림 때 까지는 하나님 우편에서 하늘 지성소에 앉아계시는 대제사장이다. 그리고 재림하시면 천년동안 만왕의 왕으로 오실 분으로 소개한다.

예수의 속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슴에 금띠를 띄었더라’ 한다. 순결과 거룩함을 보여주기 위해 ‘희기가 양털 같고’ 라는 말씀은 더럽지 않고, 거짓이 없고, 간사가 없는 순결성을 말한다. 또한 눈은 불꽃같은 눈을 가졌다고 하시는데 붉은 것은 빛이다. 불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길을 인도하시고 소망의 축복인 생명의 빛이다. 불신자들에게는 죄에 대한 심판불이 된다는 것으로 볼 때 성도의 축복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예수님이 “그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다”고 심판자를 예시한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사랑으로 모든 죄와 악을 오래 참으시고 사랑으로 용서하여 주셨다. 그러나 앞으로 오실 예수님은 공의로 심판하러 오시므로 그때는 사랑으로 다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곧 오신다하면 반대자들은 복음은 위협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안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재림 때까지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표현이다. 그의 참음이 끝나고 재림하실 때는 위협이요 두려움의 나팔소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위엄과 능력이 있다는 표현으로 “많은 물소리와 같다” 하신 것은 재림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견디어낼 자가 없음을 말씀하시면서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더라” 하신다. 이 말씀은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양육하시는 종들을 그의 오른손에 잡고 도우시며, 인도하시며, 동역하심을 의미한다.

창조 때에 그의 입에서 말씀이 나왔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에게는 죄를 용서하고 허물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하였다. 그러나 만물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시는 재림주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 하셨다. 성령이 함께 있는 때는 사랑으로 보호하여 주지만, 성령이 떠나면 사랑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며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멸하시는 뜻을 입에서 칼이 나온다 하였다. 이러한 예수님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했다. 빛은 강하다. 강한 빛을 받아들이는 심령들에게는 영생의 축복이 임한다. 그러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저주와 멸망이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빛은 구원의 축복이냐, 저주냐 하는 것이다.

16절까지는 신구약을 통해서 곧 오실 재림 주에 대한 서술이다.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재림하실 어린양의 신부로 부름 받도록 준비해야 된다. 준비하지 않으면 그때는 대 환난에 남아서 고난을 당한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신다.

2-3장에서 일곱 교회에 칭찬하시고 책망하시고 권면하시며 약속을 성령께서 말씀하신다. 그 성령께서 지금도 말씀을 하실 때 감동감화를 받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의미에서“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는 뜻이다. 믿는 자가 깨어서 근신하며 기도 할 때 귀를 세우고 성령에 감동되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시는 말씀을 듣고 흰 세마포를 입도록 해야 된다.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사도 요한이 어떠한 영광을 보았다. 내용이 무엇을 뜻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러므로 오늘은 마지막 부분에서 대지를 셋으로 나누어서 상고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는; 계시를 받을 때 요한의 영적상태가 어떠했는가?

둘째는; 일곱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가?

셋째는; 계시의 비밀이 무엇인가?

요한의 심령상태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매 한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사도 요한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요한은 자신이 전부터 예수님과 친숙했다고는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요한 앞에 나타났을 때 그의 영광된 광채가 너무나 찬란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압도당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때 요한이 본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던 그러한 모습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는 영광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요한은 예수님의 위엄과 영광 앞에 눈을 뜨지 못하고 죽은 것같이 기절하였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한다. 성경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려졌다는 내용들이 있다. 그중에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에스겔이 엎드려졌다(겔1:28,3:23). 비록 신실하고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았던 에스겔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어서 그의 영광 앞에 엎드려졌다.

이 광경을 좀 더 자세하게 알려주는 내용은 변화 산의 장면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다볼 산’에 올라갔다(마17:1-7,막9:2-8, 눅9:28-36). 그때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을 때에 사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영광에 엎드려졌다. 이처럼 예수님의 영광 하나만으로도 죄인들은 그 앞에 나아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교훈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고 보면 다 죽는다 하였다(삿12:22). 이 뜻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성결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죄인일지라도 예수 앞에 나아가고 그의 영광 앞에 설수 있는 길은 오직 그의 사랑과 긍휼로서 용서해 주실 때만이 가능하다. 그가 오른손을 내어 밀고“두려워 말라”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씀은 죄를 용서해 주시면 예수님 앞에 설수 있다는 교훈이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면서 사죄함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하시는 위로와 말씀을 들었는가? 아니면 나 혼자의 독백인가?

어떤 사람들은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었다. 들림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로와 죄에 대한용서는 아닐 수가 있다. 죄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서해 주어야 된다. 결코 자신이 자기 죄를 없게 하지는 못한다. 말씀을 자세히 보면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요 사랑과 친절과 은혜를 가장 많이 받았던 사도였지만 심판 주 하나님 앞에서는 기절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향하는 사랑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있는 요한을 일으켜주신다. 크신 능력을 가졌으나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요한에게 힘주시고 친절한 말로 위로하시면서 이 계시록을 쓰도록 하셨다. 요한은 큰 음성을 듣고 몸을 돌려서 그가 누구인가? 보려는 순간에 기절하였다 한다. 이렇게 죽은 것 같은 상태에 있는 요한에게 손은 얹으시고 정신을 회복시킨다. 요한이 회복된 때에는 떨리고 두려움이 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려워 말라” 하시면서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신 것은 어둠의 권세가 아니라 계시를 받아쓰도록 담대함을 허락하시고 요한의 마음에 평온을 주신 것이다.

겸손하지 않고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오래 믿어왔다 하더라도 겸손하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아버지 집에 갈수 없을 뿐 아니라 휴거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예수 앞에서 다 죽이고 겸손해야 한다. 이길 만이 사는 길이요, 예수님이 오실 때 나아갈 수 있는 길임을 믿어야 된다.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

예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실 때‘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말씀이다. 처음은 모든 만물, 즉 예수이전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성부와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라고 알리는 내용이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수난당하기 전까지 항상 그를 말씀인(λόϒο󰐠)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라 하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말씀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나는 처음이다’이렇게 소개한다.

나중은 모든 만물이 말씀에 따라 끝나게 되는데, 끝나는 것이 백보좌의 심판 때 그분의 말씀대로 만물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요한이 본 예수님은 인성을 입으셨던 그 예수님이시나 인성을 벗어버린 예수님이라고 소개한다. 인성을 벗어버리고 신성만을 입으신 하나님의 전능성을 소개한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 살아나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하여 서머나 교회에서 설명하시는 성부와 성자의 속성의 내용이다. 성부의 속성에 대하여 이사야는 이렇게 증거 한다.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끝까지 명령하고 만들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41:4)

이사야는 계속해서“이스라엘아 나를 들어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하셨으니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처음이 되신다. 하나님은 모든 시작의 근본이시기 때문에 처음이시다. 성자의 속성에 대하여는, 요한에게 말씀하실 때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하시면서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서는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났다” 하셨다. 계시록 끝에 가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심은 심판을 통하여 나중이요, 예수님 후에는 심판자가 없기 때문에 나중이시다. 만물이 예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나중이요 예수님은 심판자이며 종말이기 때문에 나중이다.

이렇게 만물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다가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께서 왜 자기 때를 모르시겠는가? 때를 모르고서 어떻게 만물을 심판하시며 그날을 모르고서 어떻게 나중이 되시겠는가. 세상법정에서도 재판을 할 때면 그날과 시간을 알려준다. 하물며 만물을 심판하실 그분이 심판의 시작이 되는 재림 때를 알려주시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심판하시겠는가? 그렇게 하신다면 그분의 공의라는 속성이 파괴된다. 그러므로 재림 때를 아들도 모른다고 부정하지 말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깨어 기도하며 준비해서 대환난의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믿는 자의 자세란 말씀이다.

요한에게 나타나시고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죽임을 당한 일에 대하여 “내가 전에는 죽었었다” 하시는 말씀은 계시를 알려주시는 분이 요한과 동거하고 가르치실 때 사람의 몸을 입으셨던 예수님이지 다른 이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앞서 당한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내가 전에 죽었으나 말씀은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서 인성을 벗어버렸을 뿐이지 결코 신성마저 벗어버리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일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죽지 않았고 요한이 본 그대로 살아 있음을 알리신다.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산 자라하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과 생명에 대하여 “나는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다” 한다.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의 문을 여셨으며, 영원한 생명에 근원이 되심을 알리신다. 내가 산 자라는 말속에 몇 가지 뜻이 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 마귀의 권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이시라(고전15:20-) 하시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 하셨다.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는 말은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말해준다(2:12).

이 말은 예수님의 전능성 중에서 공의를 말한다. 이 뜻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이 선 어떤 칼보다 더 예리하며 영과 혼과 관절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아시기 때문이라 하셨다.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신다.” 하셨고, 끝으로는 그의 입에서 이한 칼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시겠다(계19:14)고 말한다. 이 내용은 마지막 때에 심판을 경고하지만 회개치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두려운 말이다. 인간이 회개했다고 말할지라도 마음과 생각과 뜻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회개가 있느냐? 하는 말이다.

그 발은 풀무에 연단한 빛난 주석같다(1:15)는 내용은 두아디라 교회에서 “그 다리는 곧고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반들반들한 구리 같다”한다(2:18). 다니엘은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불 같고 그 눈은 햇빛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다” 하였다. 선지자의 말씀도 심판하실 주님에 대하여 증거 하였으나 지금까지는 사랑으로 모든 죄와 악을 용서하여 주시지만, 정한 날부터는 공의로 심판하시고, 징벌하시고, 불 못에 던져 넣으시는 예수님의 공의를 말하신다.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다(1:16)는 말씀은 사데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데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예수님이라하셨다(계3:1) . 하나님의 속성과 삼위일체를 앞에서 상고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치되고 그분의 주권 안에서 움직이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 뜻은 주의 종들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이요, 주의 종들이 하는 모든 일들은 예수님의 뜻 안에서 행하여진다는 말이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이(1:18)에 대하여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3:7)“열쇠를 가지신이....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가 가라사대 볼 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하셨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휴거상을 보여주신다. 대환난 때에 무저갱의 열쇠로 여니 큰 풀무의 연기 속에서 황충이 나와서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다섯 달 동안 고통을 준다. 또한 영원한 유황불 못에 갇히게 되면 사탄과 사탄의 하속들을 무저갱에 가두고 닫아버리면 아무도 열지 못한다는 뜻이다. ⑴.사망의 열쇠는 한번 닫아놓으면, 죽음도 삶도 없다. ⑵.음부의 열쇠는 한번 닫아놓으면,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고 또한 꺼내지도 못한다. ⑶.천국의 열쇠는 왜 없는가? 천국은 침노하는 백성들에게는 열려있기 때문이다.(마11:12.눅16:16)

이러한 예수님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다에 대하여는(1:16),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다(계3:14). 다니엘은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하셨다(단12:3). 사사기에서는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같이 힘 있게 돋아난다” 하였다.

예수님은“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띄었다”(1:13) 하심에 대해서는 에베소교회에 나타나신 천국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다. 땅에 있었을 때에는 선지자요, 천년왕국 때는 만왕의 왕임을 보여주신다. 이렇게 일곱 교회의 모습을 종합해서, 20절은 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 사이에 관한 설명이다.

요한에게 기록하라는 것

요한에게“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세 가지를 명령하셨다. ⑴.본 것은 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들 사이에 관한 내용이다. ⑵.이제 있는 일은 당시와 또 현재라는 교회들의 상태에 관한 내용이다. ⑶.장차 될 일은 종말이 어떻게 되는가에 관한 내용이다.

첫째로 본 것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다. 그리고 4-5장에서 요한은 하늘위에서 되어 질 것을 보았고, 둘째로 본 것은; 6-22장까지 일들이며 장차 될 일이다. 이 일들을 나누면 6-18장까지는 앞으로 세상에서 되는 환난과 대환난이다. 열두 장을 할애하면서 쓴 것은 대환난이 그만큼 무섭고 두렵고 참기 어려운 참상이기 때문이다. 대 환난은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을 잘 지켜 온 성도들은 휴거되고 대 환난을 당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심판의 경고를 무시했던 사람들과 불신자들은 대환난속에서 짐승의 표를 거부하다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살기위해서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은 대환난이 끝날 때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으로 죽게 된다.

9-20장은 세상문화를 없애버리고, 지상 재림을 하시면서 천년왕국으로 이루어진다. 이때는 대환난중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있던 자들은, 주님과 함께 왕권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으로부터 오는 성도들을 만나게 되고, 천년동안 그들의 다스림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21- 22장은 천년이 끝날 때 잠간동안 곡과 마곡의 전쟁이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사탄과 그의 하속들을 영원한 유황불 못에 던져 넣는다. 마귀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은 못 가게 방해한다. 그러나 천국에 가려고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도우신다. 성령이 도우실 때 자신의 의지를 천국으로 향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도록 예비해 놓으신 곳에서 살게 된다.

이처럼 모든 장래일 까지 요한에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그 예수님이 당신의 신부들이 환난을 당하도록 버려두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한 구절만 읽고서 속단하면 안 된다. 전체의 흐름을 보는 것이 더 유익하고 바른 방법이다. 또한 빛의 자녀들에게는 그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그날은 도적같이 임한다는 무지한 생각을 벗어버리고 준비하는 자세가 되어야한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2-3)

심판 주께서 심판하러 오시면서 심판 주 스스로가 심판 날을 모르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님께서 알려주신다. 심판은 그들에게는 무서운 일이기 때문에 잊어버리려는 심리라 하신다. 또한 그들은 불의하기 때문에 의의 흰 세마포를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연고라 하신다. 그러므로 재림 때는 불의한 자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으신다. 불의한자들은 자신이 모르므로 “아무도 모른 다” 하는 것이다. 불의한자들은 대 환난에 남아야 되기 때문에 자신의 온전치 못함을 감추려고 한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내가 너를 권하노니....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계3: 15-1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 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7-8)

주님은 말세에 사는 성도들은 주님의 오심을 끝까지 전하는 나팔수가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사도신경으로 매일같이 암송한다. 요한이 보고 들은 것을 하나도 빼어놓지 아니하고 일곱 교회에 전한 것과 같이 우리들에게도 전하는 나팔수가 되라는 것이다.

요엘선지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 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라. 이제 임박하였다” 하신다. 마지막 때 마지막 지상최대의 사명은 때를 알리는 일이다. 그리고 신자의 기쁨은 나팔수가 되는데 있다. 요한과 같이 나팔수가 되어서 나팔을 불어야 하늘의 군사임을 알게 된다. 나팔을 불 때 천사가 함께하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알면서도 외치지 않는 나팔수는 그 죄가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 환난에서 피하도록 힘차게 외치는 신자가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총회신학교
CCS
쥬빌리 통일구국기도회
대한민국전자정부
행복발전소
Prayer
대한성서공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