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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설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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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20회 작성일 20-03-02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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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통을 넘어서는 기쁨 (요16:16-24) (483장)


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제자들은 큰 슬픔과 근심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그들에게 기쁨이 더욱 클 것이라는 소망을 주십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무엇이든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떠남의 슬픔, 재회의 환희 (16:16~22)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제자들은 큰 감정적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사실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면 보지 못하겠으나 다시 잠시 후에는 볼 수 있으리라’(16절)는 말씀은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일을 도모한 세상에는 기쁨이 되겠지만 제자들에게는 애통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애통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말할 수 없는 환희로 바뀔 것입니다. 산모가 새 생명을 보는 순간의 큰 기쁨으로 해산의 고통을 말끔히 잊어버리듯,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22절)라는 말씀은 부활의 사건을 넘어 성령의 강림까지 염두에 둔 이중적 암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슬픔은 큰 기쁨을 전제합니다.


고장 난 장난감을 가지고 아이가 울면서 들어왔습니다. "이젠 필요 없어, 다른 것 사줘"하고 집어 던졌을 때 이때 엄마가 금방 새것으로 사준다면 그 아이의 잠재의식 속에는 모든 문제를 안 되면 쉽게 포기하고 다른 것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반면 엄마가 그것을 고쳐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했다면 그 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놀면서 '내가 슬퍼하던 문제가 엄마의 손에서 다시 기쁨으로 바꿔질 수 있구나' 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근심의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서 기쁨의 문제로 바꿔 주시는 분이십니다. 근심의 사람을 기쁨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시고 육신의 사람을 '너 쓸모 없어'하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쳐서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제자들과 같이 여러 종류의 근심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부간의 불화로 가족모두의 근심이 되기도 하고, 직장을 그만둬야하는 위기에 근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근심과 염려와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어떤 것이 여러분에게 근심을 가져다주고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여러분의 맘을 흔들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근심의 문제가 도리어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그들의 근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요한복음 16:5-6절에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굴색이 변하고 맘에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도대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는 말씀이 무엇이뇨,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은 무엇이뇨" 하고 서로 문의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왠지 불안해했고,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근심'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의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전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그것은 육신적으로 큰 고통의 문제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그 고통의 정도가 곡하고 애통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애통해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같이 옷 벗기시고 수치와 조롱을 다 당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위에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곡하고 애통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우리들은 십자가의 고통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잊고 사는 것 같아요. 맘이 무디어 졌습니다. 하나의 지나간 사건으로만 기억하고 있진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자들은 애통할 것인데 "세상은 기뻐하리라"는 것입니다. 요15:18-19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지실 때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곡하고 애통해 했으나 마귀는 자기세상이 온줄 알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마귀의 권세인 죄와 사망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 것이라면 십자가는 또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결정적인 승리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세상 사람들은 조롱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더니 꼴 좋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하고 패배한 것 같으나 궁극적인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요16:33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도리어 기쁨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 곁을 떠나셔야만 했을까요? 왜 우리들에게 삶에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걸까요? 오늘본문에는 21절에 보니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통해 비유로써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그 첫 번째 이유는, 잠간의 근심과 고통이 위리에게 기쁨을 더해주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새 생명을 낳기 위한 예수님의 영적진통이었습니다. 이 고통을 모르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 모릅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애 낳아봐야 그 고통 말할 수 있다고-' 아내들이 큰소리 칠 때가 이때인 것 같아요.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가 누릴 부활의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마귀의 핍박 속에서 살아가지만 십자가 뒤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주님처럼 십자가지고 영적해산의 고통을 능히 감당케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가셔야만 했던 이유는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6:7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보혜사가 오시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시려고 떠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우리 속에 영원토록 거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면 그는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고 연약할 때 우릴 도우십니다.


세 번째 이유는,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22절 말씀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서 '너희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세상의 기쁨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기뻐하고, 남의 기쁨을 빼앗아서 기뻐하고, 속여야하고, 쾌락을 날마다 추구해야만 합니다. 이 기쁨은 잠깐입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마침표는 죽음이요 심판이지만 성도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인 것입니다. 우리가 누릴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도, 알 수도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우리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주님은 오늘날 우리의 근심을 세상의 것들로 대체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위로부터 오신 성령을 통하여 신령한 기쁨으로 변화 시켜 주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주님은 "조금 있으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어떤 근심이 문제가 있습니까? 삶에 어떤 아픔이 있습니까?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조금 있으면"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줄 믿습니다.


요 16:23a :우리는 심장이 뛸까 말까, 우리 머리카락이 자랄까 말까를 묻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 육체의 생명의 법칙이 그 모든 것을 행하게 하는 까닭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 그 참 생명 속에 거하는 사람에게도 더 이상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이 없어집니다. 주님의 그 영원하신 생명, 그 온전한 생명의 힘과 법칙이 우리를 친히 교정하고 바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게 있는 슬픔과 근심에 어떤 기쁨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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