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기념주일]이것까지 참으라 (눅 22:4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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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주님이 체포되시는 장면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는 주님께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유다를 앞세우고 대제사장의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검과 몽둥이로 무장을 한 채 주님께 나타나고, 유다가 주님께 배신의 키스를 하며 신호를 보내자 마치 강도를 잡듯이 주님을 붙잡습니다. 자다가 놀라 깬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립니다. 죄 없는 스승을 체포하려는 자들에게 그렇게 맞선 겁니다. 제자의 충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절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이렇게 말씀하시며 떨어진 말고의 귀를 붙여서 고쳐 주십니다. 그 와중에도 말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것은 정당방위까지 참으라는 겁니다. 스승을 지키려는 제자의 충정의 칼까지 참으라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만큼은 못 참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까지도 참으라고 하십니다. 이 장면을 요한복음 18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마태복음 26장 5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여러분의 주님이 이런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못 말리는 분입니다. 사실은 이래서 예수 믿는다는 게 난감합니다. 나를 보호하는 최후의 정당방위도 예수님은 말리십니다. 가혹합니다. 말이 안 됩니다. 지금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타난 원수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를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정당방위 아닙니까? 선생님을 지키려는 충정 아닙니까? 그것까지도 참으라는 겁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겁니다. 주님은 실제로 이렇게 사셨습니다. 주님은 단 한 번도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맞선 적이 없으십니다. 때리면 맞았습니다. 한 번도 칼을 뽑아 자신의 방어를 꾀한 적이 없습니다.
몇일후면 삼일절 000주년입니다. 우리가 높이 평가하며 오래도록 잊지 않고 계승해야 할 삼일절 정신은 무엇입니까? 애국애족, 희생정신 다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역시 비폭력, 무저항 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3.1운동은 비폭력 무저항 정신의 만세운동이었지, 결코 무력으로 봉기한 독립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일제는 총칼과 경찰 그리고 군인들로 진압했지만, 우리는 끝까지 맨손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주님이 바로 이렇게 사신 겁니다. 주님은 비폭력 무저항의 원조였습니다.
간디가 그 정신을 계승한 겁니다. 십자가가 바로 영원한 비폭력 무저항의 표상입니다. 세상에 주님처럼 억울하고 부당하며 어처구니없이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전에 이미 당신의 생애 자체가 십자가였습니다. 주님은 늘 십자가를 사신 분입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십자가를 구현하신 분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게 십자가이며, 칼을 도로 칼집에 꽂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최소한의 자기방어도 용납하지 않았던 삶의 연장이 곧 골고다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감히 그분을 따르겠다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다 달아난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현실성이 없다고 합니다. 무모한 이상주의라고 치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멋대로 삽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까? 칼을 쓰면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왜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원수를 용서하지 않고 기어이 원수를 갚으면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칼의 생리요 비극입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것은 칼은 칼집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그게 정의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칼은 칼집에 있어야지 뽑히면 이미 칼이 아니라 살인의 도구입니다. 칼집에 꽂혀 있을 때 용기와 권위의 상징이 되는 겁니다. 칼에 한 번 피를 묻히면 절대 칼집에 꽂을 수 없습니다. 그 칼에 당한 사람들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칼의 비극이고 운명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십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입니다. 칼에 피를 묻히지 말고 칼집에 다시 꽂으라고 하신 겁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가 떨어뜨린 말고의 귀를 고쳐주신 겁니다. 칼을 쓰기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신 겁니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가 또 다시 우리나라 사형제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교회가 사형제 폐지를 위해 노력해 왔는데 이번에 무산 되었습니다. 교회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법원의 오판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주님이 보복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사형은 국가권력이 원수 갚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사형제도는 율법적 산물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주님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기에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겁니다. 원수를 갚을 게 아니라 용서하고 오히려 사랑하는 겁니다. 사형제도가 있다고 사회가 더 나아지거나 범죄가 줄지 않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회가 좋아집니다. 칼을 쓰면 칼로 망합니다.
과거 뱅쿠버 동계 올림픽때 우리 선수들이 연일 승전보를 보내서 우리 국민들이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슬펐습니다. 여자 쇼트트랙에서 1등을 하고도 실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호주 주심이 우리 선수가 중국 선수를 밀었다고 실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연이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8년 전에도 1위를 했던 김동성 선수에게 실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제소했는데, 결국 오심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2년간 자격 정지를 당했습니다. 그분이 2년간 국제대회에 나오지 못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보복의 칼날을 갈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가 오심 판결을 내렸을 때 그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다시 복귀해서 또 한 번의 칼을 휘두른 겁니다. 제가 너무 지나치게 생각한 것이겠지요.
어쨌든 주님은 보복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원수 갚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칼은 칼을, 피는 피를, 보복은 보복을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둘 다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며 이것까지 참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일본은 원수 갚는 것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사극 같은 것을 보면 대부분 다 원수 갚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합니다. 주님은 특히 보복을 엄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중무장을 해도 나를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정당방위마저도 포기한 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주님의 십자가보다 더 억울하고, 황당한 사건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아래에서 겉옷을 갖겠다고 제비를 뽑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편안할 때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상대가 나를 잡겠다고 칼을 빼든 상황에서는 그것까지 참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칼을 빼들면 피의 악순환이 지속되지만, 하나님께 보복을 맡기면 내게 궁극적인 승리를 안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토록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셨지만 결국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새아침은 반드시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만 옵니다. 부활이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정말 최후의 승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그것까지 참으셔야 합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셔야 합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보복논리를 포기하셔야 합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셔야 합니다. 주님이 온몸으로 목숨까지 바쳐 가르쳐주신 역설의 진리를 삶을 통해 실천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부활의 승리를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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