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 문화선교

선지예술학교

절기말씀

사순절 설교 6.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93회 작성일 20-03-02 22:37

본문

6.다가오는 핍박 드러날 영광(요 16:1-15) 417장


예수님이 사람들의 핍박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후에 오실 보혜사 성령님은 죄와 의, 심판에 대해 모든 것을 밝혀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성령 가운데 모성적인 일을 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본문에 이러한 모성적인 성령이 보혜사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보혜사라는 뜻은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인데, 본문에 이러한 보혜사의 하는 일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번역을 달리 번역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한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눈을 떠서 새로운 것을 보게 합니다. 그 새로운 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실 시간을 얼마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사와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제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기 위해서, 예수께서 하셨던 일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되어야 하겠기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중요한 내용은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것과 그 보혜사가 오셔서 할 일에 대한 것입니다. 보혜사가 할 일로 죄·의·심판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무의미한 사건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교회가 굳게 서 갈 수 있고, 복음이 세상에서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고 능력 있는 복음으로 선포될 수 있습니다.


보혜사가 하는 일이 눈을 뜨게 하는 일이라고 할 때 여기서 뜨게 한다는 것은 태어남·자람·깨어남·갱신의 뜻이 포함됩니다.


먼저 보혜사는 존재의 새로 태어남을 통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눈을 뜨게 합니다. 보혜사는 하나님과 우리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하며, 우리의 내적 실체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씨앗을 주며, 우리 안에 새로운 나를 세우며,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삶의 현실을 갱신시킵니다.


보혜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다시 태어남은 하나님의 미래의 희망 속에 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초인적 인간, 현세의 인간의 경험들을 초월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고난의 면제도 아닙니다. 그리고 아울러 희망과 함께 인간으로서 사랑과 고통, 삶과 죽음을 다르게 경험해 가게 됩니다.


보혜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다시 태어남은 자연 속의 봄을 연상케 합니다. 즉 모든 나무들과 식물들의 푸르름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이 다시 태어남은 영원히 사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과 시간의 만남입니다. 그 다음으로 보혜사는 다시 태어나게 함과 함께 자라게 합니다. 다시 태어남은 자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에서 도덕적 완성을 그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됩니다.


믿음에 있어서 성장은 인간의 삶에서 생의 계절에 상응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연령층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의 하나님 인식, 청년의 하나님 인식, 부모와 직업인의 하나님 인식, 노인층의 하나님 인식은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인식은 인생의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유아 시절의 하나님 인식은 신화나 동화에 등장하는 신비스러운 할아버지와 같은 분인데 그러한 하나님 인식은 교회에서 주일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많은 동화를 통해 형성된 하나님 상이었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의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 이야기,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저에게 신비스러운 세계에 대한 많은 상상을 갖게 했습니다. 한편 그 이야기는 어린 시절 저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유년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훌륭한 인물에 대한 동경 가운데서 기독교 성인들의 전기를 통해서 제가 만나게 된 하나님은, 유년기 때와는 달리 거룩한 성인의 상으로 저의 마음에 간직되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상은 청소년기의 유혹을 극복해 가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정신적 방황과 고뇌 가운데서 하나님 인식은 고뇌하는 인간 실존에 개입하셔서 거듭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시는 도덕적인 하나님이었습니다. 생의 각 계절에서 달리 이해한 하나님은 각기 다른 분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의 삶에 현존해 계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단지 다른 생의 계절에서 부분적으로 경험한 하나님 인식의 파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생의 계절이 바뀜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새롭게 눈을 떠가도록 인도한 분이 보혜사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 없이 저는 저의 생의 변화와 함께 찾아오는 많은 생의 문제를 극복해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혜사는 생의 변화 과정 가운데서 진리의 뜻을 새롭게 조명하고, 재 구성시켜 믿음이 보존되게 합니다. 역시 보혜사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세워 가고 보존해 가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보혜사는 우상의 허구에서 깨어나게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그의 내면에 미개인이 있습니다. 옛날 과학이 발달하지 않고 인간의 직관만이 사용되었던 시기에는 이 미개인에 의해 인간의 삶 전체가 지배되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변은 전부 어떤 신비스러운 힘을 가진 신들의 조작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고 빌기도 하고, 산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큰 바위나 나무에게 안전을 기원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인간의 운명이 그 어떤 변덕이 많은 신적 존재의 수중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종족의 안전을 위해 알 수 없는 변덕자를 달래고 무마시키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바쳤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불안해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이 합리적 사고를 하기 시작하면서 자연현상의 변화나 천재지변을 과학적으로 규명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미개인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인격 깊은 곳에 숨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미개인은 그 무엇인가 의지하고 붙잡는 것이 없으면 실존적 불안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과학의 시대에 합리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도 불안하기 때문에 생의 깊은 소외감 때문에 그 어떤 것을 신뢰의 대상으로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우상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재물을 가진 자나, 지식인이나 배우지 못한 자나 모두 우상이라는 허구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우상들은 이데올로기·돈·명예·성공·성·권력·인기 등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이러한 우상의 허구를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은 매우 지성적인 사람으로 합리적 사고를 한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실존적 불안이 더 크고 생의 소외감을 더 깊게 느끼게 됩니다. 특히 생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불안은 더 커집니다. 오히려 우매한 사람은 하늘을 믿던가 별이나 해, 달 같은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지적인 사람만큼 실존의 불안을 덜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은 인간을 우매하게 만듭니다. 우상은 눈을 어둡게 해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상은 허구의 유토피아를 지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보혜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미개인의 눈을 뜨게 해서 진정 의지하고 신뢰하고 섬겨야 할 대상을 바로 보게 하고, 인간의 인격에서 분리되어 있는 합리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을 통합시킵니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위대성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 오랜 옛날인데도 그들은 우주 삼라만상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것을 통해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보혜사는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 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향락과 쾌락의 우상에 사로잡혀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현실을 넘어서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을 본다는 것은 보혜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참된 비젼은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을 넘어서 볼 수 있게 하고 현실에서 그것을 위해 창조적 활동을 하게 합니다. 그 비젼은 분명히 실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젼은 보혜사를 통해 갖는 새로운 안목입니다. 그러나 우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은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의 세계밖에는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으로 가득 찬 그 시대에서 소아시아 각 지방을 다니면서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우상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보혜사는 인간이 우상의 허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은 "보혜사는 본래의 뜻이 인간을 어두움에서 빛이 있는 장소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말에 일치합니다.


끝으로 보혜사는 우리를 갱신시킵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배터리가 다 소진되면 더 이상 목적한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때는 배터리를 재충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우리의 삶을 계속 고갈시키고 소진시키기 때문에 영적 충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갈 때 창조적 삶은 불가능합니다. 영적 고갈은 허세·과장·수다스러움·절망·비관을 느끼게 합니다. 생을 어둡게 단정 지어 가게 합니다.


보혜사는 우리에게 참된 힘을 공급해 줍니다. 그 힘은 창조력· 어두움을 이길 수 있고,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믿음·희망·사랑입니다.


보혜사는 우리를 갱신시키기 위하여 매개체를 사용합니다. 어떤 때는 조용한 장소, 어떤 때는 좋은 신앙 서적, 깊은 기도, 영적인 교제, 선포되는 말씀, 예배, 성만찬 같은 매개체를 이용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갖고 다시 세상에 나아가서 힘 있게 살아가게 됩니다. 보혜사 자신이 신비스러운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보혜사는 우리를 그러한 길로 인도해 갑니다.


우리가 인생의 도상에서 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에게 조그마한 격려와 위로를 주어 생을 다시 시작하게 한 사람이 있어도 평생에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시작이 있게 했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주고, 우리를 깨어나게 하고, 우리를 갱신시켜 가는 분이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보혜사가 바로 우리에게 그러한 분입니다. 그는 우리를 영원한 곳으로까지 인도할 것입니다.


보혜사는 하나님의 희망의 계획 가운데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창조적 일을 수행해 갈 것입니다. 그 창조적 일이란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일, 자라게 하는 일, 깨어나게 하는 일, 갱신입니다. 우리 역시 보혜사와 함께 매일 매일 그 일에 동참해 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새 창조에 동참하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절묵상: (요 16: 7) 우리가 소망을 걸고 있는 분이 우리를 떠나실 때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우리가 그분을 더 깊이, 더 풍성하게 알 수 있도록 다시 영으로 돌아오실 계획이 없었다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크리스 티그린/ 복음주의 작가


나는 늘 깨어 기도하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하나님을 향한 그릇된 열심 때문에 믿는 자들을 어렵게 만든 경우는 없습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불순종의 삶이 순종의 삶으로 변화됨을 믿습니까? 내 영혼은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