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 문화선교

선지예술학교

절기말씀

루터의 종교개혁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마른곰
댓글 0건 조회 762회 작성일 19-10-26 23:55

본문

2019.10/27. 제목 : 루터의 종교개혁

교독문: 104. 종교개혁주일. 성경말씀 : 마 21:12-17. 찬송가: 585.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오늘은 502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마르틴 루터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이며, 이단경계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 년 동안 52주일을 지킵니다. 어느 주일이 더 중하고 어느 주일은 덜 중한 일은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절기주일을 맞이하게 되면 특별한 정성을 들여서 의상을 갖추고 또 헌금을 드리면서 행사를 위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10월 마지막 주일에 세계만방 교회가 기념하고 또 지키는 종교개혁 주일이야말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종교개혁 주일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교회의 정체성과 권위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본질로 회복시킨 일에 대하여 기념하는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이란 독일의 한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Wittenberg) 성당 대문에 로마 가톨릭의 부패에 관해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함으로 인 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그 중에도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면죄부(免罪符)라고 하는 속죄표(贖罪標) 판매행위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16세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회복하는 뜻 깊은 세대였고 교회 역사의 관점에서는 기독교로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던 2017년 한국교회에서는 대대적인 ‘종교개혁’과 관련된 행사들이 열었지만, 그 이후 한국교회의 모습을 돌아보면 ‘개혁’이 아니라 ‘퇴보’와 ‘변질’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그 결과는 이단들이 창궐하는 것이지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종교개혁자 루터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 의식을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1. 종교개혁주일이란 무엇입니까?

종교개혁(宗敎改革)주일이란 지금으로부터 502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루터에 의해 로마가톨릭교를 총체적으로 잘못된 사실을 지적한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즉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성당의 대문에다 로마가톨릭교의 부당한 일 95개 조항을 게시하면서 이에 대한 공개토론을 제기하였습니다. 당시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에는 매 금요일마다 신학자들이 모여 신학적 문제에 토의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1517년 10월 31일 정오경 젊은 수도사 루터는 또 한 사람의 수도사를 동반하고 비텐베르크 시의 대성당 정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건물은 대학 부속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고로 교수나 학생들의 게시판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거기에 도착한 루터는 인쇄소에서 가지고 온 라틴어로 쓰인 한 문서를 꺼내어 나무로 만든 문짝 위에 못질을 하여 달았습니다. 그 글 서문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밝히고 싶은 열망에서 문학사요 신학사이며 신부인 루터의 사회로 다음의 논제들이 비텐베르크에서 토의되겠습니다. 이 구술토의에 참석할 수 없는 분은 서신으로라도 의견을 전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바로 그 공개토론 내용의 문서가 저 유명한 95개 조항으로서 이 문서가 공개 된지 2주 만에 전 독일에 영성회복을 위한 신앙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약 4주 만에 전 유럽을 변화시키고 말았는데 그 중심 내용은,

속죄표(면죄부)는 사람의 죄를 속할 수 없고

속죄표(면죄부)는 죄의 벌을 면할 수 없고

속죄표(면죄부)는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을 구할 수 없고

믿음으로 회개한 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서 당시 로마 카톨릭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부패와 전통과 관습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노출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주일이란 오늘의 교회에서는 성탄절과 부활절 다음으로 매우 뜻 깊고 중요한 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교회사적인 면에서 약 일천년 동안에 걸쳐 내려온 중세의 영적 암흑시대가 막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부패한 로마가톨릭교교권 탄압으로부터 해방된 신앙의 사람들이 복음의 광명을 되찾고 자유를 회복한 이 날에 교황제도교회 의식면죄부복음에서 이탈된 일에 대하여 저항하기 위한 신학적 교리를 확립하는 날이었습니다.

2.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로마 가톨릭교의 상황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그 무서운 핍박을 마감하고 로마의 국교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황제도 이제는 신이 아니라 교인이요, 대신들도 교인이요, 평민들도 동등한 교인이 되었으며 예배당은 크게 건축되었고 기독교 문화도 활발하게 발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기독교 신앙에 위기가 도래하기 시작했으니 이는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 잡기 전 박해시대에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손에 손을 잡고 찬송을 부르던 그 영성이 점점 사라지고 교권과 외식과 세상의 물욕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교회가 제도화하고 권력화하면서 영적인 생명력은 메말라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현 상들이 중세시대로 접어들수록 심화되었는데 이러한 영적기아 상태에 대하여 반발심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수도원운동입니다. 그러나 영성을 강조하고 청빈과 고행과 복종의 삶을 실천하자는 이 운동이 너무 신비주의에 치우치다 보니 교권과 제도적으로 굳어 버린 교회를 비판만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비판은 또 하나의 악순환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만 교회의 직제와 질서까지 도 다 부정해 버리는 양상을 낳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있어서 질서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목사와 교우들 사이에도 질서가 있어야 하고 교우들 간에도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무질서한 교회는 추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바람직한 교회는 아무리 신비한 은혜를 많이 체험했더라도 영성과 질서가 올바르게 조화를 이루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임을 기억하십시오.

특히 중세 시대에 들어오면서 로마가톨릭교는 근본적인 복음에서 멀리 떠나 교황의 절대무오설과 성직자의 특권 그리고 교회전통 및 선행이 구원의 조건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아래서 교황 레오10세가 자기 당대의 사업으로서 백년이 넘게 진행된 거대한 베드로 대성당(ST. Peter's)의 완공을 이루고자 그 막대한 공사비 충당의 일환으로서 알베르트(Albert of Brandenburg. 1490-1545) 대주교와 물질적인 이권 거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교황과 알베르토 사이에서 나온 것이 바로 기상천외한 속죄표그 유명한 일명 면죄부” 판매인데 두 사람이 이 속죄표 판매를 위한 일에 의견일치를 하게 된 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알베르트 역시 모인츠의 대주교직을 사는데 소용된 빚을 갚아야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알베르트는 이 속죄표의 판매를 청부 맡아서 그 이익금을 교황과 반분하기로 하고 도미니크 출신의 수도사로서 웅변으로 유명한 테첼(Tetzel, Johann. 1450-1519)을 고용하여 신학박사의 학위를 주고는 가는 곳마다 면죄부에 대하여 웅변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테첼은 가는 곳마다 크게 외치기를 속죄표(면죄부)를 사면 살아있는 사람은 즉시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심지어 부모나 형제 또한 조상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었을 때는 연옥(煉獄)에 가 있는데 그러한 자를 위하여도 그 자녀나 가족들이 속죄표를 사기만 하면 그 돈 (은화)이 헌금함 속에 떨어져 소리가 땡 하는 소리가 나는 순간 지옥 대기실에서 곧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 (계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벧전 3: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그러자 이 유창한 웅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웅변에 미혹되어 너도나도 거금을 들여서 속죄표를 사게 되었는데 이는 속죄표를 사기만 하면 내 지은 죄가 사함을 받아 없어진다는 일종의 심리적 면죄부(免罪符)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비성경적이지요. 그 외에도 당시 그 성의 교회 안에는 화려한 금과 은 등의 그릇으로 꽉 차 있었는데 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성경에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행 3:6)라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은과 금이 많다”라고 하면서 교만한 소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캠피스는 말하기를 "로마가톨릭은 은과 금은 많지만 예수의 이름이 없다”고 하면서 맞서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교회의 타락을 말해 주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성직을 돈을 받고 팔았기 때문에 당시에 신부들 중에는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이는 돈으로 대주교직을 샀으나 죽어서야 성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교회의 타락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상(聖像)숭배 행위도 공공연하게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성자들을 숭배하고 유물숭배를 하는 것을 말하는데 가령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뽑아 왔다는 볏 집,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에서 짤라왔다는 나무 조각, 성자의 엄지손가락,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 면류관,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등과 같은 유물을 숭배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을 소지하면 병도 고침 받고 은혜도 것이야말로 얼마나 미신적인 일입니까?(부적?)

● (유 1: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루터가 종교 개혁자로서 일할 수 있도록 루터를 일깨운 말씀은 로마서 1장17절이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루터는 이 성경을 로마여행 중에 깨달았는데 1510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수도사들의 순례여행 코스 중에 하나가 성 계단 성당(Scala Santa) 내부에 "빌라도의 계단, 또는 거룩한 계단"이라는 이름의 28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그 계단에는 유리 조각을 깔아 놓고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가 무릎으로 내려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왜 무릎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겁니까? 그렇게 함으로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시하고 구원받고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그릇된 고행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돌계단은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러 밟고 올라가신 계단으로서 죄인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수치와 모욕과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다고 여겨 그 계단을 로마로 옮겨와 그대로 축조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예배당을 지어 보존해 오고 있는 것으로서 지금도 수많은 순례객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지한 행동의 소산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루터도 로마를 방문하여 스칼라 산타 28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고통스런 고행을 체험하고 있는데 갑자기 로마서 1장17절 성경이 떠오르면서 자신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이렇게 고행을 하고 자기 노력으로 의인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 않는가?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는 벌떡 일어나서 그 계단을 뛰어 내려왔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515년 11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던 중 이 구절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기록하기를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만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는 그런 의미인 줄로 생각하였다. 나는 주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의(예수복음)를 의미하는 것이요 또 우리가 그 의를 믿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복음! 곧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의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한다. 내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으며 천국 문이 내 앞에 활짝 열려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이 진리를 비텐베르크 어거스틴 수도원 탑 안에서 깨닫게 되었음으로 후세 사람들 은 이것을 가리켜 "탑의 경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루터는 이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교황청에서 시키는 대로 법령과 전통에 매여 그것들이 제일 옳은 줄 알고 그것들을 지키려고 애썼으며 내가 멸망 받게 되는 것은 이 육체 때문 이라고 생각해서 내 몸을 괴롭게 하고 학대하고 증오하였다고 루터가 1531년 쓴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도록 하였던 것은 능력의 말씀이 바로 로마서 1장17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의 빛이 로마의 루터를 살리고 독일과 유럽과 세계를 살리고 은총의 세계로 인도하였으며 행함으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천년이 넘는 로마가톨릭교의 이단 사상에서 모든 영혼을 해방시킨 자유의 복음이었습니다.

0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신 5: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종교 개혁의 영성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엄숙과 경건은 다릅니다. 유머와 거짓은 다릅니다. 자유와 방종은 다릅니다. 진리와 진실은 다릅니다. 사랑과 정은 다릅니다.

성경의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내 방식과 지각을 사용하는 것과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하시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말하는 진실은 보이는 것만 주장하는 비판과 판단과 정죄가 이어지는 심판으로 차갑지만 진리는 희생과 용서와 감사가 있는 사랑이라 따뜻합니다. 개혁주의 지금도 필요합니다. 주님 오실 그날 까지 우린 기경되어야 합니다.

개혁 우리는 늘 자신이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갈 6: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마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고전 8: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벧전 2: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