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의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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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가리발디의 애국관
가리발디는 19세기 이탈리아의 개혁과 통일운동에 공헌한 국민적 영웅.
어느날 가리발디가 청년들을 모아놓고 조국을 위해 싸우자고 역설하자 한청년이 나와
『만일 내가 조국을 위해 싸운다면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가리발디는 단호하게 말했다.
『칼에 베인 상처, 심한 부상, 끝내 죽음이 대가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대들의 상처와 죽음으로 이탈리아는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이요, 우리의 후손은 평화롭게 살 것입니다』
세 가지의 유형,
1)기독교인이면서 우상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결혼때도 보니 목사님에게 와서 날짜를 정하고 가장 좋다는 날에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우상 제물 먹기 좋아하고 참예하고... 양쪽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아직 결단이 없어서 예수님도 믿어야 될 것 같고 또 우상에게 제사도 드려야 될 것 같고 안드리자니 귀신이 노할 것 같은, 구래서 두가지를 다 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
2)기독교인이 되어서 우상의 제물 즉 고기를 대할 때마다 꼭 우상에게 제사드리는 느낌이 있는 사람이다. 아주 단호하게 끊어 버린다. 그래서는 꼭 물어본다. "이거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고기요, 아니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가체가 우상을 섬기는 일이니까 안된다 하고 엄격히 금하는 이런 사람이다.
3)다른 한 부류는 수준이 다르다. 우상이란 본래 없는 것이다. 우상이 어디있느냐, 귀신이 어디 있고 혼백이 어디에 있느냐, 어디 갖다 놓았건 음식은 음식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감사함으로 먹으면 그만이다. 귀신이 이빨자국을 냈나, 침 발라 놓았나, 무슨 상관이냐,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조금도 꺼림직한 게 없다. 그냥 먹는다.
이렇게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서로를 비웃고
판단하는 것이다. 충돌하고 시비가 생긴다.
자유의 제한성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은 정말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할 만큼 신앙 형태를 가지지 못했다. 예수님을 믿지만 그 문화 생활, 의식 구조 같은 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30%밖에 안된다. 그러니까 교회에 나와서는 교인이고 집에 가서는 아니다. 또 시장에 가서는 더더욱 아니다. 이렇게 해서 어떤 때에 보면 천국과 지옥을 왕래하는 것이다. 미숙한 교인이다. 학술적으로 dishamanization, dibuddhization, diconfucianization... 등의 용어가 있는데 내가 신학교에서 강의 할 때에도 이 문제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학과마다 어떤 면에서 이런 문제를 놓고 취급을 하게 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다 모르고 있다. 그래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있다는 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 우리는 다 시체를 싫어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딱 죽으면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귀신, 도깨비, 혼령...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한다. 바로 무속이다. 그런데 철저히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을 가 보니 시체를 전혀 싫어하지를 않는다. 아이들도 가서 끌어안고 뽀뽀를 하고 그런다. 시체에다 "I love you!"하고 키스하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우리네 요새 사람들은 "나도 같이 가요"라면서 관을 잡고 울기는 하는데 키스하는 것은 못보았다. 같이 있으려고도 안한다. 시체는 어디까지나 시체이다. 영혼이 떠난 육체일 뿐인데 그게 왜 무서운 것인가? 이게 우리의 샤머니즘이다. 무속 종교가 거기 있는 것이다.
물질에 자유하지 못한 사람
어느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지 못하는 것은 내것은 어느놈이 들고서 좋아할 것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지기 대문이이다]고 했는데 자유는 울화통이 아니라 새로운 소유를 향해 달려가게 하고 그것을 인하여 기뻐하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포기하게 합니다.
박약제(博約劑)
퇴계 선생은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큰 그릇이 되라고 건물구조 자체를 공(工)자로 설계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의실 전관에 '박약제'란 현판을 걸어 두었습니다.
'박약제'란 말의 뜻은
'박'자는 박사할 때의 박(博)자이고 '약'자는 절약할 때의 약(約)자입니다.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입니다. 이조 5백년 동안 유교의 예절이 너무 번거로워 백성들의 삶을 위축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퇴계 선생은 지나친 예절의 폐해를 살피시고 후학들에게 학문을 넓히되 예절은 줄이라는. 삶의 큰 길에 대해 바로 가르쳤습니다.
이 박약제'란 말을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적용하여 봅시다.
학문을 넓히고 예절을 줄이라는 말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복음'을 넓히고 '율법'을 줄이라는 말입니다.
분명히 복음은 삶을 누리고 자유함을 얻는 정신이어야겠는데, 우리는 옛날 조상들이 예절에 너무 매여 인간성이 억압받았듯이 율법에 매여 즐거운 삶이 제한당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사실 자체는 고통에서 해방된 삶을 누린다는 뜻이며 어느 경우나 매임이 없고 막힘이 없이 당당하고 넓은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몸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가리발디는 19세기 이탈리아의 개혁과 통일운동에 공헌한 국민적 영웅.
어느날 가리발디가 청년들을 모아놓고 조국을 위해 싸우자고 역설하자 한청년이 나와
『만일 내가 조국을 위해 싸운다면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가리발디는 단호하게 말했다.
『칼에 베인 상처, 심한 부상, 끝내 죽음이 대가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대들의 상처와 죽음으로 이탈리아는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이요, 우리의 후손은 평화롭게 살 것입니다』
세 가지의 유형,
1)기독교인이면서 우상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결혼때도 보니 목사님에게 와서 날짜를 정하고 가장 좋다는 날에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우상 제물 먹기 좋아하고 참예하고... 양쪽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아직 결단이 없어서 예수님도 믿어야 될 것 같고 또 우상에게 제사도 드려야 될 것 같고 안드리자니 귀신이 노할 것 같은, 구래서 두가지를 다 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
2)기독교인이 되어서 우상의 제물 즉 고기를 대할 때마다 꼭 우상에게 제사드리는 느낌이 있는 사람이다. 아주 단호하게 끊어 버린다. 그래서는 꼭 물어본다. "이거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고기요, 아니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가체가 우상을 섬기는 일이니까 안된다 하고 엄격히 금하는 이런 사람이다.
3)다른 한 부류는 수준이 다르다. 우상이란 본래 없는 것이다. 우상이 어디있느냐, 귀신이 어디 있고 혼백이 어디에 있느냐, 어디 갖다 놓았건 음식은 음식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감사함으로 먹으면 그만이다. 귀신이 이빨자국을 냈나, 침 발라 놓았나, 무슨 상관이냐,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조금도 꺼림직한 게 없다. 그냥 먹는다.
이렇게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서로를 비웃고
판단하는 것이다. 충돌하고 시비가 생긴다.
자유의 제한성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은 정말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할 만큼 신앙 형태를 가지지 못했다. 예수님을 믿지만 그 문화 생활, 의식 구조 같은 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30%밖에 안된다. 그러니까 교회에 나와서는 교인이고 집에 가서는 아니다. 또 시장에 가서는 더더욱 아니다. 이렇게 해서 어떤 때에 보면 천국과 지옥을 왕래하는 것이다. 미숙한 교인이다. 학술적으로 dishamanization, dibuddhization, diconfucianization... 등의 용어가 있는데 내가 신학교에서 강의 할 때에도 이 문제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학과마다 어떤 면에서 이런 문제를 놓고 취급을 하게 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다 모르고 있다. 그래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있다는 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 우리는 다 시체를 싫어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딱 죽으면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귀신, 도깨비, 혼령...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한다. 바로 무속이다. 그런데 철저히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을 가 보니 시체를 전혀 싫어하지를 않는다. 아이들도 가서 끌어안고 뽀뽀를 하고 그런다. 시체에다 "I love you!"하고 키스하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우리네 요새 사람들은 "나도 같이 가요"라면서 관을 잡고 울기는 하는데 키스하는 것은 못보았다. 같이 있으려고도 안한다. 시체는 어디까지나 시체이다. 영혼이 떠난 육체일 뿐인데 그게 왜 무서운 것인가? 이게 우리의 샤머니즘이다. 무속 종교가 거기 있는 것이다.
물질에 자유하지 못한 사람
어느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지 못하는 것은 내것은 어느놈이 들고서 좋아할 것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지기 대문이이다]고 했는데 자유는 울화통이 아니라 새로운 소유를 향해 달려가게 하고 그것을 인하여 기뻐하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포기하게 합니다.
박약제(博約劑)
퇴계 선생은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큰 그릇이 되라고 건물구조 자체를 공(工)자로 설계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의실 전관에 '박약제'란 현판을 걸어 두었습니다.
'박약제'란 말의 뜻은
'박'자는 박사할 때의 박(博)자이고 '약'자는 절약할 때의 약(約)자입니다.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입니다. 이조 5백년 동안 유교의 예절이 너무 번거로워 백성들의 삶을 위축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퇴계 선생은 지나친 예절의 폐해를 살피시고 후학들에게 학문을 넓히되 예절은 줄이라는. 삶의 큰 길에 대해 바로 가르쳤습니다.
이 박약제'란 말을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적용하여 봅시다.
학문을 넓히고 예절을 줄이라는 말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복음'을 넓히고 '율법'을 줄이라는 말입니다.
분명히 복음은 삶을 누리고 자유함을 얻는 정신이어야겠는데, 우리는 옛날 조상들이 예절에 너무 매여 인간성이 억압받았듯이 율법에 매여 즐거운 삶이 제한당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사실 자체는 고통에서 해방된 삶을 누린다는 뜻이며 어느 경우나 매임이 없고 막힘이 없이 당당하고 넓은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몸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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