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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생명의 떡과 피 /요한복음 6:4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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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18회 작성일 20-03-02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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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과 피

요한복음 6:47~59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내일부터는 일주간 고난주간이 됩니다. 복음서 중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많은 기적 사건 중에 규모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 것을 오병이어 사건이라고 보는데, 약 1만 명 정도가 참여해서 체험한 일이고, 또 그 내용도 보기만 하는 기적이 아니라 먹고 배가 부른 사건이라서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기적에 속합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신비로웠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 전체가 유아부터 노년층까지 주일에 출석하는 모든 교인이 한번 야외로 나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최소한 수천 명이 모일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점심식사 준비는 하나도 안하고 빈손으로 모두 가게 되었습니다. 가서 예배도 드리고 오락도 하고 재미나게 놀았습니다. 저녁때까지 그렇게 하다 보니까 모두가 배가 고팠는데, 식량은 주일학생 한 명이 햄버거 다섯 개하고 고기 두 덩어리만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축복기도 드린 후에 오천, 육천 명의 교인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어서 왔다면 그때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 매우 기쁘고 즐겁고 신비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적 사건은 언제나 부작용도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이 기적이란 것은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이 또 보고 싶어 합니다. 이제 떡을 먹은 사람들은  좋지 않은 버릇이 생겼는데, 사람만 모이면 떡 만들어내라는 은근한 기대와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지금 따라온 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또 떡을 만들라고 이렇게 기대감을 가지고 나를 보고 있도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 만나면 다른 데 마음을 쓰지 않고 빨리 떡을 또 그렇게 만들어 한 끼를 배부르게 먹고 싶은 요청을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그런 사건이 나타나서 주님은 그 군중을 향해서 육신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목을 오늘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군중에게 바라는 것은 “이러한 초능력의 사건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니 이 일을 지금 행하는 이가 누구냐? 바로 메시야로다. 내가 하늘로서 온 메시야이다.”라고 가르쳐주시기 위해 하신 것인데 이 군중들은 배고픈 한 끼를 해결할 기쁨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조금 실망하셔서 영원히 배부를 수 있는 생명의 떡을 오늘 설교하시게 된 것입니다.

오병이어 떡을 받아 배부르게 먹은 사람은 그 이튿날 또 배가 고파집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계속 들어주셨다면 백성은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는 게으른 백성이 되고 결국 퇴보의 문화만 아주 비참하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생명의 영원성을 보장해 주기 위함인데 그러한 일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실 때에만 가능하다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의 오해 반응이 오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마치 식인종을 연상하는 그런 오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봤습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의 불행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을 때입니다. 속죄의 살을 먹고 피를 뿌리는 일은 이미 유대인의 제사 문화 속에서 뿌리 깊게 전해져온 제사 의식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속죄제를 드립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제사가 있는데 양을 끌고 와서 제사장이 양의 머리에 제사를 합니다. 그 뜻은 인간의 모든 죄를 거두어서 그 양에다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양은 운명적으로 죽어야 합니다. 죄 값으로 죽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가 아니라 인간이 지은 죄를 대신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을 잡아서 함께 먹는 순서가 있는데 함께 나누어 먹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영접하게 되고 자신의 속죄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자기 영혼에 의식하게 되는 이런 제사의식이 오래 전부터 실시되어 왔습니다. 이때 제사에서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만약 먹지 아니하면 그 제사는 무효가 됩니다. 오늘 말씀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먹는 제사 음식은 반드시 먹어야 되는 것같이 예수의 살은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고 마셔야 예수님과 위대한 생명의 결부가 이루어짐을 영적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을 영원히 기념하여 나를 기억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의미를 우리가 상징화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관계를 생각해 보면 인간의 수없이 많은 관계성 중에서 가장 깊은 관계를 두 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의 최고 표현을 결혼이라고 하는 의식과 함께 피차의 살을 나누는 의식 속에서 영혼의 대화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는 일대일의 인격 승화 결합체로서 어떤 인간관계보다 깊은 관계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둘이 한 몸이 될지라” 살이 하나가 되는 의미의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이 관계의 내용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둘만의 영혼의 교류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회는 이 관계를 신성시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어느 민족이나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살을 먹는다는 의미는 그 이상의 의미 관계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승화시키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 살을 나누는 관계보다 더 진한 관계가 있습니다. 피를 나누는 관계입니다. 그것이 자녀입니다. 자녀와의 관계는 영원히 뗄 수가 없습니다. 피를 나눈 나의 분신이라는 의미가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의미는 그런 관계의 결합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주님과 나는 이제 위대한 생명의 결부가 이루어져서 떼려야 뗄 수 없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진액이 교환되는 의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렇게 살과 피를 물려받는 아버지의 자녀라는 의미로서의 표현입니다. 이 관계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가진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요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설명할 때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런 관계를 누가 끊으리요? 환난이나 권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상징화해서 어린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 이유는 구약 시대의 제사용 양은 점 없고 흠 없는 일년된 어린양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인간이 죄를 지었는데 양이 죽어야 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양의 피를 대속의 피로 정해주사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의 방법론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어린 양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 그 피가 속죄가 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대속죄일이 되면 온 국민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짐승을 하나 갖다 놓고 대제사장이 안수 기도를 합니다. 그 뜻은 백성들의 모든 죄를 거두어서 거기다가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은 죄의 덩어리가 됐습니다. 그렇게 죄가 많아진 양은 그 죄 값으로 살 수가 없으므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피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의미의 방법을 구원으로 하나님이 열어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속죄의 기쁨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양이 되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자신이 대신 지셨음으로 할 수 없이 어린양과 같이 죽으셔야 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왜 내가 죄를 짓고 예수님이 죽느냐? 내가 죽으면 될 것 아니냐?”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진리는 예수의 피를 속죄의 능력으로 믿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이 은혜의 피를 믿으면 되는 간단한 원리의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다른 데서 구원을 찾지 말아라. 내게로 오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을 가벼움이라.” 우리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어떤 종교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지어놓기 때문에 그냥 두면 차라리 행복하게 살 것을 그 무거운 짐 때문에 살 수가 없는 종교들이 세상에 수없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내 짐은 쉽고 가벼우니라.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이리로 오라. 여기는 쉬운 구원의 길이 있다.” 예수를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종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는 아무 것도 지불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고 복되게 하는 종교냐 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피는 몇 가지의 효력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우리가 큰 죄를 지었다 하여도 재판관이 너는 무죄니까 나가라 하면 끝난 것입니다.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는 죄없다고 정해주었으면 우리가 그렇게 믿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의 짐입니다. 예수의 구원을, 우리를 영원히 살도록 영생을 주셨음으로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한 영생이 약속되어져 있기 때문에 사망의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진리! 우리가 죄짓고 양심의 고통이 큰 문제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회개한 죄는 다시 기억치 아니한다 하셨으니 그 무한한 양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함을 주는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냐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놓고 이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반드시 마셔야 할 잔이라고 결단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인간 구원을 위해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자기가 마셔야 할 잔이라고 결단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자신이 반드시 가야할 길이라고 결단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1절에 “인자는 자신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인간 구원의 예정이다. 내가 이 길을 가야 한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치러야 할 값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고난의 잔을 마셨고 고난의 길을 갔으며 고난의 값을 치른 것이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고자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가야 되는가? 나도 주님을 위하는 일에 어떤 때는 살을 떼는 아픔도, 피를 흘리는 결단의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라고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우리들에게 선물하시면서 이런 방법을 저희들에게 주셨음으로 기념하는 것입니다.

뉴멕시코 알바버지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 장로교회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 요양원에는 아주 감동적인 역사가 있는데 한 건강하지 못한 신학생이 어떤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이 그 아가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건강이 나쁘면서도 그 아가씨의 마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아가씨가 신학생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마음을 주었는데 이 신학생은 점점 더 폐가 약해져서 요양을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장로교 신학생이니까 장로교회 요양원에 가서 있게 됩니다. 건강이 돌이킬 수 없이 점점 더 나빠져서 그 아가씨의 부모들은 딸에게 그 청년을 단념하라고 건강 때문에 결혼생활을 할 수도 없고, 아마도 얼마 살지 못하고 결혼 전에 죽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에게 가장 기쁜 영혼의 사랑을 준 사람인데 내가 그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해서 멀리 버지니아에 살고 있었던 그 아가씨는 뉴멕시코 요양원으로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원장의 서기 일을 보면서 그 월급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치료비를 대면서 지극한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병이 점점 더 악화되어 이제 일주일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급하게 그곳에서 일하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죽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때 목사가 물었습니다. “이제 일주일 안에 죽을 것 같은데 왜 이 사람을 놓고 결혼식을 올리게 해달라고 하느냐?” 그랬더니 “이제 그가 죽으면 그의 흔적을 내 몸과 마음에 남기고 싶은데 그의 성을 내가 따르게 될 테니까 내가 그 흔적인 그의 성을 내 이름으로 가지고 평생을 살고 싶다. 그래서 내가 빨리 결혼하고 싶다.” 미국에서는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야 됩니다. 그래서 그 목사도 할 수 없이 급하게 결혼식을 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정대로 며칠 있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에서 그의 아내가 직접 조가를 불렀습니다. “내가 요양원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그는 일주일 살았던 자기 남편과 사랑을 나누던 그 요양원을 떠나지 아니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90세가 이르도록 그곳의 책임자가 되어서 그곳을 찾아오는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의 헌신을 하면서 평생 살았습니다. 우리나라 한경직 목사님도 미국에 계실 때 그 요양원에 가서 그분의 사랑의 간호를 2년 동안이나 받으신 바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이 젊은 청년과 같이 젊은 나이에, 30대 초반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시면서 까지 나를 사랑하셨는가? 오늘 우리 성찬은 그런 마음의 믿음의 기초를 가지고 받으심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영원히 주님이 내 몸과 마음에 흔적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거룩한 예식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이 말씀하여 주신 이것을 향하여 나를 기념하라. 말씀대로 행하고자 합니다.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주의 흔적이 남아서 영원토록 주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기쁨과 거룩함이 주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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