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잘 안 되는 이유 - 요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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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잘 안 되는 이유
(요 15:1-7)
요한복음 15:1.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가 잘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말씀 증거 하겠습니다.
일전에, ‘방언하는 성도들이 부럽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피곤한 줄 모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그럼,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를 잘 할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한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방언으로 기도하는 성도들보다, 그렇지 못한 성도들이, 훨씬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기도를 잘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도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해 오해가 있으므로, ‘기도가 잘 안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과연 기도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요.
기도가 잘 안 되는 이유를 정리하여, 항상 기억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또한 모든 성도들이, 이전보다 기도를 더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씀이, 누가복음 18:1-8에 기록된,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입니다.
‘그가 왜 불의한 재판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었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이 재판장은, 자기 권세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사람들을 대할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과연,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억울하고 원통한 자들의 고소마저도 묵살해버리는, 불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털끝만큼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니, 불의한 재판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그를 찾아간 사람이 있었죠? 도시에 사는 한 과부였습니다.
그 여인이 불의한 재판장을 찾아간 것이죠?
자주 찾아가,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여러분! 이 재판장이 과연 그 여인의 원한을 풀어줄 확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여인이 아무리 찾아간들, 재판장은 그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왜죠? 그는 불의한 재판장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2:22b-23을 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과부나 고아나 나그네에 대해 당부하십니다. “그들을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하나님의 준엄하신 명령입니다.
하지만 재판장은 과부인 여인의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겠죠? 들어줄 리 만무합니다.
왜요?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평소 사람들을 무시하는 자 아닙니까? 여인의 호소를 들어줄 확률은 ‘0’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실낱같은 희망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재판장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라도 짓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만, 만약 죄를 지을 때, 그 죄로부터 돌아설 수 있으려면, 자기 자신이, 죄지은 사실을 인정하면 가능합니다.
물론, ‘알고 있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자신이 죄지은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죄에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죄를 인정하는 사람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과는 확연히 차이 납니다.
불의한 재판장의 경우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가 만약,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면, 불의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가 자신에게 불의한 면이 있음을 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불의한 재판장이, 고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어떤 고민이죠?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는 고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비유를 마치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무엇을 들으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해석하여 줄 터이니 깊이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후 이어지는 예수님의 해석을 보면, 불의한 재판장은 과부의 하소연을 들어줬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죠?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장도, 여인이 찾아와 자꾸 호소하고, 번거롭게 하며 괴롭게 하니까,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줬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도, 그는, 자신의 번거로움과 괴로움을 더 중히 여겨,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죠?
이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강조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택하신 자들이 밤낮 부르짖으면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겠다”는 말씀을 강조하시려는 게 아닐까요? 맞습니다. 예수님도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늘 기도하되,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시는 핵심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는 말씀만 하신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통상 성도들은, “속히 원한을 풀어주겠다”는 말씀만 기억할 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씀에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는, 인간이란 존재의 성향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원한을 풀어주겠다’며, 시원하게 말씀하시고는, 조건을 다셨죠?
다시 말해 굳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씀을, 하셔야 했을까요?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응답 받는 여부와 관계없이 늘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즉, 자신의 간구에 아무런 응답을 해 주지 않으셔도, 낙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강조하고자 하시는 핵심은 무엇이죠? 기도에 대한 우리의 바른 이해와 믿음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기도한 내용에 대한 응답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그래서겠죠?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응답을 해 주지 않으시면, 쉽게 낙심해 버립니다.
더 이상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기도를 소홀히 하다, 결국 중단해 버립니다.
그런 현상은, 우리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오면 올수록, 점점 증가할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이미 예견하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시며, 그 비유의 결론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기도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해서, 바른 기도를 드리려는 믿음입니다.
본문도, ‘바른 기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의 핵심 구절은,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구절에서, 다수의 성도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이 무엇이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일 겁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요청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부분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소비해버리면 곤란합니다.
본문 7절 가운데, 진정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앞에 있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늘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여기서 ‘거하다’란 단어를, 본문에서만 7번 반복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죠?
주님 안에 거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님 안에 거하라’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본문 1-2절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라’는 것은, ‘주님께 붙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본문 4절의 증거처럼, ‘주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만이 포도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주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도 아닙니까?
우리 삶에서 전제되어야 하는, 또 한 가지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합니다.
무슨 뜻이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이 주님을 대리하는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도록 하려면, 기도로써 주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하고, 주님을 대리하는 성경 말씀이, 주님의 대리자임을 믿고,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본문 7절에서 핵심 단어는, 하반절이 아니라 상반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반절을 기억할 뿐, 상반절에 대한 기억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성장 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1973년 5/30-6/3일까지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당시 약 334만 명이 모였던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세계 50대 교회 중에, 한국교회가 무려 27개가 들어가 있을 정도로, 성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OECD 국가 중 이혼율 1위와, 5년 연속 자살률 1위라는, 세계 국가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나라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교회의 성장과 반비례하는 사회적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교회가,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고요.
그리스도인 또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채, 복음을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2010년 이후로, 교회는 급격하게 쇠퇴했고, 사회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고요.
2019년 12월에 발생한, ‘코로나19’라는 직격탄을 맞고는, 파선해 버린 교회들이, 급격하게 늘어가게 되었습니다.
현재 수도권에는, 잘 지은 교회들의 경매 매물만, 2,000개가 넘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배당만, 크고 화려하게 지으면, 성도들이 몰려온다’는 공식이, 깨진 지 오래입니다.
그런 공식이, 늦게나마 깨진 게 은혜 아닙니까?
만약 깨지지 않았다면, 지금도 교회의 외적 성장이, 복음의 핵심인 것처럼 여기고, 그처럼 비본질적이고 비성경적인 부분에 애쓰는 교회들이 많을 것입니다.
만시지탄이나마, 이제부터라도, 본문 7b절의,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을, 교회 성장과 개인의 축복의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서, 고난의 상징인, 주님의 십자가가 강조되지 않습니다.
성도들마저도,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길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처럼, 교회를 제멋대로 운영하고, 성도들이 제멋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힘을 빌려와, 고회와 성도들이 원하는 것을 이뤄내려고 한다?
어찌, 그러한 교회와 성도들을, 훌륭한 교회, 좋은 믿음을 가진 성도라고 할 수 이겠습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본문 7a절의,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을,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서, 늘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기도로써 주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해야 하고요.
주님을 대리하는 말씀이 주님의 대리자임을 믿고,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기도가 잘 되지 않는 이유를 알아, 기도에 대한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는 물론, 인간 자체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인간의 존재만, 자신의 유한함을 느껴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떠나면 매우 방황하고 불안해하며, 공허함을 느끼게 되고요.
그런 감정을 자기 내면에 간직하게 됩니다.
여러분! ‘마음이 불안하고 공허하다’는 것은, ‘마음에 모자람이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처럼 불완전한 심리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무엇으로 채워야 합니다.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요? 오직 주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런 찬양 있죠?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찬양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이처럼, 주님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게, 기도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한 가지 풀지 못한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몇 마디하고 나면 할 말이 없어, 매번 기도하면서 가만히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기도입니까? 기도가 아닙니까?
엄연히 기도입니다. 왜요?
가만히 있는 것 같으나, 기도하러 나왔으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도 그런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이런 기도의 모습을 두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다 조율한다’고 말합니다.
조율하는 것은,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자주 쓰는 용어입니다.
제가 목회자가 되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 잘 아시죠? 현악기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싫든 좋든,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에, 종종 가야 했습니다. 친분을 쌓아, 바이올린 한 대라도, 더 팔기 위해서였습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단원들이 일제히 무대 뒤에서 나와, 다 착석해 있습니다.
객석에서 볼 때, 오른쪽 퍼스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앉아 있는 좌석의 맨 앞자리만 비어 있습니다. ‘콘스트 마스터’라는, 오케스트라의 최고 단원인, 악장의 자리입니다.
지휘자가 등장하기 전에, 악장이 나오는데요.
그가 하는 일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악기를 조율하는 일입니다.
악장이, 바이올린 위에 활을 올려놓으면, 모든 단원들이 악장의 손을 지켜봅니다.
이때, 목관악기인 오보에가 ‘라’음을 불어 주면, 악장이 그것을 기준 음으로 삼아, 모든 단원들이 ‘라’음에, 자신의 악기를 조율해야 합니다.
그들은 음감이 매우 민감해서, 아주 정밀하게 조율을 합니다.
줄이 느슨하여 음이 낮거나, 줄이 팽팽하여 음이 조금이라도 높아서는 안 됩니다.
음이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아야, 원하는 음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율이 완벽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지휘자가 나와 무대 인사를 하고, 연주를 시작합니다. 만약, 그런 조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악기들이 제소리를 못 내어, 연주가 엉망진창이 됩니다. 따라서, 훌륭한 연주를 위해서는, 반드시 조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기도라는 것도 마찬가지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자칫하면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 또한 우리의 삶에서 너무 긴장하여 팽팽해져 있다든지, 너무 긴장이 풀려서 느슨해져 있으면, 올바른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하고요.
그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의 마음을 조율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조율되었을 때, 즉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는, 협착한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다 조율하고 나니, 협착한 눈이, 크고 넓은 눈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우리의 현실을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요.
다른 성도들은 물론, 우리의 이웃들까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도가 잘 안 되는 이유는, 기도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기도란 결코, 하나님께 소리를 내어 호소하는 것만이 아님을, 거억해야 합니다.
물론, 시원하게 호소하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지고, 기분이 업 되면서, 얼마나 큰 행복감과 평안함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호소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고, ‘기도가 잘 안 되더라’고, 입으로 시인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도, 엄연한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윽한 눈으로 아빠 엄마를 바라봅니다.
그러면 아빠 엄마는, 그 아이들이 무엇을 호소하는 것임을 알고, 그것을 채워주죠?
굳이 호소하지 않고 바라만 보았는데도, 부모는 알고서, 아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러 와서든지, 삶의 현장에서든지, 복잡한 심정 때문에, 기도할 말을 잊어버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기도입니다.
소리 내어 기도가 되지 않아, 텅빈 마음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기가 막힌 어려움 때문에, 예배당에 꿇어 엎드려서,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맘을 들으사♩라며 찬송 부르는 것도, 엄연한 기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소리 내어 기도해도 좋고요. 마음 속으로 기도해도 좋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의 마음이, 많이 속상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으니, 더욱 속상합니다.
여러 가지 해결할 게 많은데, 해결되지 않아, 지금 저의 마음이 찢어질 듯합니다.
다시 한번 간구합니다. ‘저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나서 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게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었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구동성으로 ‘기도가 잘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만약 아이들이, 아빠 엄마를 바라만 봐도, 필요를 채워주니까, 바라보고 요구만 할 뿐, ‘아빠 엄마의 말은 듣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 아이들이, 반듯한 성인으로 성장하겠습니까? 극도로 이기적인 사람이 될 거고요.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할 거고요.
심하면,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 반사회적이고 비그리스도인 자가 될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 자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기도하고, 그 후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통해 말씀하시고, 현재를 통해 말씀하시고, 미래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우리가 성경을 들었거나, 읽었던 것을 통해, 말씀하시고요.
우리가 현재 읽고 있거나, 묵상하고 있는 성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요.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고 있으면,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마치 옆에서 사람이 속삭이는 것처럼,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네가 내 이름을 위해 싸웠구나!’ ‘네가 정말 힘들었겠구나!’
“‘너의 찢어질 듯한 심정과 고통을 내가 다 안다.’
‘앞으로도 나를 위해 싸워줄 것이고, 반드시 이길 줄로 믿는다.’
‘내가 너를 신뢰하거든!’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너를, 기쁜 마음으로 위로해! 힘내라!!!‘”
아주 다정하고, 포근하며, 다독거리는 듯한,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까지 들어야,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기도가 잘 안 되는 이유는, 기도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리를 내어 부르짖는 것도 기도이고요.
가만히 앉아,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도 기도이고요.
주님을 마음에 품은 채, 텅 빈 시선으로, 교회나 거처의 천정이나, 먼 산이나,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기도이고요. 기도의 어려움 때문에, 찬송을 읊조리는 것도 기도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기도한 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고백하며 일어서지 마시고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 등, 모든 시제를 통해,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기도할 때, 본문 7b절의 언약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실 거고요. 설령 주시지 않아도, 원망보다 외려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에 조율하는 신앙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아무쪼록, 이제부터 우리는,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늘 하나님과 교통하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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