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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 고후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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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수인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1-10-06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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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자기 아내의 귀가 자꾸 어두워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어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의논했습니다.

“선생님, 제 아내의 청력이 전과 같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느 정도로 심한지 먼저 집에서 간단히 테스트해 보세요. 부인이 부엌에서 일할 때 7m 쯤 뒤에서 말을 해 보세요. 알아 듣지 못하면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가서 말을 해 보세요. 그러면 부인의 청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래서 그는 아내가 부엌에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7m 거리에서 물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 대답이 없었습니다. 5m 거리에서 다시 물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습니다. 3m 거리에서 다시 물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아내의 귀에 대고 물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 그제서야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내가 닭요리를 한다고 세 번이나 말했는데…….”

누구의 귀가 멀었습니까? 아내의 청력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의 청력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단점이나 고쳐할 점은 모르고, 상대방을 고치려 합니다. 회사에서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보고 “나쁜 사람, 나쁜 사람.” 하지만, 자기의 근무 자세가 좋지 않은 것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전과 같지 않게 시큰둥하게 대한다고 ‘아내가 변했구나.’라고 하지만 아내가 변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내를 한숨 짓게 하는 초라한 남편으로 전락한 것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남을 고치려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고쳐야 됩니다. 우리 자신의 단점을 스스로 발견해서 고쳐 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살피는 길밖에 없습니다.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배고픔과 피곤함도 느끼고 화도 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위대한 삶을 산 것은, 그가 쓴 편지가 성경이 되고 그의 이름이 성경에 별처럼 수놓아지도록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6절에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내 흉내를 내며 살아라. 나를 닮으라.”라고 설교할 정도로 완벽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하나님 앞에서 사니, 귀한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편지를 쓸 때, 고린도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를 쓸 때, 그 편지들이 성경이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편지들을 하나님 앞에서 썼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이 『이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 앞에서 말하노라.” 바울이 어리석은 사람처럼 교인들에게 자기 자랑과 자기 변명, 자기 간증을 하고 교인들을 책망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인들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설교하고 하나님 앞에서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쓰니 그의 편지가 성경이 되는 축복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누구나 귀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귀한 일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여러분만을 상대해서 설교하면 값싼 설교가 됩니다. 여러분만을 생각하며 말씀을 준비해서 설교한다면, 이 설교는 가치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여 여러분에게, 우리나라와 세계 지구촌 만민에게 설교하지만 사람만을 상대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 백성에게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될까요?’ 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준비하고 말씀을 전하니 하나님께서 제 설교를 통해 사람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24절에도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축복하시고 상을 내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환자만 보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환자를 내게 보내 주셨구나.’ 하고 감사하면서 그 환자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치료할 때 그 환자는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 병원을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람만 상대하니 잘못할 수 있고 비굴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면 잘못할 수도, 실패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잠언 22장 29절에 말씀하십니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구두 닦는 일을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분의 구두를 잘 닦아 드려야지.’하는 마음으로 닦으면 반드시 성공할 줄로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저 이삼천 원을 번다는 생각만으로 구두를 닦는 사람은 큰 성공자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대구의 한 부인이 식당을 경영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식당이 모든 사람의 건강을 세워주는 식당이 되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다가 ‘화학조미료를 넣지 말고 건강에 좋은 재료와 신선한 재료만을 사용해서 사람들에게 대접하자. 가난한 사람에게는 본전만 받자.’하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음식 하나하나마다 아주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그 음식점의 음식을 먹으면 맛이 개운하고 시원하니 사람들이 줄을 이어 그 식당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식당이 되었고 대통령상도 받게 되고 대통령께서도 그 식당을 찾아오셨습니다. 또 그 부인은 서울대학교에 초빙되어 특강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도울 때 자기에게 복이 오는 것입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 때도 하나님 앞에서 하면 그 일이 귀한 일이 되고 그는 잘 되어 회사의 기둥이 될 줄로 확신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누구나 위대하게 됩니다. 미켈란젤로와 바흐도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들입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면 잘못 살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제가 일본에 가서 성회를 섬길 때, 전도부장 목사님이 저를 따라 다니면서 비디오로 촬영을 하셨습니다. 심지어 식사할 때도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그것이 자꾸 의식되어 “목사님, 좀 편하게 삽시다.”라고 했더니,

그 목사님이 “목사님은 편하게 사세요. 저는 사진을 찍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배우 노릇을 하고 왔습니다. 나중에 목사님이 그것을 CD에 담아 제게 주셨습니다.

사람이 비디오카메라로 추적해도 잘못 살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항상 보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알면 어찌 잘못 살 수 있겠습니까?

욥기 31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욥은 늘 하나님의 시선을 느꼈습니다. 자기 부인은 할머니가 되었는데 길에 나가보면 예쁜 아가씨들이 걸어다니니 ‘아! 예쁘다. 어찌 저리 예쁜고!’하며 자기도 모르게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의인이었던 욥도 예쁜 처녀를 한참 보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제는 예쁜 처녀를 주목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눈과 서약을 한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에 그런 서약을 한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디발 장군의 부인이 “우리 연애하자. 연애하자.” 하며 날마다 유혹할 때 젊은 청년인 요셉이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9장 9절에 보면, 요셉이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내가 부인과 연애하면 부인의 남편인 보디발 장군에게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인데 어찌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예 부인과 함께 있지도 아니했습니다. 요셉도 유혹에 약한 청년의 몸이지만 하나님의 시선을 느꼈기에 경건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약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살면 의롭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때때로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거짓말도 하고 부끄러운 일도 했습니다. 첩을 두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아브라함을 보시고 답답하셔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나타나시어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언제까지 그렇게 살겠느냐? 이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 때부터 아브라함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 장로(권사, 집사)야, 네가 예수를 믿은 지 몇 십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가끔 그런 일을 하느냐? 이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면 잘못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면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상대방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따라 합시다.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하나님 앞에 사는 바울은 꿈에서도 자기를 위해 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세우기 위해 변명을 하기도 하고 자기 자랑을 하기도 하고 성도들을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영적으로 세워주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주기 위해서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서는 자기 몸을 허비하고 자기 시간을 허비하고 자기 돈을 허비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니 자신이 아닌 성도들을 위해 자신을 쏟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가정에서도 아내는 남편을 위해, 남편은 아내를 위해 희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제쳐 놓으면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이용하며 자신을 위해 살게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살면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은 그는 성경 공부를 시작했는데, 하루는 목사님이 남자들에게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그 숙제는, 아내를 껴안고 “여보, 사랑해요.”라는 말을 꼭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아내를 껴안아 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숙제를 하기 위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 옆에 가서 목사님께서 시키신 대로 아내를 꼭 껴안고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을 사랑하오.” “아니, 어찌 평생 안 하던 행동을 하세요?” “이건 숙제요. 숙제.”

그런데 얼마 후, 그는 정말로 자기를 위해 수고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내의 값진 사랑과 희생을 깨닫지 못한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퇴근하자마자 아내를 꼭 껴안고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이것은 숙제가 아니고 진짜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아내를 이용하는 남편은 성도가 아닙니다. 아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됩니다. 아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면 아내가 잘못해도 아내를 책망할 마음이 없어집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밥을 먹고 나서 제 밥그릇은 항상 개수대에 갖다 놓습니다. 사과를 깎아 먹고 나면 껍질은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아내가 해 준 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어도 아무 말 하지 않습니다.

혹 아내가 알고 “여보, 미안해요.”라고 말해도 “괜찮아요. 돌보다는 밥이 많아요.”하고 지나갑니다. 제가 철이 들지 않았을 때는 아내를 많이 괴롭혔지만 철이 들고부터는 아내를 이해하고 ‘아내를 어떻게 도울까?’하는 생각만 합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을 이용하지 않고 희생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섬기는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아내의 도리입니다.

또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자식을 낳지 않는 부부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기를 낳으면 몸의 스타일이 구겨지고 자식을 기르려면 고생도 되고 돈도 많이 드니, 차라리 그 돈을 모아 놓았다가 노년에 편하게 살려고 자식을 낳지 않는다고 한다는데, 그것은 저주를 손짓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은 저주이지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를 막으셔서 자식을 주지 않으실 때는 낳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주셨는데도 일부러 낳지 않는 것은 저주를 부르는 일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 28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인데, 그 첫째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몸이 재창조되도록 하나님께서 몸을 다스려 주십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 유방암에도 잘 걸리지 않고 피부도 새롭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기를 많이 낳을수록 오히려 아름답고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자라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 더 큰 행복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식을 보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는 것입니다.

괴테가 말했습니다.

“임금이든 백성이든 자기 가정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페스탈로치도 “가정의 단란함이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이요, 자식을 보는 즐거움이 가장 성스러운 행복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람 사는 재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이 잘 자라는 것과 훌륭하게 사는 것을 볼 때, 또 자식이 결혼하여 낳은 손자를 볼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 기쁨을 일억으로 사겠습니까? 천억으로 사겠습니까? 자식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어찌 자식을 낳지 않고 편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사람은 못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삶은 절대로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늘 건강하고 젊게만 사는 줄 압니까? 사람이 늙고 병들면 얼마나 고독해지는지 모릅니다. 부부 둘만 살다가 늙으면 누가 찾아오겠습니까? 죽을 때 누가 찾아오겠습니까? 장례식에 누가 있겠습니까? 장례식에 상주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것이 영광입니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시편 127:4-5)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늙고 병들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리석고 약한 사람이라도 자녀가 떡 받치고 있으면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자녀가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자식보다 더 큰 희망 덩어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희 집에 들르러 오신 어머니께서 어제 아침에 “내가 없으면 우리 교회가 텅 빈 것 같다고 하는데…….”라고 하시면서 예배를 드리러 시골에 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나가시는 교회에 교인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고향으로 가시기 전에 아픈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저희 고향에 아들 하나만 둔 아저씨 한 분이 계십니다. 그 아들이 너무 귀해서 아저씨는 아들을 강가에도 저수지에도 보내지 않으셨답니다. 그래서 물가에 갈 기회가 없었던 아들이 수영을 배우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고 3인 그 아들이 세 친구와 함께 머리를 식히러 강가에 나갔답니다. 수영을 못하는 아이라 물을 보고 겁내니 친구들이 재미삼아 그 아이를 강에 집어넣었답니다.

아이가 놀라서 “나 수영 못해! 나 수영 못해!”하며 기어 나오니 친구들이 또 밀어 넣었답니다. “얘들아, 이러면 안 돼! 나 죽어. 나 수영 못해.”라고 하면서 바위를 붙잡고 나오는데 친구들이 또 밀어 넣어서 아이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답니다.

그 세 친구의 아버지들도 죽은 아이의 아버지와 친구 사이입니다. 아버지들도 친구지간이고 아들들도 친구지간입니다. 경찰서에 잡혀간 아이들이 “장난치다 그랬습니다. 장난치다 그랬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아들을 잃은 아저씨께서 “야 이놈아, 내가 무엇 때문에 일하고 돈을 벌었는데……. 나는 이제 누구를 위해 돈을 벌고 누구를 위해 산단 말이냐?”하시며 통곡을 하셨답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으니 살맛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아들이 서넛 되었으면 아저씨께서 그래도 견디시기가 조금은 낫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흘려들으면 안 됩니다.

젊은 부부들이여, 아이를 많이 낳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중년 부부들과 노년 부부들도 늦둥이를 한 명씩 더 낳으시기 바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바랍니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입니다. 자식이 자라는 것을 볼 때의 기쁨이 한이 없고, 또 손자를 보는 기쁨이 한이 없습니다. 이것은 돈으로 계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아들과 손자를 위해 희생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부모의 삶입니다. 자식도 낳지 않고 자기 몸만 잘 챙기려는 사람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자식을 낳지 않으면 씨가 말라 나라가 망하는데 어찌 자식을 낳지 않는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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