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 문화선교

선지예술학교

절기말씀

[개천절]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 64:8-12)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마른곰
댓글 0건 조회 625회 작성일 19-10-02 06:48

본문

본문/ 사 64:8-12
제목/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지독하게 공부하지 않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아들 옆에서 날밤을 새기도 했고, 비싼 돈 들여 그 유명한 족집게 과외도 시켜봤지만 아들의 성적은 자꾸 떨어지기만 했습니다. 속이 상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너 이 자식! 이번에도 성적 떨어지면 아예 가족의 연을 끊자. 이번에도 성적 떨어지면 그땐 내 아들이 아닌 줄 알아. 알았어?”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긴장해서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드디어 성적표를 받는 여름방학 날이 돌아왔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과 마주친 아버지는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야, 너 성적 어떻게 됐어?” 그러자 아들은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아저씨, 누구세요?” 성질난다고 자식을 연을 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저는 사도신경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사도적 전승을 통해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단은 이 사도적 전승을 무시하고 직통계시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계시는 신구약 66권 성경으로 완결되었습니다. 따라서 직통계시를 주장하면 이단입니다. 교회는 전승적으로 이어져야 하고, 성경도 성령의 감화 안에서 전승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성경은 수천 년이 흘러도 그 내용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해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전승이 중요한 것입니다. 2천년 전 성경을 어떻게 해석했으며, 2천년 동안 어떻게 해석되어 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단의 교주들은 자기만이 새로운 복음의 비밀을 발견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지금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 유추하여 해석해서는 안되고, 전승적 신앙으로 돌아가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말하는 궤변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멋대로 뜯어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라’는 원칙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전승의 빛으로 성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성삼위의 초대로 시작되고, 성삼위에 대한 고백을 드리고, 찬양을 드리며, 성삼위의 이름으로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세례를 받을 때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진수이며 기초입니다. 기독교에서 삼위일체를 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네모난 삼각형과 같은 이론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없지만 믿으면 이해되는 것이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사도신경은 성부 하나님에 대하여 세 가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째 전능하신 하나님, 둘째 창조주 하나님, 셋째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지난 두 주 동안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란 ‘신이 유일하다’는 것을 믿는 ‘유일신 종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계시자’로 믿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신 4:39절에서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의 첫째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을 유일한 계시자로 믿는 종교입니다. 행 4:12절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계시자가 있다고 믿으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유일한 계시자라고 믿는 사람만이 참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유일한 계시자인 예수님을 제외한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존재에 대한 증명처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의 전설 가운데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갑니다. 가다가 아들을 내려놓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당신이 어떻게 내 아버지요?” “네 어미와 내가 너를 먹여주지 않았느냐.” “먹여준다고 다 아버진가요?” “내가 널 업어주지 않느냐.” “업어주면 아버진가요?” 아버지는 말문이 막힙니다. 무엇으로 자신의 아버지됨을 증명한단 말입니까? 존재의 증명은 이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확고히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 53:1절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가 어리석은 자입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지식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무도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를 가리켜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죄많은 사람이 ‘하나님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도덕한 사람은 ‘하나님은 안계시다’라고 생각합니다.

 

  ‘죄인’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받을 죄인이요, 다른 하나는 구원받지 못할 죄인입니다. 내가 죽는 줄 알고 늘 죄를 뉘우치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내가 왜 죄인인가?’하고 목이 뻣뻣한 죄인이 있습니다. 목이 곧은 이런 죄인은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해야 기를 펴고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 무신론자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불신론자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철학적 논증이 많습니다. 첫째가 인과율에 의한 증명입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니 원인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것은 부모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결과의 제일 원인이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존재론적 증명으로 어떤 존재보다도 더 완전한 존재자, 즉 가장 완전한 존재자가 하나님이라는 이론입니다. 셋째, 목적론적인 증명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각기 그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을 만물에 부여한 분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입니다. 넷째는, 도덕론적 증명으로 도덕의 근본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우주론적 증명으로 인간에게는 신에 대한 동경이 있는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동경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같은 철학적 증명을 통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노력은 첫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논리로 구체화하는 것으로 우상화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둘째, 무한한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의 사고와 논리로 제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우리 인간의 사고의 틀 안에 존재하는 왜곡된 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셋째, 증명이 가능하다고 해도 증명된 신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문제는 신앙의 문제이며, 결단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아멘. 하나님이 존재하신 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신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2. 둘째, 유일신 하나님은 인간이 만날 수 없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첫째, ‘아버지’의 개념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개인적인 의미의 아버지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이 아버지는 아주 높고 크신 하나님이라 결코 우리 인간이 만날 수가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구별되신 하나님, 우리로서는 뵈올 수 없는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 초월하신 하나님으로 표현됩니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2) 둘째, 절대적 권위자의 개념입니다.


  렘 18:1절 이하에 토기장이의 비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의 집에 가보니, 토기장이가 흙을 주물러 그릇을 만들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깨뜨려버리고 다시 만들기를 수없이 반복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18:6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역사를 마음대로 주관하십니다. 당신께서 뜻하신 바대로, 당신의 의도대로 하십니다. 크게도 만드시고 작게도 만드시고, 높게도 만드시고 낮게도 만드십니다. 우리는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입니다.

 

  3) 셋째, 불가항력적인 능력의 하나님 개념입니다.


  욥 38, 39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주관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며, 불가항력적인 능력을 행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4) 넷째, 진노의 하나님 개념입니다.

 

  인간이 죄지을 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홍수와 지진과 유황불로 심판하십니다. 범죄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고 그 자리에 사해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하여 두려움을 품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쓰기는 ‘야훼’라고 쓰고 읽기는 ‘아도나이’ 곧 ‘주’라고  읽었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불렀다가 벌을 받지 않을까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피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개념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크고 두려운 분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입니다. 벌을 내리시는 진노의 하나님입니다.

 

3. 셋째, 그러나 그 유일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다함께 본문 8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아멘.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89:26절은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사 63:16절은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여성신학자들은 하나님은 남성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성경에서 ‘하나님 아버지’라는 남성적 표현을 전부 중성형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원의 졸업논문을 쓸 때, 남성우월주의적인 언어를 다 양성평등적 언어로 수정해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용어도 ‘하나님 아버지’ 같은 남성성을 표현한 모든 표현은 다시 다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해줍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조명해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 개념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첫째, 아버지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의 목표입니다. 존재의 본질입니다. 가치판단에 가장 근본적인 기준이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온세계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부성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악의 세력을 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입니다.

 

  2) 둘째,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말씀하시면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요 20:17)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고, 단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기도를 하면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좋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는 ‘엄마’, ‘아빠’라고 부릅니다. 그러다 조금 크면 ‘아빠’가 변해서 이제 ‘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좀 더 크면 ‘아버님’이 됩니다. 그러나 ‘아버님’이라고 할 때에는 이미 사이가 멀어진 것입니다. ‘아빠’ 할 때가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 때가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즉 신앙이 좋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지런히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3) 셋째, 아버지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기쁨으로 맞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맞아주시면서 잘못을 묻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유산상속을 미리 해달라고 할 때 이미 그 돈을 허랑방탕하게 쓸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된 요구를 다 들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입니다. 그까짓 재산 다 축내도 좋으니 부디 사람이 되어서 돌아와만 다오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마침내 아들이 재산을 다 허비하고 거지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 때도 아버지는 한마디도 말없이 맞아 주었습니다. 여기에 ‘부모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부모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합니다. “그래 이놈아, 혼자 나가 흥청망청 살아보니 어떻더냐?” “그 많은 돈을 다 날리고 꼴좋다.” “큰소리치고 나가더니 겨우 그 꼴이냐? 빈대도 낮짝이 있다는데 무슨 염치로 돌아왔느냐?” 책망과 잔소리로 낮을 못 들게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됨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입니다. 용서에는 잔소리가 없고 설교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