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설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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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잔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요2:1-12) (찬송가: 96장)
예수님의 손은 전능한 손
옛날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은 우습게만 느껴지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음은 과거 신문에 실렸던 내용들입니다. “시속 30마일로 여행하면 누구나 질식하고 말 것이다”(1840년). “인간의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기계 조립은 불가능하다”(1901년). “달에 가겠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1926년).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이 모든 일들이 지금은 다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불가능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생각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기적은 우리 안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기적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필립 얀시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심지어 우리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때, 그때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 안에 계신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고 있습니까?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얼마나 크고 능력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십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모두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가리켜「표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표적」이라는 말은『요한복음』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용어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적이라고 소개하거나 그냥 능력 혹은 권능이라고 했는데,『요한복음』에서는「표적(標蹟)」이라는 좀 생소한 말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사건을『요한복음』에서만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표적이란 말의 뜻은, 사건은 사건대로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의미보다는 그 사건 속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건 자체가 뜻을 전달하는 하나의 언어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본문의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인가?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듯이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목적, 즉 주제(主題)가 있는 것이다. 그 해답은 본문 11절에서 밝힌 대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누구신가를 믿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표적을 행하셨다. 이 표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나아가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먹고 마시기 위해 가나 혼인 잔치집에 가신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그들로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 표적을 행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공식적인 자리에 취임하여 처음에 하는 일은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앞으로 그 사람이 할 일과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처음으로 보여주신 사건은 가나 혼인잔치에 참석하셔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비난한 것처럼 술을 즐기고 포도주를 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데리고 먹고 마시는 잔칫집부터 가신 것이었겠는가?
성경에 보면 포도주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술 취해서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경고를 하고 있지만, 포도주는 늘 기쁨과 환희에 대해서 상징적인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 시편 104편 15절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전도서 10장 19절에서는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성경에 나오는 술이나 포도주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 첫 번째 이적을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가? 거기에는 기쁨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잔치집은 모든 것이 풍성하다. 거기에는 음식도 많고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웃음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잔치 집의 풍성함과 기쁨이었다.
기독교는 잔치 집과 같은 종교이다. 흔히들 교회라고 하면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예배 중에는 몸이 굳어지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경건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가르치는 종교요, 그러기에 감사와 축제가 있고, 내일의 소망을 노래하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는 참회의 눈물이 있고, 엄격한 계율이나 절제의 생활을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이적을 행하신 것이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물을 가지시고 포도주를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혼인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사건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잔치를 회복시키시고, 기쁨을 회복시키시며, 기다릴 것이 있고 소망할 것이 있는 자로 우리를 고치시겠다는, 보다 깊은 뜻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비난하는 말을 들으시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친히 당신을 혼인집 신랑으로 표현하시며,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라고 말씀하심으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즉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요 환희와 축제의 종교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즐거워야 할 잔치 집에 큰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것은 포도주가 모자랐다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잔치하는 날,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대인들의 주식이 양고기였는데, 이 양고기를 먹을 때는 반드시 포도주를 곁들여 먹었다. 그런데 잔치 집에서 주 음료인 포도주가 도중에 모자랐으니 주인 측에서는 얼마나 당황했을까가 상상된다. 어쨌든 잔치 집에 포도주가 부족한 사실을 알았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께 의논하였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모자라면 주인에게 가서 이야기하던가, 연회장에게 이야기해야 옳은데도 마리아는 예수님께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보고를 한다. 신랑도 아니고 잔치 집 주인도 아니고 연회장도 아니었지만, 예수님께 와서 이야기한 것은 전후 문맥으로 보나 마리아의 믿음으로 미루어볼 때 그것은 예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혹 이런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문제까지도 마리아는 지난 30년간을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경험한 바에 의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었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예수님께 이야기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의 문제는 무엇인가? 여러분의 부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예수님께 아뢰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떤 문제도 다 해결하실 수 있는 해결자요 능력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포도주 사건은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의논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어떤 일이든지 상식적으로 스스로 판단해서 포기하지 말고 개인적인 문제까지도 예수님께 의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지극히 작은 문제까지도 관심을 가지시고 귀를 기울이시며 듣기를 원하신다. 상담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의논하며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오늘도 부족함이 없다. 비록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비록 건강이 부족하고, 비록 재물이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할지라도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고 간증할 수 있다. 아쉬울 것이 없노라고 노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마리아가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말을 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하셨는가? 4절 말씀을 읽어보자(요 2:4∼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우리들이 얼른 들으면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를 가리켜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말씀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씀은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는 말씀이다. 본래 헬라어 원문에 나타난 '여자여'라는 이 말의 의미는 왕이 왕후를 부를 때 쓰는 용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 말은 여자에 대한 최고의 높임말로 쓰여진 것이었는데,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다보니 이런 문장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훨씬 이해하기가 쉬운 줄 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리아의 태도이다. 5절에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일단 순종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먼저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데서 문제의 해결이 있다. 이적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직선적이고도 특별한 은혜로써 사람들에게 은사로 주시는 것이지만, 이 은사를 받는 그릇은 나에게 있어야 한다. 그 그릇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순종이다.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졌다. 예수님의 표적은 아주 간단하게 나타났다. 오늘 본문 6절 이하의 말씀에서 보는 대로 마침 그 집에 커다란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셨다. 하인들이 물을 떠다가 아구까지 물을 채웠더니 이제는 떠서 갖다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물을 떠다 부으면서부터 불평을 했을 것이다. "아니 포도주가 없다는데 물은 왜 갖다 부으라고 하지?", "그것도 어느 정도 갖다 부었으면 되었지 무얼 하려고 이렇게 아구까지 채우라고 하실까?" 하면서 수군거리며 투덜댔을 것이다.
그러나 하인들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항아리마다 물을 아구까지 갖다 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라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물을 떠온 하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 그것도 보통 포도주가 아니라 아주 맛있는 고급 포도주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란다(요 2:9∼10). 이 사실은 처음부터 과학적인 사고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모르는 연회장이나 손님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연회장도 모르고 신랑도 모르는 그 사건을 누가 알았다고 했는가? 예, 물 떠 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했다. 기적이란 이와 같이 순종할 때 나타나며, 믿을 때 나타나고, 말없이 봉사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 수많은 이적 기사가 있지만, 거기에는 항상 그 기적의 주체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었고, 그 말씀을 받는 사람이 거기 또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였다. 오늘 우리들도 마리아의 이 말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는 말씀처럼 순종하여 기적을 체험하고, 능력을 받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란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풍성한가? 포도주가 넉넉한가? 아니면 문제가 있는가?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 없나? 걱정하며 고민하는 일이 있는가? 예수님께로 나아오라. 그리고 "주여, 나의 포도주가 떨어졌나이다" 기도하시기 바란다. 신앙생활에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고, 오히려 힘이 드는가? 성령의 신령한 포도주가 없기 때문이다.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고, 힘 있게 하는 성령의 포도주가 떨어진 증거이다.
예수님께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문제를 제기한 마리아와 그의 말을 듣고 순종한 하인들, 그리고 또 그 항아리에 부은 물을 다시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준 사람들, 모두가 기적을 가져오게 한 사람들이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잔치집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초청해서 함께 그 자리에 계셨기 때문에 마리아의 믿음의 고백도 들을 수 있었고, 하인들의 순종도, 연회장의 기쁨도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곳에 안 계시고, 마리아가 아무리 믿음이 좋고 지혜롭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순종 잘하는 하인들이 부지기수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이런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무미건조하던 인생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미를 발견하고, 맛없고 가치 없는 생애가 비로소 아름다운 빛깔을 나타내는 포도주와 같은 인생으로 변하는 줄 믿습니다. 진정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음의 왕좌에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아진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라는 말씀과 같이 날마다 풍성한 삶을 살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은혜와 기쁨이 더하고 축복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가나 혼인 잔치집의 기적이요 축복이다.
예수 없는 사람들에겐 진정한 미래가 없다. 소망이 없다. 해가 갈수록 실망이 더하고 슬픔이 더하고 허무가 더하다.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초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을 모신 심령과 가정은, 주님께서 계시기에 처음보다 나중이 점점 더 좋아질 뿐 아니라, 날마다 주시는 은혜와 각양 은사로 말미암아 풍성한 삶을 살고, 훗날 우리 주님과 함께 햇빛보다 더 밝은 저 천국에서 살게 될 줄 믿는다. 나의 삶에서 가장 깊은 갈증을 느끼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삶의 필수 요소가 바닥났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나의 삶은 예수님께서 만들어 내신 맛있는 포도주의 활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혹시 빈 항아리처럼 고갈된 상태는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진리 안에서 제 생을 새롭게 빚어 주시길 원합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진 제 삶이 가정과 일터, 사회를 새롭게 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손은 전능한 손
옛날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은 우습게만 느껴지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음은 과거 신문에 실렸던 내용들입니다. “시속 30마일로 여행하면 누구나 질식하고 말 것이다”(1840년). “인간의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기계 조립은 불가능하다”(1901년). “달에 가겠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1926년).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이 모든 일들이 지금은 다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불가능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생각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기적은 우리 안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기적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필립 얀시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심지어 우리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때, 그때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 안에 계신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고 있습니까?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얼마나 크고 능력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십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모두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가리켜「표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표적」이라는 말은『요한복음』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용어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적이라고 소개하거나 그냥 능력 혹은 권능이라고 했는데,『요한복음』에서는「표적(標蹟)」이라는 좀 생소한 말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사건을『요한복음』에서만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표적이란 말의 뜻은, 사건은 사건대로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의미보다는 그 사건 속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건 자체가 뜻을 전달하는 하나의 언어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본문의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인가?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듯이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목적, 즉 주제(主題)가 있는 것이다. 그 해답은 본문 11절에서 밝힌 대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누구신가를 믿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표적을 행하셨다. 이 표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나아가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먹고 마시기 위해 가나 혼인 잔치집에 가신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그들로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 표적을 행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공식적인 자리에 취임하여 처음에 하는 일은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앞으로 그 사람이 할 일과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처음으로 보여주신 사건은 가나 혼인잔치에 참석하셔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비난한 것처럼 술을 즐기고 포도주를 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데리고 먹고 마시는 잔칫집부터 가신 것이었겠는가?
성경에 보면 포도주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술 취해서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경고를 하고 있지만, 포도주는 늘 기쁨과 환희에 대해서 상징적인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 시편 104편 15절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전도서 10장 19절에서는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성경에 나오는 술이나 포도주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 첫 번째 이적을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가? 거기에는 기쁨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잔치집은 모든 것이 풍성하다. 거기에는 음식도 많고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웃음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잔치 집의 풍성함과 기쁨이었다.
기독교는 잔치 집과 같은 종교이다. 흔히들 교회라고 하면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예배 중에는 몸이 굳어지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경건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가르치는 종교요, 그러기에 감사와 축제가 있고, 내일의 소망을 노래하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는 참회의 눈물이 있고, 엄격한 계율이나 절제의 생활을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이적을 행하신 것이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물을 가지시고 포도주를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혼인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사건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잔치를 회복시키시고, 기쁨을 회복시키시며, 기다릴 것이 있고 소망할 것이 있는 자로 우리를 고치시겠다는, 보다 깊은 뜻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비난하는 말을 들으시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친히 당신을 혼인집 신랑으로 표현하시며,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라고 말씀하심으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즉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요 환희와 축제의 종교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즐거워야 할 잔치 집에 큰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것은 포도주가 모자랐다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잔치하는 날,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대인들의 주식이 양고기였는데, 이 양고기를 먹을 때는 반드시 포도주를 곁들여 먹었다. 그런데 잔치 집에서 주 음료인 포도주가 도중에 모자랐으니 주인 측에서는 얼마나 당황했을까가 상상된다. 어쨌든 잔치 집에 포도주가 부족한 사실을 알았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께 의논하였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모자라면 주인에게 가서 이야기하던가, 연회장에게 이야기해야 옳은데도 마리아는 예수님께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보고를 한다. 신랑도 아니고 잔치 집 주인도 아니고 연회장도 아니었지만, 예수님께 와서 이야기한 것은 전후 문맥으로 보나 마리아의 믿음으로 미루어볼 때 그것은 예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혹 이런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문제까지도 마리아는 지난 30년간을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경험한 바에 의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었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예수님께 이야기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의 문제는 무엇인가? 여러분의 부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예수님께 아뢰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떤 문제도 다 해결하실 수 있는 해결자요 능력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포도주 사건은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의논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어떤 일이든지 상식적으로 스스로 판단해서 포기하지 말고 개인적인 문제까지도 예수님께 의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지극히 작은 문제까지도 관심을 가지시고 귀를 기울이시며 듣기를 원하신다. 상담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의논하며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오늘도 부족함이 없다. 비록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비록 건강이 부족하고, 비록 재물이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할지라도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고 간증할 수 있다. 아쉬울 것이 없노라고 노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마리아가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말을 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하셨는가? 4절 말씀을 읽어보자(요 2:4∼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우리들이 얼른 들으면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를 가리켜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말씀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씀은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는 말씀이다. 본래 헬라어 원문에 나타난 '여자여'라는 이 말의 의미는 왕이 왕후를 부를 때 쓰는 용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 말은 여자에 대한 최고의 높임말로 쓰여진 것이었는데,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다보니 이런 문장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훨씬 이해하기가 쉬운 줄 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리아의 태도이다. 5절에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일단 순종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먼저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데서 문제의 해결이 있다. 이적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직선적이고도 특별한 은혜로써 사람들에게 은사로 주시는 것이지만, 이 은사를 받는 그릇은 나에게 있어야 한다. 그 그릇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순종이다.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졌다. 예수님의 표적은 아주 간단하게 나타났다. 오늘 본문 6절 이하의 말씀에서 보는 대로 마침 그 집에 커다란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셨다. 하인들이 물을 떠다가 아구까지 물을 채웠더니 이제는 떠서 갖다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물을 떠다 부으면서부터 불평을 했을 것이다. "아니 포도주가 없다는데 물은 왜 갖다 부으라고 하지?", "그것도 어느 정도 갖다 부었으면 되었지 무얼 하려고 이렇게 아구까지 채우라고 하실까?" 하면서 수군거리며 투덜댔을 것이다.
그러나 하인들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항아리마다 물을 아구까지 갖다 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라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물을 떠온 하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 그것도 보통 포도주가 아니라 아주 맛있는 고급 포도주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란다(요 2:9∼10). 이 사실은 처음부터 과학적인 사고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모르는 연회장이나 손님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연회장도 모르고 신랑도 모르는 그 사건을 누가 알았다고 했는가? 예, 물 떠 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했다. 기적이란 이와 같이 순종할 때 나타나며, 믿을 때 나타나고, 말없이 봉사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 수많은 이적 기사가 있지만, 거기에는 항상 그 기적의 주체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었고, 그 말씀을 받는 사람이 거기 또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였다. 오늘 우리들도 마리아의 이 말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는 말씀처럼 순종하여 기적을 체험하고, 능력을 받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란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풍성한가? 포도주가 넉넉한가? 아니면 문제가 있는가?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 없나? 걱정하며 고민하는 일이 있는가? 예수님께로 나아오라. 그리고 "주여, 나의 포도주가 떨어졌나이다" 기도하시기 바란다. 신앙생활에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고, 오히려 힘이 드는가? 성령의 신령한 포도주가 없기 때문이다.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고, 힘 있게 하는 성령의 포도주가 떨어진 증거이다.
예수님께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문제를 제기한 마리아와 그의 말을 듣고 순종한 하인들, 그리고 또 그 항아리에 부은 물을 다시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준 사람들, 모두가 기적을 가져오게 한 사람들이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잔치집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초청해서 함께 그 자리에 계셨기 때문에 마리아의 믿음의 고백도 들을 수 있었고, 하인들의 순종도, 연회장의 기쁨도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곳에 안 계시고, 마리아가 아무리 믿음이 좋고 지혜롭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순종 잘하는 하인들이 부지기수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이런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무미건조하던 인생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미를 발견하고, 맛없고 가치 없는 생애가 비로소 아름다운 빛깔을 나타내는 포도주와 같은 인생으로 변하는 줄 믿습니다. 진정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음의 왕좌에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아진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라는 말씀과 같이 날마다 풍성한 삶을 살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은혜와 기쁨이 더하고 축복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가나 혼인 잔치집의 기적이요 축복이다.
예수 없는 사람들에겐 진정한 미래가 없다. 소망이 없다. 해가 갈수록 실망이 더하고 슬픔이 더하고 허무가 더하다.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초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을 모신 심령과 가정은, 주님께서 계시기에 처음보다 나중이 점점 더 좋아질 뿐 아니라, 날마다 주시는 은혜와 각양 은사로 말미암아 풍성한 삶을 살고, 훗날 우리 주님과 함께 햇빛보다 더 밝은 저 천국에서 살게 될 줄 믿는다. 나의 삶에서 가장 깊은 갈증을 느끼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삶의 필수 요소가 바닥났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나의 삶은 예수님께서 만들어 내신 맛있는 포도주의 활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혹시 빈 항아리처럼 고갈된 상태는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진리 안에서 제 생을 새롭게 빚어 주시길 원합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진 제 삶이 가정과 일터, 사회를 새롭게 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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