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 문화선교

초대교회

청년대학부

성령의 사람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수인
댓글 0건 조회 5회 작성일 22-08-22 23:23

본문

말씀:행 4:5-22
제목:성령의 사람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음에도 왜 나는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확신이 없고 자꾸 의심하게 됩니까?”
목회현장에서 저는 이러한 질문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오직 한 가지, “아직 믿을 때에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행19:2)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나서 우리 죄를 회개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결코 완성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씨’일 뿐입니다. 이 씨가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썩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막 4장의 씨 뿌리는 비유 참조). 씨는 싹이 나야 하고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성령은 바로 이 과정을 돕는 분이십니다. ‘성령’을 우리 안에 모셔야 싹이 나고(확신이 생기고) 뿌리가 자라게(예수님을 닮는) 되는 것입니다.

1. 성령의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영접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저주받은 사람이 져야하는 사형 형틀이었지만 성령받은 제자들의 눈에는 구원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4장 12절) 성령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분명히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사람들이 보는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이 사는 것 같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 가 판단하라”(19절) 그들은 사람의 소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세상의 각종 소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그들 생의 의미였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2. 성령의 사람은 증거자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20절)
예수님이 고난 받는 현장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 그는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힘을 가진 핍박자들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령은 그를 보게 했고 듣게 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향해 저주하던 입술로 예수님만이 진실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했습니다.
성령은 그를 증거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증거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입증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시적으로 믿는척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그 씨앗은 썩고맙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자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성령을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말씀:사도행전 3장1절~11절
제목:일으키는 신앙
올해 우리 교회가 설정한 목표는 “일으키는 신앙으로의 성숙”입니다. 어린아이가 탄생된 후 성장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비정상적 상태일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 생명이 우리 안에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탄생된 후에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불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숙해져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늘 일으킴을 받고 도움을 받던 베드로가 이제는 일으키는 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떻게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1. 그는 기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1절) 베드로는 기도에 있어서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제 늘 기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기도는 신앙을 성숙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능력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2.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주목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4절) 베드로는 앉은뱅이 된 자의 현재 처지만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 병이 아무리 중한 것이어도, 그 병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베드로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3. 그는 예수 이름의 능력을 확신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6절)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이 그저 장식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이름은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는 능력의 이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일으키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수정 가족 여러분들도 기도에 전념하고 하나님만을 주목하며 예수 이름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쓰러져 가는 다른 영혼들을 일으키시는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말씀:마 17장14절~20절, 요 1:12
제목:영접하는 자의 권세
오늘 본문에 보면 귀신들려 앓고 있는 아들은 전혀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아이였는데 예수님께 데려와서 고침을 받고 새 소망을 갖게 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지배하에 살면서 회개하지 않고 예수믿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잘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사탄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엡 2∶2).

1. 난처한 사정
예수께서 육신을 치료하신 것은 영적 치유의 상징이며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죽었던 영혼을 살려 구원하시는 예표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기 나온 이 소년은 사탄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고난당하는 귀신의 희생물이 된 사람의 한 예표입니다.
⑴ 큰 근심에 쌓여 있었습니다.
⑵ 불에도 물에도 넘어집니다.
⑶ 귀머거리였습니다.
⑷ 벙어리였습니다.
⑸ 탄식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귀신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은 불안과 회의와 의심 속에서 자신을 못 가누고 방황하고 있는 영혼입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 32∶4).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새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2. 단 하나의 방법
예수님께서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와야만이 문제 해결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마귀를 이기신 예수님만이 절망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고 자유와 평화를 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영적 능력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는 자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아 멘-
말씀:행 9장1절~9절
제목:사울과 바울
기독교 역사는 바울이라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서술이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바울은 기독교 전파에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사람의 과거는 바울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반기독교적 인물이었고 교회 박해에 전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1. 사울의 삶
“사울”이라는 이름은 ‘큰 자’입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고 학문도 깊었고 종교적으로도 의롭다고 여길만큼 세상에서 큰 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를 막을 자는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를 믿는 이들은 참으로 가소로운 자들처럼 보였습니다. 세상적인 권력은 고사하고 무식하고 천한 사람들이 전하는 예수란 한갓 민중을 현혹시키는 어리석고 사악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2. 사울은 큰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난 짐승처럼 예수 믿는 작은 자를 잡아 죽이러 죽음의 권세를 지니고 다메섹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도중에 땅 바닥에 나동그라진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그는 살아계신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셨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참된 진리가 무엇임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것은 또한 사울 자신이 큰 죄인임을  드러나게 했습니다. 빛이 임하시니 자신의 어둠이 얼마나 컸던 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사울이라 자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자신이 참으로 작은 자, 곧 바울이요요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5절)
이 음성은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를 향해 들려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허위는 벗겨지고 참된 모습을 보게될 것입니다.
말씀:눅 16:19-31
제목:기회는 지나갑니다
 누가복음 16장은 두 가지 종류의 예수님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와  ‘부자와 나사로’라는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모두 주님을 믿지 않고 불의한 재물에만 관심두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구원받을 기회”에 대해 큰 영적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1. 누구나 다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그의 불성실함 때문에 주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 친구 사귀기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야 쫒겨난 이후 그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죄인이라할지라도 예수님을 친구로 맞이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자를 변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16:9)

2. 그 기회는 지나갑니다.
불의한 자가 구원의 기회를 저버리면 그에게는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14절). 노아 때도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비웃었습니다. 지금도 삶들은 주님의 복음을 비웃습니다. 친구를 사귀지 못한 불의한 자는 마침내 음부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23절). 노아의 방주도 때가 되매 닫히고 말았습니다(창 7:16). 복음을 비웃는 자들도 마침내 멸망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벧후 3:10). 음부에 떨어진 불의한 자를 보십시오. 그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천대하던 거지에게 물 한방울 바라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기회는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로소 기회를 놓친 것을 깨닫고 세상에 있는 형제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전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이미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받아 들이는 자는 구원 받을 것이요 비웃는 자는 영원한 멸망에 이를 것입니다.   
말씀:요 6:41-51
제목: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

요한복음 6장은 주님께서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산 떡은 육신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스스로를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 했습니다. 그들은 “그 부모를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으니 믿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를 안다, 예수님의 가정환경을 안다 하는 등의 지식으로는 결코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혈육적 관점에서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생명도 기적도 능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2. 하나님께서 이끄신 자라야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절) 하나님께서 이끄는 자는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자입니다. 즉 영적으로라야 예수님이 누구인줄 알게된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영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압니다. 우리는 그 떡에 굶주려 있는 자임을 알게 됩니다.

3. 그 떡을 먹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51) 떡은 바라만 보아서는 소용없습니다. 떡은 먹어야 우리의 양식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떡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떡을 직접 먹고 소화 시켜야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실제적인 능력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깨달았다면 우리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그리스도되심과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근원임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룻  4:6-22
제목:기업 무를 자

룻기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보아스의 기업 무르는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큰  구원에 대해 실감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는 기업이 분배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결국 그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을 향한 여정은 여호수아에 이르러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셨고 마침내 그 땅은 12지파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땅에서 대대손손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그러나 분배된 기업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그들 앞에 두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된 땅에서 넘치는 축복을 누리며 살 것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 땅에서 쫒겨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네 대적 앞에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한 길로 그들을 치러 나가서는 그들의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신 28:25) 우리는 처음 인간 아담에게서 이런 일을 이미 보았고 나오미의 가족 역시 모압 땅의 풍요를 쫒아 나갔다가 그들의 기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기업 무를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상실된 기업은 기업무를 제도에 의하여 회복될 수 있습니다. 가까운 친족 중 누군가가 그것을 대신 사면 됩니다. 여기에는 물론 희생이 따릅니다. 다시 찾은 기업은 상속자가 있는 한 그에게 양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룻의 경우에는 룻을 아내로  맞이해서 그 자식에게 기업을 양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기꺼이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물론 그 기업도 물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잃어버린 기업을 무르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 죄로 인해 사단의 세력에게 빼앗긴 천국의 기업을 자신의 피로 사서 우리에게 되찾아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4).
말씀:마 21:10-21
제목:종려나무를 흔든 사람들

 이번 주는 종려주일입니다. 이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야자수)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21:9)라고 환호했던 때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때 예수님을 이처럼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해 예수님을 따를 듯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나중은 이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약 닷새 후에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들의 두 손은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공중을 휘젖고 예수님을 찬양하던 그들의 입에서는 예수님의 피를 요구하며 소리치고 저주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이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는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 영접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고백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이 고백은 참으로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와같은 고백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요1:12, 5:24).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했습니다(고전 12:1)
가이샤라 빌립보라는 지방에서 베드로가 이와같은 고백을 한 후에 받은 축복을 보십시요(마16:18-19) 음부의 권세를 꺾으며 천국열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이와같이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소홀히 여기면 망하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는 백성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가진 자에게 능력을 베푸십니다. 별 죄지은 것도 없는데 에서는 자손 대대로 망했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우습게 보았습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에서가 율법을 야곱보다 더 잘 지켰습니다. 야곱은 거짓말장이입니다. 그렇지요. 에서가 거짓말을 했습니까? 왜 멀쩡한데 망합니까? 언약을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 이름은 우리의 언약의 보증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합니다. 군중들은 이 언약을 과소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축복의 언약을 받았지만 그 가치를 알지못해 마침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째, 틈을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눅11:24-26에는 예수님께서 영접한 자가 취해야할 삶의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그동안 자신이 괴롭히던 사람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물없는 곳에 가 쉬려했지만 돌아다니다가 쉴 곳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귀신이 다시 옛집에 가보았을 때 그집은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을 뿐 비어 있었습니다. 이에 그 귀신은 다른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하게 되었고 그 사람은 처음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이제 사단의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깨끗하게 되었고 수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비워두면 안됩니다. 빈 공간을 속히 성령께서 임하도록해야 합니다. 5일만에 군중들의 마음은 사단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일순간에 사단의 종이 되어 예수님이 가실 길을 막았습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기회를 주면 안됩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7) 사울왕은 성령충만하여 예언자의 반열에 들기까지 했으나 마귀에게 틈을 주어 마침내 악령에 시달리는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삼상18:10)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자녀를 노립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시험합니다. 시험에 넘어가 죄를 범할 때 그 자리는 자신들이 다시 거할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이 일을 깊이 체험하고 이렇게 우리에게 경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 2:20) 우리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 사단의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한결같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이라 부르며,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이 자리에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못박는 군중 속에 있습니까? 
약속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자신을 돌아보아 틈이없도록 하십시오.            아멘.
말씀:마 16:13-20
제목: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가 어느 곳에 나셨으며 그가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며 또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 같은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한탄하시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우쳐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1.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 란 뜻입니다. 메시야는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의 문제 이면에는 악한 영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범하는 죄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삶은 악한 영의 권세 하에 사는 삶이요 하나님과 원수된 삶이기에 우리는 저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질병과 불화, 실패의 삶이 유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는 자신의 고귀한 피를 한방울도 아낌없이 흘리신 것입니다.“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임이라 하니라”(요 1:21)

2.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신앙고백에서 머물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그분이 여전히 살아계신 분이심을 인정하고 우리 삶 가운데서 만나는 사건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건은 2,000년전의 공로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오늘 여기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 가운데 살아계셔서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거하십니다. 따라서 그분을 믿는 자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
말씀:삼하 6:1-12
제목:법궤 주위에서 일어난 일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함께하셨습니다. 성막 중에서도 지성소 곧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2) 법궤는 가로 125㎝ 세로 75㎝ 높이 75㎝ 정도의 크기인데 조각목으로 만든 다음 정금으로 둘러쌌고 그 위에는 속죄소가, 그 위에는 두 그룹을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 블레셋에게 빼앗긴 법궤 반환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잘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다윗이 왕이되자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법궤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반환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법궤를 실을 새 수레를 제작하고 3만명이나 되는 인원을 동원하여 찬미 속에 운반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 중에 수레를 끌던 소가 날뛰는 바람에 웃사라는 사람이 법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손을 댔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법궤에 손을 8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범죄 중의 범죄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법궤 호송 중에 일어난 불상사는 법궤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진 법궤는 3개월동안 있으면서 엄청난 축복을 가져왔습니다.“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11절) 법궤가 가는 곳은 승리가 따랐습니다. 법궤를 앞세우니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앞세우면 큰 복과 승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자녀는 아버지 앞에서 거리낌을 갖지 않습니다.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고 기뻐합니다. 오벧에돔의 처소에서 다시금 법궤를 운반한 다윗왕은 너무도 기뻐 어린아이와 같이 좋아했습니다. 이 장면을 본 다윗의 처 미갈은 점잖치 못한 행동이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불임이라는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그는 얼마든지 자식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말씀:눅 10:17~24
제목:권세를 누리는 신앙인

  ‘권세’라는 말은 ‘능력’과는 다릅니다. 능력은 내 자신이 소유한 힘이지만 ‘권세’는 내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지닌 힘을 입어 누리는 권리와 같은 것입니다. 즉, 대통령의 권세를 가진 사람은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이란 직분에 부여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엄청난 권세를 소유했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더 이상 저주의 자녀가 아닙니다. 원래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에는 절대로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단의 자녀였지만(요1서3:8)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서 모든 마귀의 권세는 끝장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하며 복을 누릴 권세입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6-7) 아들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아들입니다. 아들된 자는 상속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금생과 내생에 누릴 말할 수 없는 큰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축복을 당연히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3. 예수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희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요 14:2) 원수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들을 대적하여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그런데 왜 능력도 권세도 약할까요? 마귀의 웃음거리가 되어 옷을 벗고 뛰어나가는 사람. 홍해바다를 시험하며 지나가는 에굽 군사들..

0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0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고전 10: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히 11: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 하였도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 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자기의 믿음에 맡게 행하길 원합니다. 이방인이나 믿음이 없는 자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동일하게 흉내 내다가는 마귀의 놀림감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구하길..
말씀:행 2:37-41
제목:성령이여 강림하사
앞으로 4주 후면 교회 절기상 성령강림절에 해당되는 시기가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날, 즉 ‘오순절’이라는 유대 절기 때 일어난 ‘성령강림’의 사건은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성령강림이 있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고 권능을 받아 담대하게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우리는 믿을 수 없고 봉사할 수 없으며 증거 할 수 없습니다. ‘성령강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필수불가결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강림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기본조건과 세 가지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1. 기본조건: 회개(예수 영접)
본문 38절은 성령 받을 자의 기본 조건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말해 줍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회개’는 삶의 반성과 더불어 새로운 삶의 결단입니다. 이전에 살아오던 삶이 얼마나 죄악된 것이었던가를 고백하고 이제는 더 이상 이전처럼 살지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이 결심의 핵심은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께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예수께 나아오는 사람만이 죄사함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다시는 예전의 삶을 살지않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 곧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들일 기본적인 준비가 된 것입니다.   

2. 준비
첫째, 성령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방문했을 때 그곳의 어떤 제자를 만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에 그들은 한결같이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느니라.”(행19:2)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도 성령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성령강림’은 반드시 연속적이지 않습니다. 먼저 성령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사44: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성령받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성령은 자기를 찾고 환영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셋째,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1:14, 2:4)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행4:31)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성령을 받는지라”(행8:14-17) 홀로하는 기도, 함께하는 기도, 사역자의 중보기도 등 형태는 어찌되었던 간에 기도하는 곳에 성령은 강림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조차 어렵습니다. 회개합시다.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며 그분을 간구합시다.
말씀:롬 8:12-17
제목: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향해 진노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며 ‘양자’로 확증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로마 시대의 ‘양자’ 입적에 따른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잘 보여줍니다.
1. 파트리아 포테스타스(patria potestas)의 변경입니다.
‘파트리아 포테스타스’는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절대 권한을 의미합니다. 로마 시대에는 자녀에 대한 모든 권한을 아버지가 가졌습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 지배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양자 입적은 바로 이 ‘파트리아 포테스타스’를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를 지배하던 것이 무엇이던 간에 그 지배에서 떠나 하나님에게 우리를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입니다. 옛 생활은 이제 우리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고 하나님만이 절대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2. 입양된 사람의 과거는 완전히 말소됩니다.
입양절차에는 ‘만키파치오’(mancipatio)라는 상징적 매매행위가 뒤따랐습니다. 구리와 거울을 이용한 것으로 입양을 원하는 사람은 아이의 아버지에게서 세 번 다시 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입양관계가 ‘값을 치른’ 행위임을 명백히 했습니다. 이 값을 치른 행위는 이전의 ‘파트리아 포테스타스’ 아래서 자란 사람의 과거가 값을 치르는 행위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예컨대 법적으로 그의 모든 부채는 취소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만키파치오’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사서(고전6:20) 우리의 죄악된 과거를 완전히 소멸시키셨습니다.
 
3. 입양된 사람은 상속권이 있습니다.
입양된 양자는 새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주어집니다. 비록 그 새아버지에게서 친자가 태어난다 할지라도 그 권리는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전한 아들로서의 모든 권한을 누리며 살아가게 보장되는 것입니다. 이 권리를 새아버지쪽에서 보증하기 위해 확고한 법적 절차를 거치는데 이 법적절차가 ‘빈디카치오’(vindicatio)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곱 증인이 입회되고 지방장관에게 가서 공적인 확인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우리의 양자됨은 성령께서 친히 보증하십니다(16절).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이며 또한 그 분의 상속자가 되심을 친히 보증하십니다.
우리는 원래 죄의 종이었더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흘리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요함의 상속자가 되었고 성령이 친히 확증하십니다. 
말씀:행 4:5-22
제목:성령의 사람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음에도 왜 나는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확신이 없고 자꾸 의심하게 됩니까?”
목회현장에서 저는 이러한 질문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오직 한 가지, “아직 믿을 때에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행19:2)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나서 우리 죄를 회개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결코 완성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씨’일 뿐입니다. 이 씨가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썩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막 4장의 씨 뿌리는 비유 참조). 씨는 싹이 나야 하고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성령은 바로 이 과정을 돕는 분이십니다. ‘성령’을 우리 안에 모셔야 싹이 나고(확신이 생기고) 뿌리가 자라게(예수님을 닮는) 되는 것입니다.

1. 성령의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영접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저주받은 사람이 져야하는 사형 형틀이었지만 성령 받은 제자들의 눈에는 구원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4장 12절) 성령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분명히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사람들이 보는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이 사는 것 같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 가 판단하라”(19절) 그들은 사람의 소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세상의 각종 소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그들 생의 의미였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2. 성령의 사람은 증거자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20절)
예수님이 고난 받는 현장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 그는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힘을 가진 핍박 자들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령은 그를 보게 했고 듣게 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향해 저주하던 입술로 예수님만이 진실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 했습니다.
성령은 그를 증거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증거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입증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시적으로 믿는 척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그 씨앗은 썩고 맙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자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성령을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말씀:엡 5:15-18
제목: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근심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자기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고 기도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세례 혹은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즉, 이때까지 우리를 지배하던 사단의 권세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영이 다시금 우리안에 돌아오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세례를 받은 다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여전히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성령에 의해 주관하도록 하는가하면 여전히 옛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前者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경우이지만 後者의 경우에는 성령을 근심케하는 경우입니다.

1.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이미 영접한 성령께 자신의 모든 것을 위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께 자신의 마음과몸을 온전히 위탁합니다.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말하고 살아갑니다. 언제나 성령의 인도함을 구하고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아멘’으로 순종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판단이 옳은 것으로 여겨지고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일이 이해되지 않을 때에도 순종합니다. 그가 이렇게 사는 동안 어느덧 성령의 열매는 풍성히 맺어지게 됩니다.

2. 성령을 근심케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인격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를 근심케할 때 깊은 근심속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말라”(30절)성령을 근심케하는 사람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 잠시간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 취급을 받습니다. 성령은 어디까지나 그의 삶의 이방인이지 그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성령은 다만 그 사람 속에 머물고만 있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대개 두 가지 방향에서 일어납니다.

첫째, 죄에 여전히 머무는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입고도 그 죄를 떨치지 못하고 다시금 그 죄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때 성령은 탄식합니다.

둘째, 성령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성령을 마치 하인 취급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성령을 속이고(행 5장), 욕되게 하며(히10:29), 적대합니다(마12:31-32).
성령을 근심케하는 자는 다시는 회개케 되지않고 멸망하게 됩니다(히6:4-6, 마12:32)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부르심 받은 성도 여러분, 회개하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여러분, 성령을 근심케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맙시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축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말씀:출 19:1-6, 행 2:1-4
제목:제2의 시내산 언약체결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50일째 되는 날로써 유대인이 오순절(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로 지키는 때에 성령이 120명의 제자들에게 충만하게 임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단순히 기념하는 차원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이 날의 의미는 기념의 차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엄청난 비밀과 약속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29)

1. 이 날은 시내산 언약의 실체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광야의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언약을 말합니다. 유월절의 은혜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6) 하나님은 이것을 보증하기 위해 친히 강림하셨습니다. 연기가 자욱한 불 가운데, 진동과 나팔소리 속에 하나님은 강림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체결한 날이 오순절임을 유의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오순절 때에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삼기위한 언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즉, 성령강림절은 새로운 언약체결의 현장입니다. 시내 산에서 체결된 언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새롭고 완전한 언약이 체결되고 그 언약 백성이 되고자하는 자에게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신 것입니다.

2. 여러분은 언약백성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새로운 언약’은 무엇입니까? 렘31:31-34에는 새언약의 성격을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시내산의 언약은 불완전 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자입니다. 그것은 새 것이 올때까지만 의미가 있습니다. 새언약이 올때는 이미 그것은사라지게 됩니다.(히8:13) 예레미야에게 예언된 새언약은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첫째, 마음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종이나 돌에 새겨질 것 아니라 마음에 담아 두게 될 것이빈다.
둘째, 제한없는 사랑입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누구나 어떠한 죄인이라도, 그의 언약 백성으로 받아들입니다.
셋째, 친히 하나님이 되십니다.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결국 새언약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모든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는 이같은 언약의 보증입니다. 베드로의 증언을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성령강림) 너희 가운데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행2:22)
새언약은 우리 앞에 있습니다. 누구나 그 언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심령에 두십시오 그리하면 성령께서 이 사실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 아 멘 - 
말씀:히 9:1-11
제목:금으로 싼 언약궤
  하나님의 성막 안에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이 지성소 내부에는 ‘언약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언약궤는 ‘증거궤’ ‘법궤’ 혹은 ‘하나님의 궤’ 등으로 불리웠는데 이것은 금으로 싸여 있습니다.
이 궤 속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한 오멜,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1. ‘언약궤’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언약궤는 말 그대로 ‘언약’을 증거하는 궤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언약 가진 백성과 만나 행할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거기서 내가 만나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즉,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가진 사람에게 함께 하겠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만날래야 하나님을 만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우리 인생은 살 수 있는데 언약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가진 사람은 복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돌아보셨고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새언약’이 있습니다. 이 언약은 언약의 실체입니다. 더욱이 이 언약은 육정이나 혈육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 그는 언약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십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라”(마1:23, 사7:14)

2. 언약궤 안에는 언약 백성에게 주어질 약속이 있습니다.
첫째, 하늘의 법이 주어집니다. 이 법은 세상의 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법을 따라 살면 생명이 있고 엄청난 축복이 있습니다. ‘십계명’의 돌판이 그것입니다. 세상의 법은 인간의 부패한 양심이나 경험 등에 기초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이 친히 주신 완전하고도 불변의 법칙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9ㅣ1편) 더욱이 우리에게 주신 새언약에는 이 율법이 심령판에 새겨지게 됩니다.
둘째, 하늘의 양식이 주어집니다. 언약궤 안에 든 만나는 하늘의 양식입니다. 이스라엘은 양식을 전혀 구할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40년을 이 양식으로 생활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언약백성들에게 하늘의 양식으로 먹이셨습니다. 언약의 백성들이 사는 것은 이 땅의 빵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늘의 떡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새언약의 백성에게는 더욱 귀한 하늘의 양식이 주어집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십니다.“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요6:35)
셋째, 하늘의 생명이 주어집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죽은 지팡이에서 ‘살구열매’나 난 사건(민17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생명없던 지팡이에 살구열매가 열린 것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이처럼 새언약 백성에게는 부활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소유한 자 그는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아멘―

말씀:출 8:25-29
제목:사단의 전술전략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단’은 실재하지 않는 존재라고 합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사단’의 세력에 대해 말하면 ‘무식한’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고상하게 하지 왜 그렇게 요란스럽게 믿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실재합니다. 그는 막강한 힘을 소유하고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우리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특히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같은 일을 막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와 영적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의 전술과 전략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단의 대리자인 애굽의 바로왕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잘보여주고 있습니다.

1.처음에는 맞섭니다.(7:11)
사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압니다. 또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에게 이길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그가 가진 권세와 힘으로 위협합니다. 모세의 경우에도 그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자 바로는 많은 박사와 박수를 불러 기를 꺾고자 했습니다. 그는 때때로 환경을 통해, 사람을 통해 믿는 자의 삶이 별 것 아님을 보이려 합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마치 존재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만이 최고인양 주장합니다. 믿음의 뿌리가 없는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좌절하고 맙니다.

2.‘이 땅에서’ 예배하라고 합니다.(8:25)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에게 사단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상대를 위협해 본 후 여의치 않다고 판단될 경우 전략을 수정합니다. 회유입니다. 그럴듯한 말로 자신의 통치하에 여전히 붙들어 두려고 합니다. 모세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예배’는 인정할테니까 애굽에서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예배는 얼마든지 드려도 좋지만 내 품을 떠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드릴 예배가 사단이 제공한 자리에서 드려질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요4:24)

3.‘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합니다.(8:28)
이 말은 사단이 즐겨하는 가장 일반적인 전술이며 잘 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너희 말대로 ‘광야에서’ 예배드려도 좋다 그러나 너무 유별나게는 하지 말라! 예수도 고상하게 믿지 왜 그렇게 요란하냐 적당히 해라 하는 식의 유혹에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넘어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의 처소는 애굽과 가깝지 않습니다. 그것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4‘무엇인가를 두고’ 가라고 합니다.(10:8-11,10:24)
애굽에서 멀리떠나 예배를 드려도 좋으나 무엇인가를 두고 가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자녀들을, 두 번째는 양과 소를 두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붙잡는 한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지니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떠나 광야에서 모든 속한자와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궤계를 깨뜨리고 승리를 쟁취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말씀:창 18:9-15
제목:전능자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는 ‘전능하심’입니다. ‘全能’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자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실제 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자연법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법의 특성은 ‘실상’을 먼저 봅니다. 현실을 바라보며 판단을 내립니다. 소위‘과학주의’의 영향은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을 가장 중요한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이 기준대로라면 사라의 ‘비웃음’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아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너무 늙어서 출산하기에는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11-13절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라의 ‘실상’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불가능 했습니다. 그런 사라에게 아이가 생긴다니 기가막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땅의 법으로 하늘의 법을 재고 땅의 일로 하늘의 일을 바라보니 비웃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적을 비웃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의 품성을 향해 사도 바울은“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고전 2:14) 라고 오히려 비웃고 있습니다.

2. 믿음은 ‘소망의 실상’을 바라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은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시선을 ‘실상’에 두지 않고 실상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바라봅니다. 현실은 우리의 기대 수준과 맞지않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이미 아이출산이 불가능한 나이일 수 있습니다. 민수기 13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그토록 원했던 가나안 땅이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39에 기록된 바와 같이, 나사로의 생명이 끊어져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나는 시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 실상에 매이지 않습니다. 실상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현실은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산같이 보여도 우리의 믿음은 능치못할 것이 없는 여호와의 손길을 바라보고 의뢰함으로써 실상을 바꾸어버립니다. 하나님은 믿고 의뢰하는 자에게 자신이 하나님됨을 알리길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아 멘―
말씀:출 16:4-5
제목:하늘백성을 향한 시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매매계약을 할 때, 그 계약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이 발생할 때 그 계약은 파기되고 계약 파기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벌금을 상대방에게 지불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의 계약백성인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약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이 일은 참으로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련하신 피의 계약서에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계약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겠다고 마음의 낙인만 찍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약은 파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가 계약백성의 삶-율법을 완성하는 삶-이 아닐 때에는 즉시 그 계약은 파기되고 우리는 갑절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넘어지고 깨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하였고 그로 인해 이방에 포로로 끌려가는 심판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러나 하나님은 길을 주셨습니다.

1.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휴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을 관통하고 있는 복음입니다. 안식일은 십계명을 준수하고 율법을 완성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근원이 됨을 깊이 자각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날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에게 하늘의 양식을 공급하십니다. 우리는 이 양식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안식일이 하늘 양식인 ‘만나’와 결부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삶의 원천이 무엇임을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총회신학교
CCS
쥬빌리 통일구국기도회
대한민국전자정부
행복발전소
Prayer
대한성서공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