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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감사하는 방법/골로새서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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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른곰
댓글 0건 조회 528회 작성일 19-11-09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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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방법 -골로새서 3:15-17

1. '감사하라'고 명령한 이유

감사의 내용이 먼저 있고 따라서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사가 나오면 될텐데 왜 성경의 여기저기에서는 감사를 명령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감동될 때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고 예배에도 참석해야 그것이 진정한 기도요, 찬송이요, 예배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마음에 감동도 없이 신앙적 행위를 한다는 것은 위선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하나 주의 해야될 것이 있다. 우리의 영이 육체와 함께 사는 동안에는 아무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하여도 우리의 육체가 가져다 주는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100%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바울 사도의 고백과 같이 나의 거듭난 속사람이 원하지 않는 일을 나의 육체에 근거한 생각이(뇌 세포의 활동이) 조장한다. 사단은 바로 그것을 이용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추구하는 하나님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한다.

사단의 전략은 매우 다양하다. 세상의 여러 권력을 통해서 위협하기도 하고, 주변의 친 인척을 통해 괴롭힘을 당하기도하고, 사회에서 '왕따' 당하게도 하고...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이런종류의 공격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오히려 기독인들의 결단을 부추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공격들은 굉장히 초보적이고 단순하기만 하다. 보다 고차원적인 전략은 바로 우회전술이다. 신앙인을 가장하고 우리에게 그럴싸한 신앙적 이론으로 다가서면서 회유하는 전략이 무서운 전략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위선자 전략'이다. 사단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파고 든다. 과거의 부끄러운 죄가 있었던 사람에게는 자꾸 그 기억을 떠올리도록 하고 완전하지 못한 우리의 삶을 파헤치며 '네가 어떤 놈인데...'하면서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래도 잘 안 먹히는 자에게 사용하는 것이 '자발성 이론' 전술이다. 신앙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낙담 될 때가 있고 지칠 때가 있다. 오래동안 교회를 출석하다보면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신앙 생활이 사라지고 신앙 생활이 하나의 문화와 습관의 관성으로 진행되는 때가 있다. 바로 이때를 틈타 사단의 가장 고차원적이고도 효과적인 '자발성 이론' 전술을 펼친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음속에 진정한 신앙이 없이 그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올바른 신앙적 태도는 없이 율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한 선지자의 글들을 예로 들면서 마음 없이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위선'이요 '죄악'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일단 진정한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모든 신앙적 활동을 그치라고 제시한다. 신앙 생활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폭력적인 박해는 평소 좀 거칠고 모난 성격의 소유자들을 통해서나 부도덕한 권력집단을 통해 시행 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이러한 '자발성 이론'으로 충고와 제안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위의 성격 좋고 인간성 좋은 인생의 선배들로부터 나온다. 함께 신앙 생활을 하진 않지만 마음씨 좋게 협조해 주던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오기도 한다. 또 때로는 교회를 오래 다녀서 꽤 신실한 크리스챤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기도 한다. 아니면 내 마음 속에서부터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기에 이러한 유혹은 거절하기도 쉽지않고 또 때로는 자신의 신앙 양심에 비추어 볼 때 흑백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애매한 회색지대를 만들어 주기도 하는 고차원적인 사단의 전략이다. 이 말은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주위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사탄'이라는 게 아니라 단지 통로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마치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는 일을 방해하는 이을 했던 것 처럼 말이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올때까지 기다리라고하는 것은 분명한 사단의 전략이다. 오히려 굉장히 기도하기 싫고, 찬양도 하기 싫고, 기도회도 가기 싫은 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때라는 것을 생각하며 경건의 훈련에 임하는 자세로 우리의 몸을 복종 시켜야 하는 것이다. 혹시 마음에 그러한 생각이 들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라는 것을 상기하며 오히려 그분의 은혜주심을 기대하라!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챤에게 '감사'를 명령하신 것이다. '감사'하는 생활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자 기독인으로서 지켜야할 의무사항이다(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다시말하면 마음이 없을 때 신앙적 행위를 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위선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떻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따라서 '감사'는 사망에서 자유케 되고 참 생명을 맛보게 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께 대한 마음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감사'는 그러한 구원의 역사를 잊지 않게 만들고 우리의 신앙 생활이 역동적으로 유지되도록 하는 수단(방법)도 되는 것이다. 마치 자동차 엔진에 연료가 들어가 불이 탈때는 엔진을 움직이고 그 힘으로 차를 움직이고 밧데리를 충전 시키지만 정지되어 있는 엔진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밧데리의 전력을 이용해 시동모터를 돌리고 강제로 엔진을 회전 시키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게다가 밧데리 마저 다 소모가 되어서 제 기능을 발휘 하지 못하면 밀어서라도 엔진을 회전 시켜야 시동이 걸린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감정과 외부로 드러나는 감사의 표현은 이러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불이 붙어 신앙생활 할 때는 그 힘으로 움직이고 감사한 생활을 하지만 그 불이 꺼졌을 때는 마치 밧데리로, 또는 강제로 밀어야 엔진이 돌아가고 연료가 공급되어 불이 붙듯이 때로는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사와 기쁨과 기도의 생활을 할 때 다시 불이 붙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감사를 고백하고 찬양하는 행위와 감사의 내용 자체와는 상호 밀접한 연관이 있다. 때로는 답답하여 기도도 하기도 싫고 찬양하기도 싫지만 마음을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어 감사의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사단의 생각은 해 보기도 전에 '그래도 안돼, 별수 없어'의 생각을 집어 넣지만 믿음으로 '감사하라'는 명령을 실천할 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은혜가 새록새록 생각 나는 것이다. 감사의 마음이 없는데 감사를 해야만 되는 것은 동기가 불순한 수사관의 '강요에 의한 자백'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혐의를 벗지 못하는 사람에게 정확한 사실을 짚어주고 확인 시키는 것은 '강요된 자백'이 아니라 '사실의 확인'이다. 감사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마음속에서 우러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입을 벌려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하는 것을 통해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펼치신 구원의 역사를 확인시켜 준다.

예화 : 감사 어느 교회의 목사님 사모는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고 입을 굳게 다물고 미음도 입에 대지 않았다. 한창 나이에 이 지경이 된것은 개척 교회 시절의 극심했던 고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서, 남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히 남편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싹터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감리교 신학대학의 고 윤성범 학장님을 만났다.󰡒목사님, 얼굴이 어둡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목사님은 형편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학장님이 제안을 했다. 󰡒노트를 한권 사다가 아내에게 주세요. 그 노트에 감사할 일만 생각나는 대로 적으라고 해보세요.󰡓 목사님은 즉시 노트와 볼펜을 사들고 아내에게 갔다. 󰡒이 마당에 무슨 감사할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사모가 한두 줄씩이나마 노트에 감사할 일을 써내려간 것은 목사님이 방을 나서고 난 후에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주 평범하고 작은 일부터 적어 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찾아 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러자 점점 통증은 사라지고, 다리에는 웬일인지 힘이 생겼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깜짝 놀랐다. 암세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나 자신의 활기찬 생활을 위해서, 타인에게 기쁨을 선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복된 손길을 맞잡기 위해서 범사에 감사하라.

2. 감사를 표현하는 수단(방법)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가?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명상에 잠겨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이면 되는가? 여러분은 누군가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그저 상대방이 나의 이 마음을 알아 줄 것을 기다리면서 가만히 감사하는 마음만 되뇌이고 있으면 여러분의 마음이 편한가? 상대방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를 떠나서 가만히 앉아 있자니 도대체 성에 차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나의 이 감사한 마음을 상대에게 표현하고 상대로 부터도 나의 감사를 받아 들인다는 의사를 확인하고픈게 인간의 심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들과는 달리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사한 마음을 받으시지만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를 위해서, 또 앞에서 언급한대로 '감사함'의 교육적인 기능을 위해 '감사'할 것을 명령하심과 아울러 구체적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성경 곳곳에서 가르쳐 주고 계신다.

우리 사회에서는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선물 전달'이라는 수단을 이용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전달하기 편리하고 받는 사람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주기 위해서 '돈'이 물건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그러나 이 '돈'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문제는 이게 감사의 표현이냐 아니면 뇌물이냐를 놓고 씨름을 한다. 정치인들도 기업으로 받은 돈에 대해 '정치후원금'이냐 청탁을 위한 '뇌물'이냐를 놓고 법과 여론 사이에서 씨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개의 경우 권력을 잡으면 '후원금'이 되고 권력을 잡지 못하면 '뇌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은 그 반대일텐데..... 이런 문화가 교회안에까지 파고 들어와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일도 '돈'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고 은근히(때로는 아예 직접적으로) 부추키는 경우도 있다. 물론 '돈'도 감사를 표현하는 중요하고 요긴하고 편리한 방법이요 수단이지만 '감사'를 표현하는 유일하고 전적인 방법이 아니다. 가뜩이나 돈 없어 힘들고 어렵고 서러운 경우까지 있는데 하나님께 '감사'마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가.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15절에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저렇게.... 해서 감사하고(17절) .....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4:2)고 구체적으로 '감사의 표현'을 어떻게 해야되는 지를 설명해 주셨다.

1.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1-1. '말씀을 마음에 담는 행위'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감사함을 나타내는 첫 번째 행위로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하신다. 그분의 말씀이 내안에 풍성히 거한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말씀을 소유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여러 유익이 있겠지만, 그 이전에 '말씀을 풍성히 거하게 하는 행위'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나에게 은혜를 베푼 은인에 대한 감사는 먼저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하는 말은 전혀 귀담아 듣지 않고 딴청 부려놓고서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 '조금이나마 보답이 될지..'하며 선물을 한다면 상대방이 기뻐하겠는가? 오히려 나를 뭘로 보고 이러냐고 기분 나빠할 것이다. 신중히 듣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 어떤 물질적 표현보다도 상대방을 더욱 기쁘게 하는 것이다. 나도 해놓고 잊어버린 말을 상대방이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고마워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흐뭇하고 기쁜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기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자. 그 노력으로 내가 얼마나 엄청난 신학적인 지식을 쌓고, 얼마나 많은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얼마나 탁월한 성경 교사가 되는 가 하는 것은 둘째다. 그러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에 따라 다르다. 어느정도의 지식을 소유했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내 마음에 풍성히 담아 놓겠다고 하는 마음과 행동, 그 자체가 감사의 표현이다.

1-2. 풍성히 거하는 말씀의 효과

1-2-1. 기독교적 세계관 말씀을 내 안데 담아 놓으려는 행위 그 자체가 감사함을 표현하는 방법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풍성히 담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올바른 감사를 표현하는 출발이자 가장 기초가 되는 작업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어떻게 그분이 기뻐하는 감사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합당한 감사의 표현을 위해서는 먼저 그분을 알아야 하고, 그분을 알기 위해선 먼저 그분의 말씀을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씀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가 아닌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따라서 '풍성히 거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양적인 차원에서 많이 아는 것이 필요하고, 질적인 면에서 올바로 깨닫는 것이 필요는 말씀이다.

신앙인 중 정말 위험한 경우는 열심만 있고 말씀이 없는 경우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무지한 자의 열심을 기쁘게 보시긴 하겠지만 지식없는 열정은 너무나 많은 것을 허비하도록 만든다.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열정은 많은 시행착오를 가져오게 되고 정작 힘쓰고 열정이 필요한 때와 장소에서는 지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남들 가는대로 따라가서 수 많은 깃발과 구호 속에 주먹 불끈쥐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외쳐 대지만 정작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될지,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감사를 표현하는 것인지를 몰라서 무얼 해야 될지 모르는 크리스챤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러다 보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인은 신앙인인데 다변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기독인의 윤리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모르고 남들 하는대로 따라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결과만 초래하게 된다. 그 말씀이 '모든 지혜의 근본'이 된다. 이 말씀을 마음속에 풍성히 담은 자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가 되어 남을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다. 이것은 꼭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모든 크리스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온전하고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서(롬12장) 각자가 몸담은 세계(전문 분야, 직장, 가정, 학교...)에 필요한 '기독인의 윤리'를 세우고 '감사하는 자의 행동 지침'을 연구해야 될텐데 그저 '감사하자!'고 외쳐만 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본다.

이를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도록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 한 구절을 들어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내 마음속에 녹아 풀어져서 하나의 삶의 철학이 되어야 하고 기독교적인 가치관, 세계관이 형성되어야 한다. 자신의 전문 분야와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관점(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저 시키는대로 딱지 갖다 부치는 집달리 차원의 기계적인 삶이 아니라 마치 헌법 재판소의 판사처럼, 대법원의 대 법관 처럼 총체적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법에 저촉되는 여부가 없는지를 분석 판단하는 여유와 권위를 갖고 살아야 된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수많은 회색지대가 있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상황윤리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토론앞에(예: 낙태, 안락사, 동성연애, 결혼과 성...) 속수 무책이 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법칙만이 변함없은 원칙이라는 것을 선포할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과거에 제한되어 효력을 나타내는 굳어져 있는 구 시대의 도덕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이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어찌 생생한 감사의 표현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한다면 이 시대에도 유효한 가르침과 권면이 계속 될 수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지금 이시대에도 꼭 필요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생활이 이어지게 된다. 이것은 생각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기독인으로서 어디에 우선권을 두는가? '풍성한 말씀'이 없이는 그럭저럭 지내는 종교인은 될지 몰라도 결코 감사가 우러나오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크리스챤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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