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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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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수인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8-02-03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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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청년
시 119:9-16

한참 전의 일이지만 뉴스위크지 가운데 에이즈에 걸려 찾은 자유라는 글을 실린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쿠바 청년이 자유를 찾기 위해서 스스로 에이즈에 걸렸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에이즈에 걸리기 위해서 스스로 에이즈 요양소에 찾아가 거기에 있는 사람의 피를 수혈 받아 스스로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인 즉은 에이즈 요양소에는 자유가 있다는 것, 하루 세끼 식사를 제공해 준다는 것, 에어콘이 가동된다는 것, 정권도 없다는 것, 경찰도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을 들고 있었습니다.
기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또 소개하고 있다. 그 사람은 후안 카를로스 킨타나라는 21살난 청년의 내용입니다. 그 청년도 역시 에이즈에 걸리기 위해서 일부러 에이즈 요양소에 찾아가 피를 수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 그가 사랑하고 있는 17살 난 여자 친구가 에이즈에 걸려 요양소에 있는데 사랑하는 여인과 떨어지기 싫어서 자신도 에이즈에 걸리면 같은 요양소에 있으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에이즈에 걸린 피를 수혈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육신의 고통을 감안한다고 하는 아름다운 인권 운동가를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운 남녀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웃기지도 않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히려 사랑을 위해서는 아름다운 일처럼 여겨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란? 바로 부모의 마음으로 본다면? 달라집니다. 남에게 구속당하기 싫어서 산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혼자가 좋다고 혼밥, 혼술, 혼결, 정말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오는 것을 못 이겨서 미치도록 슬퍼하는 것보다 내 마음을 강하게 하는 간단한 삶의 지혜를 배우고 강해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나 하나만 바꾸면 쉽지 않냐? 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애가 똥을 싸고 발로 발고 돌아다니는데 그 가운데에 밥을 만ㅅ있게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상황에 어떻게 밥을 먹냐? 고 난 비유가 상해서 못 먹어요. 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환경 탓만이 아니라 내가 비유가 약한 내 깔끔과 내 약함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세균이 있습니까? 그런데 안보이니까 돌아다니지 그래도 건강하니까 죽지 않아요. 그러나 이것도 보이는 것처럼 느끼고 힘들어하면 우주 속으로 들어가야지요. 지구 밖으로.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베려 맨과 나만 위주로 모든 것을 보는 착각 맨 우린 내 속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눈을 뜨면 세상의 겉을 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항구에 살았습니다. 그들은 항상 항구를 드나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윤리적으로 문란하고 종교적을 혼합되어진 생활을 접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점차적으로 그런 환경에 무디어지게 되었고 결국은 자신들도 거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의 혼돈되어진 가치관은 그 가운데 사는 기독교인의 가치관을 철저하게 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신앙관의 흔들림과 가치관의 흔들림은 그들의 삶 자체를 흔들어 놓게 되었습니다. <환경을 이길 만한 구원의 확신이 내적인 영혼을 굳게 하고, 구원의 투구와 의에 흉배와 말씀의 검 등을 준비해야 합니다. 결국 내가 준비되어야 이 세상을 이깁니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다소 풍자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세상에 물들어 가는 기독교를 풍자하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의 내용을 보면 바다 위에 떠 있는 배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데 설상가상으로 배에 구멍이 생겨서 배가 급속도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타락하여 세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데 거기에 내부적 갈등 마져 생겨 급속도로 빠지고 있는 현실을 풍자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만을 그리는 것은 아닙니다. 내 속에 무너져가고 있는 신앙과 윤리를 질타하고 있는 그림이기도 g합니다. <배가 침몰하는 이유는? 배가 건강하거나 물이 밖에 있거나 배 안에 먹을 물로 존재하면 유익하시지만, 배가 파선하거나 밖의 물이 안에 넘쳐 들어오거나 먹을 물은 없다면 사람에겐 위험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것 같고 신앙생활이 바로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에는 썩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을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다. 교회에 앉아 있는 모습은 거룩하지만 그들의 삶은 더럽기 이루 말할 수 없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의인 10명이 없는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는 안타까움이 많은 시대다. 이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그 속에 있는 나는 누구인가? 지금 이 시대는 위기다. 위기의 유혹이 우리와 함께 있다. 위기관리 능력과 위기 대응 능력이 없는 정부는 정부로써 실존해야 하는 의미를 잃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유혹의 환경 속에서 나는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


1. 정결의 필요성

이렇게 유혹받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결을 요구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런 죄악의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런 죄악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거기에 물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정결된 삶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가 얼마나 크게 자라나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정결하게 있느냐가 하나님 편에서는 더 중요한 것이다.

큰 집에는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을 깨끗하게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다. 특별히 지금과 같이 죄악이 만연된 세상에서는 더욱 더 정결이 요구된다. 그래야만 빛으로서, 소금으로서 사명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말로 전할 때가 아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믿지 않는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우리의 정결된 행동이 요구되고 있다. 물질적으로 깨끗한 삶을 요구하고 계신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요구하고 계신다. 육적으로 깨끗한 삶을 요구하고 계신다. 영적으로 깨끗한 삶을 요구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혼과 영과 몸이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하신다. 특히 청년의 때에 정결하게 살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본문에서도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라고 질문을 던진다. 청년의 때는 더 많은 유혹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만큼 죄에 오염될 가능성이 더 많은 시대다. 무력은 피할 수 있어도 유혹을 이기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청년의 때에 더욱 더 정결하게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청년들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깨끗한 청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왜 우리에게 정결이 필요한가? 왜냐하면 한 번 생긴 흠은 일평생 따라 다니면서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의 흐트러짐으로 생겨진 흠집은 회개한 이후라고 할찌라도 항상 껄끄러움으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비유의 글을 썼다. 하루는 왕이 궁내에 있는 모든 동물 중에 꼬리가 있는 것은 다 죽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개구리가 연못 속에 들어가서 울고 있더란다. 하루는 메기가 와서 자기들이야 꼬리가 있으니까 죽을까봐 두렵지만 개구리 너는 꼬리가 없는데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개구리가 하는 말이 내가 예전에 올챙이 적에 꼬리가 있었던 것을 임금님이 알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래서 두려워서 운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이 늘 올무가 되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판 이후에 나중에 나라에 흉년이 들어 음식을 구하러 애굽에 갔다가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났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서 이제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애굽에 내려가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버지 야곱이 죽었다. 그 때 형들의 마음이 어떠했는가? 창 50:15에 보면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그 동안에 같이 살면서 요셉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용서했다. 그러나 죄를 지은 당사자들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죄의 모습이다. 자꾸만 생각나게 해서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젊은 날에 한 번 생겨진 흠은 없어지지 아니하며 신앙생활에 계속 장애적 요소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자신의 영육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결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악의 더러운 것과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개인의 정결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는가? 깨끗한 심령을 소유하라.
정결치 못한 사람의 특징은 내려가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푯대를 정해놓고 올라가는 생활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내려가는 생활을 한다. 마치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다가 배 밑창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이 점차적으로 내려가는 생활을 한다. 흉년을 만난 아브라함이 남방으로 내려간 것과 같이 내려가는 생활을 한다. 아브라함은 내려가서 그 곳의 왕 아비멜렉에게 창피를 당했다. 내려가는 자의 생활은 정결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이삭도 흉년으로 인해 내려가는 생활을 했다.


2. 방해하는 것들

마귀는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계속하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한다. 어떤 때는 힘을 사용하여 강압적으로 방해하기도 한다. 건강을 빼앗아 가고, 직장을 빼앗아 가고, 물질을 빼앗아 가고, 생명을 빼앗아 간다. 반대로 먹이감이 좋아할 좋은 것을 자꾸 주면서 유혹하여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너무 많은 것을 주어서 착각을 일으켜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너무 지나친 건강을 주어서 그것으로 정욕을 위해 사용하게 하고, 너무 많은 물질을 주어서 그것을 사용하느라고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마귀의 공격은 얼마나 지혜스러운지 일반적인 눈을 가지고는 그 방해를 알아차릴 수가 없다. 어떤 때는 마치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인양 착각하게 한다. 요나가 니느웨를 피하여 다시스로 갈 때 순조로이 배를 만났던 것과 순풍이 일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했던 것들이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정결을 방해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요일 2:16에 말씀하기를 인간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때문에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육체를 좇아 일어나는 것들이다. 인간의 욕심이 문제다. 욕심은 죄를 낳게 하고 그 결과는 사망을 가져오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딤전 6:9에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서 떨어지나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정욕은 사람을 파멸로 인도하는 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마치 푸주간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정욕을 따라 간다. 물질로 빚어진 잘못은 갚으면 되고 사과하면 되지만 그릇된 정욕에서 나오는 일들은 갚을 길이 없다. 딤후 2:22에서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하면서 청년들의 경건된 생활을 강하게 명령을 하고 있다.

자랑하는 것 역시 우리로 하여금 경건생활을 방해하게 한다.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기도하면 병자가 낳게 되고, 신비적 체험이 일어나게 되며, 심지어는 죽은 자까지도 살아나게 되는 역사가 있었다. 얼마나 간증할 것이 많으며 얼마나 자랑할 것이 많이 있겠는가? 나는 사도 바울을 볼 때에 그 분이 삼층 천을 보았노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을 가진다. 그는 대단한 신비적 체험을 했다. 천국을 직접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바울인들 어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자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못난 것을 자랑하였고 복음을 자랑하였다.

성취 후의 자만심도 우리의 경건을 방해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것은 감사하지만 거기에 도취되어서 사는 것은 경건을 잃게 하는 요소가 됨을 알아야 한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홍수의 심판을 받는데서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노아가 한 일은 무엇인가? 술 취함으로 누추한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닌가?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다. 믿음이 있노라고, 내 속에 예수가 있노라고 자신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 때문에 넘어지는 일들이 허다하다. 이것은 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서운 적이다.
자신을 위해 쳐 놓은 울타리 또한 우리의 경건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옳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경건을 잃게 한다. “우리”라고 하는 울타리는 타인을 받지 못한다. 요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 때문에 경건을 잃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게 되었다.
가룟유다는 어떤가? 예수님의 태도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열심과 같지 않았다. 그 결과 예수님을 팔아버렸다.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을 앞서갈 때에 그는 이미 경건을 잃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판단이 강단에서 전파되는 말씀을 앞서며 판단하려고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잃게 하는 요소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나사렛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나친 울타리 때문에 결국에는 예수님도 거절하였던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관계 보다는 소유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성이다. 로울 하우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은 관계성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뒤집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계성 속에서 만족하지 않고 소유함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관계는 love person, use things다. 그런데 이것이 바뀌어 지금은 use person, love things가 되었다. 가치관의 혼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관계가 쾌락과 소유로 변모해 버렸다.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은 자져야 속이 시원하게 되었다. 산길을 걸어가다가 예쁜 꽃을 보면 꺾어야 하고, 백화점을 지나다가 좋은 물건을 보면 사야 하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결혼을 해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안되면 한이 싸이게 되고, 한이 싸이니까 한풀이를 하려고 한다. 그러니 목사의 장례식에 한풀이가 등장하게 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일들에서 깨끗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


3. 깨끗해지는 비결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깨끗해지는 비결이 무엇인가? 경건에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하면 된다. 본문에 이르기를 주의 말씀으로 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깨끗하게 될 수가 없다. 주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청년의 힘과 정열을 믿음으로 정화시켜 정결한 삶을 살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더 힘 있게 추진하게 한다. 요셉이 젊은 날을 정결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기도 운동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 둘 중에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된다. 이 두 개는 새의 양 날개와 같다. 배의 양쪽 노와 같다.
영성 회복 말씀과 기도는 영성을 회복시켜 준다. 영성이 회복되어야 정결한 삶을 살 수 있다. 영성 회복은 성령운동이다. 죄악으로 묵은 땅을 일굴 수 있는 비결은 성령 운동이 일어나야만 한다. 메마르고 갈라진 땅을 적실 수 있는 성령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제대로 볼 수 없는 눈이 바로 볼 수 있고, 제대로 들을 수 없던 귀가 바로 들을 수 있는 성령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묵은 땅은 쓸모없는 땅이지만, 길도 없는 땅이지만 그러나 갈고 닦으면 그 동안에 축적되어진 양분 때문에 좋은 곡식을 산출할 수 있다.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옛날에 시골에 사는 어떤 여자가 일평생 한 번도 세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갔는데 산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한 눈에 사랑을 느꼈다. 그 남자는 그 나라의 왕자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하는 말이 세수를 하면 사랑을 수락하겠노라고 했다. 그래서 그 여자가 그 동안에 묵었던 때를 다 닦았다. 그랬더니 뽀얀 속살이 나오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한다. 둘은 사랑을 나누었고 결국에는 결혼을 했다는 얘기다.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이 말은 죄로 더러워진 우리, 한 번도 세수한 적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사랑을 느껴서 모든 죄악을 씻어 버리는 것임을 비유로 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큰 은혜가 된다.
성령 운동은 회개 운동이다. 오순절의 성령 운동 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한 번에 3천명씩, 5천명씩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은 옷을 찟은 것이 아닐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오는 회개를 하였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성령 운동이다. 성령에 의한 회개 운동이다. 성경이 중요해서 성경 교육을 중점으로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그 것이 지식에 머무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령 운동이다.
요즈음은 제자 교육이 인기가 있다. 제자 교육을 하는 교회가 부흥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너무나 많은 독소가 포함되어 있다. 제자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제자를 만들며, 훈련된 그들이 어느 곳에 가서나 사역하는 제자가 아닌 자기 스타일 위주의 아집에 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결정적인 것은 그들에게 영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헌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성경공부일 뿐이다. 영적 비만에 걸려 있다. 머리만 커지는 신앙인이 되어버렸다. 기도 운동 없는 성령 운동은 기형적 신앙을 만든다.

제자훈련으로 성공한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그 한계성을 느끼고 순복음 교회에 찾아가서 성령 운동이 무엇인지 상담을 했다는 말을 듣고 느낀 바가 크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성령의 사역이요, 내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것인데 그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하고 교육만 애쓰고 있으니 어찌 제대로 되었겠는가? 성경을 보면 교회의 부흥은 성령 운동에 있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청년들도 진정으로 깨끗하고 신실한 신앙인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충만을 받고 영성이 회복되기를 축원한다.
● 부활 신앙 성령 운동이 일어나게 되면 부활 신앙이 회복되어진다. 부활 신앙은 우리의 삶을 촉진시켜줄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이론적 신앙이 아닌 살아서 움직이는 신앙은 바로 부활 신앙에서 나온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부활 신앙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부활 신앙이 있어야만 했다. 이론상의 부활 신앙은 뜨거움이 없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부활을 고백하던 마르다의 연약함과도 같은 부활 신앙이다. 그 결과로 낙심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려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에 그들의 신앙은 뜨거워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신앙이다. 이다음에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살아서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활력소가 넘치게 된다.
● 하나님과 동행 부활신앙이 회복되어진 자는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하나님과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동행할 수 없다. 결혼을 해야 한다. 하나님과 결혼을 해야 한다. 사실 나는 청년회 수련회를 오면서 이런 주제가 나오기를 은근히 기다렸다. 그래서 고후 11:2의 말씀을 가지고 중매장이 바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할 기회가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런 주제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지나가야 하겠다. 내가 청년부를 맡았던 시절에 그 부서 안에서 결혼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래서 내 달란트는 교회 내의 청년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에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기도하기를 잊지 않았던 것은 이번 수련회가 마치면 그 동안에 결혼의 문제로 고민했던 사람들의 기도의 응답이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했었다. 수련회가 끝난 다음에 초청장이 많이 날아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에녹은 당대의 의인었다. 그가 의인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므두셀라의 이름은 “창을 든자, 심판”이란 뜻이다. 에녹이 하나님을 동행한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므두셀라가 죽은 직후에 노아의 홍수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이다. 깨끗케 되는 비결은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는 자는 정결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결론을 맺는다.

청년의 때는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의욕도 많다. 힘도 넘친다. 그러나 수많은 유혹도 있다. 이런 때에 어떻게 살 것인가? 영성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부활 신앙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서 하나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엠마오로 향하는 낙심하는 제자들이 아니라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피곤한 몸을 털고 뛰어 올라가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더러워진 돼지와 같이 무분별한 삶을 살지 말기를 바란다. 토한 것을 다시 집어 먹는 개와 같은 생활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깨끗한 삶을 살아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청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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