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설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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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복음의 릴레이가 시작됩니다(요1:35-42) (391장)
오늘의 말씀 요약: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들은 그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좇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가서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시몬에서 게바라 고쳐 주십니다.
게바라 하리라(42절) 새 이름을 주신 것은 새사람이 되고 새로운 사명을 주심을 의미한다.
두 제자를 보내는 세례 요한 (1:35-39)
본문에서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특성이 다시 한 번 부각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제자가 다른 지도자에게 가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기보다 큰 분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냅니다. 한 사람은 안드레였고, 또 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으면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소개하는 요한복음의 기록자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했고, 또 다른 한 제자는 요한복음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이 두 제자를 움켜쥐고 예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요한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람’이라는 칭찬은 이 일에도 적절한 것 같습니다(눅 7:28).
시작되는 그리스도 증거의 고리 (1:40-42)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을 소개받은 안드레는 바로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았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의 형 시몬에게 이 귀중한 발견을 전하고 그를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초대 교회의 핵심 지도자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게바”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십니다. 게바는 ‘바위’ 또는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이름의 뜻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베드로”(페트로스)입니다. 메시아는 이처럼 계속 이어지는 증거의 고리를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또한 ‘랍비, 메시아, 게바’ 등의 아람어와 히브리어가 계속 헬라어로 번역되어 표현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이는 본서의 주 독자가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히브리권에서 헬라권으로 번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희생의 믿음
장애가 있는 사람을 상점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5킬로미터 정도를 운행하거나, 고통을 겪는 부부를 야외로 데리고 나가 식사하기 위해 한가한 주일 오후를 희생하는 것 같은 사소한 일들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희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당신의 기쁨을 방해할 수도 있고 믿음을 깊게 할 수도 있다. 만약 자기 포기와 희생정신을 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회나 상실감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다. 존 칼빈은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무거운 짐, 아니 ‘죽음과 연관된’ 짐처럼 여겨졌던 진리들이, 실상은 우리의 구원과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는 결코 ‘평범한 위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동참하도록 초청받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기 때문에 그 신앙 안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제일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할 때까지 그리고 우선순위를 올바로 설정할 때까지,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가끔 하나님께 괴로움을 느끼거나 나아가 기독교 신앙에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희생하는 마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우리가 여기 있다는 마음 자세만 가진다면, 다른 모든 것은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상 주시는 믿음」/ 게리 토마스
한절묵상: 요1:38 “무엇을 구하느냐?” 이 질문은 주님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교회를 다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떡을 위해 예수님을 찾다가 나중에는 전부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좇는 사람은 결국 떠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예수를 좇고 있는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의 사심(私心)을 넘어서는 큰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혹시 내 속이 좁아 대의(大義)를 놓치는 경우는 없습니까? 이 증거의 고리를 이어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나는 이 증거의 바통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두 제자를 돌아보시면서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라고 물어 셨습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고전 1:22절 이하의 말씀에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의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자 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느냐?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유대인들은 정말 기적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에 따르면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반드시 기적이 있어야 하고 기적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실 때는 두 가지 기적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하나는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이었고 하나는 모세의 손에 문둥병이 발했다가 깨끗하게 낫는 기적이었습니다. 그 모세는 애굽에 가서도 하나님 살아계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내리게 한 사실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걸어갈 때도 순간순간 하나님의 기적을 보면서 걸어갔습니다. 저들은 늘 기적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생수, 만나, 메추라기, 단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을 추구하는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엔 반드시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뒤따라 다녔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고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고 풍랑이 잔잔해 지고 문둥병이 주님을 통해서 회복되는 엄청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정말 기적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너희가 무었을 찾느냐?"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굉장히 좋아 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지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기적을 찾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장애물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나무위에 달린 자는 저주 받은 자라고 하였는데 십자가에 죽은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인류의 메시아가 될 수 있습니까?
유대 사람들의 율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가 없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왜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일까요? 헬라의 철학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세계는 악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는 선하다고 생각 했습니다. 우리 몸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선하고 육신은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혼은 육신의 감옥에 갇혀서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신을 괴롭히며 죽여야 영혼이 육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영의 세계를 동경하고 찾아 간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보이는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올 수 가 있겠습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더럽고 죄 많은 육신을 뒤집어 쓸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 있습니까?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에겐 실로 어리석은 이야기였습니다. " 유대인들은 표적(기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 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자 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렇습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인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또한 그것은 헬라의 모든 지혜를 뛰어넘는 구속의 지혜였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유대인중의 유대인입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였으며 사울왕가의 후손이었으며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율법적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은 랍비였습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는 어릴 적부터 전통적으로 헬라철학을 공부하면서 자라온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기적도 지혜도 마다하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 너희가 무었을 찾느냐?" 사도 바울은 그 예수그리스도가 너무 너무 귀했습니다. 너무 너무 좋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섬기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인생을 걸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주님만을 따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그리스도만을 따르겠다고 외쳤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찾았는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찾습니까? 돈과 인기와 권력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추구하면 할수록 저들 가슴속에 공허한 여백을 메꿀 수 없어 갈증과 공허를 안고 지치고 쓰러져 갑니다.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시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현대인들은 가슴에 공허한 여백을 메우고자 저마다 샘을 팝니다. 그러나 그샘이 어쩌다가 돈의 샘이 됩니다. 권력의 샘이 됩니다. 인기의 샘이 됩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려 하나 가지면 가질수록 참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그 물을 마셔 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돈과 인기와 권력은 참된 만족과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없는 터진 웅덩이라고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 너희가 무었을 찾느냐?" 여러분은 유대인들처럼 기적을 추구할 것입니까? 헬라인들처럼 지혜를 추구 할 것입니까? 현대인들처럼 돈과 인기와 권력을 추구할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나도 인간인지라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싶습니다. 지혜를 추구하며 고상하게 살고 싶습니다. 많은 물질을 소유해서 큰소리치며 살고도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기를 받고도 싶습니다. 권력을 휘두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요약: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들은 그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좇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가서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시몬에서 게바라 고쳐 주십니다.
게바라 하리라(42절) 새 이름을 주신 것은 새사람이 되고 새로운 사명을 주심을 의미한다.
두 제자를 보내는 세례 요한 (1:35-39)
본문에서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특성이 다시 한 번 부각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제자가 다른 지도자에게 가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기보다 큰 분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냅니다. 한 사람은 안드레였고, 또 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으면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소개하는 요한복음의 기록자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했고, 또 다른 한 제자는 요한복음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이 두 제자를 움켜쥐고 예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요한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람’이라는 칭찬은 이 일에도 적절한 것 같습니다(눅 7:28).
시작되는 그리스도 증거의 고리 (1:40-42)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을 소개받은 안드레는 바로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았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의 형 시몬에게 이 귀중한 발견을 전하고 그를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초대 교회의 핵심 지도자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게바”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십니다. 게바는 ‘바위’ 또는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이름의 뜻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베드로”(페트로스)입니다. 메시아는 이처럼 계속 이어지는 증거의 고리를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또한 ‘랍비, 메시아, 게바’ 등의 아람어와 히브리어가 계속 헬라어로 번역되어 표현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이는 본서의 주 독자가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히브리권에서 헬라권으로 번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희생의 믿음
장애가 있는 사람을 상점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5킬로미터 정도를 운행하거나, 고통을 겪는 부부를 야외로 데리고 나가 식사하기 위해 한가한 주일 오후를 희생하는 것 같은 사소한 일들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희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당신의 기쁨을 방해할 수도 있고 믿음을 깊게 할 수도 있다. 만약 자기 포기와 희생정신을 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회나 상실감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다. 존 칼빈은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무거운 짐, 아니 ‘죽음과 연관된’ 짐처럼 여겨졌던 진리들이, 실상은 우리의 구원과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는 결코 ‘평범한 위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동참하도록 초청받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기 때문에 그 신앙 안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제일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할 때까지 그리고 우선순위를 올바로 설정할 때까지,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가끔 하나님께 괴로움을 느끼거나 나아가 기독교 신앙에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희생하는 마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우리가 여기 있다는 마음 자세만 가진다면, 다른 모든 것은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상 주시는 믿음」/ 게리 토마스
한절묵상: 요1:38 “무엇을 구하느냐?” 이 질문은 주님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교회를 다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떡을 위해 예수님을 찾다가 나중에는 전부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좇는 사람은 결국 떠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예수를 좇고 있는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의 사심(私心)을 넘어서는 큰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혹시 내 속이 좁아 대의(大義)를 놓치는 경우는 없습니까? 이 증거의 고리를 이어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나는 이 증거의 바통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두 제자를 돌아보시면서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라고 물어 셨습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고전 1:22절 이하의 말씀에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의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자 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느냐?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유대인들은 정말 기적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에 따르면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반드시 기적이 있어야 하고 기적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실 때는 두 가지 기적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하나는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이었고 하나는 모세의 손에 문둥병이 발했다가 깨끗하게 낫는 기적이었습니다. 그 모세는 애굽에 가서도 하나님 살아계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내리게 한 사실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걸어갈 때도 순간순간 하나님의 기적을 보면서 걸어갔습니다. 저들은 늘 기적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생수, 만나, 메추라기, 단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을 추구하는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엔 반드시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뒤따라 다녔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고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고 풍랑이 잔잔해 지고 문둥병이 주님을 통해서 회복되는 엄청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정말 기적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너희가 무었을 찾느냐?"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굉장히 좋아 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지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기적을 찾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장애물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나무위에 달린 자는 저주 받은 자라고 하였는데 십자가에 죽은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인류의 메시아가 될 수 있습니까?
유대 사람들의 율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가 없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왜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일까요? 헬라의 철학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세계는 악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는 선하다고 생각 했습니다. 우리 몸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선하고 육신은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혼은 육신의 감옥에 갇혀서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신을 괴롭히며 죽여야 영혼이 육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영의 세계를 동경하고 찾아 간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보이는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올 수 가 있겠습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더럽고 죄 많은 육신을 뒤집어 쓸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 있습니까?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에겐 실로 어리석은 이야기였습니다. " 유대인들은 표적(기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 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자 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렇습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인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또한 그것은 헬라의 모든 지혜를 뛰어넘는 구속의 지혜였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유대인중의 유대인입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였으며 사울왕가의 후손이었으며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율법적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은 랍비였습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는 어릴 적부터 전통적으로 헬라철학을 공부하면서 자라온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기적도 지혜도 마다하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 너희가 무었을 찾느냐?" 사도 바울은 그 예수그리스도가 너무 너무 귀했습니다. 너무 너무 좋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섬기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인생을 걸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주님만을 따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그리스도만을 따르겠다고 외쳤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찾았는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찾습니까? 돈과 인기와 권력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추구하면 할수록 저들 가슴속에 공허한 여백을 메꿀 수 없어 갈증과 공허를 안고 지치고 쓰러져 갑니다.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시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현대인들은 가슴에 공허한 여백을 메우고자 저마다 샘을 팝니다. 그러나 그샘이 어쩌다가 돈의 샘이 됩니다. 권력의 샘이 됩니다. 인기의 샘이 됩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려 하나 가지면 가질수록 참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그 물을 마셔 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돈과 인기와 권력은 참된 만족과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없는 터진 웅덩이라고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 너희가 무었을 찾느냐?" 여러분은 유대인들처럼 기적을 추구할 것입니까? 헬라인들처럼 지혜를 추구 할 것입니까? 현대인들처럼 돈과 인기와 권력을 추구할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나도 인간인지라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싶습니다. 지혜를 추구하며 고상하게 살고 싶습니다. 많은 물질을 소유해서 큰소리치며 살고도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기를 받고도 싶습니다. 권력을 휘두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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