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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생명 되신 예수님 (요 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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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른곰
댓글 0건 조회 804회 작성일 18-03-31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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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생명 되신 예수님 (요 11:17-27)

 

  오늘은 부활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부활절이 의미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망을 줍니까? 죽어도 다시 산다 하는 소망을 줍니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결혼을 잘 해서 행복하게 살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학자가 되어 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아예 공부 안 하고 아프리카에 가서 사냥하며 살겠다고 합니다. 어쨌든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은 큰 희망이요 인류 최대의 축복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은 마르다입니다. 그 여동생(또는 언니)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오빠(남동생)가 있었는데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이들은 베다니에 살았습니다. 여리고와 예루살렘 사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3남매는 신앙이 좋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썼던 것 같아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는 자주 이 집에 들러서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제자들 12명도 따라오고, 섬기는 여자들도 따라오고, 또 그 외에도 늘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대부대가 이동하는 겁니다. 적어도 한 30~50명 또는 그 이상이 함께 움직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나사로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청하여 식사 대접하고 주무시게 했습니다. 이처럼 나사로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또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였습니다(요 11:11).

  그런데 그만 이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유대 지역으로 향하였습니다. 갈릴리 지역으로 가시다가 유턴하신 겁니다. 그런데 베다니로 가는 도중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 예수님이 도착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마르다가 동네 어귀까지 쫓아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한 첫 마디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는 것입니다(21절). 이 말은 예수님께 대한 원망을 담고 있습니다. “왜 이제야 오십니까? 일찍 오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터인데 ...”라는 말입니다. “소식을 받고서 진작 오셨더라면 제 오빠가 살았을 터인데, 꾸물대다가 이렇게 늦게 오시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제 오빠는 죽어서 이미 장사지내었고 나흘이 지났습니다.”
  마르다의 이 말은, 사람은 죽고 나면 소용없다, 죽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사람이 죽기 전에 약을 쓰든, 수술을 하든, 기도를 하든 해야지 죽고 나면 끝입니다. 천하의 명의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도 소용없습니다. 마르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좀 더 일찍 오시지 왜 이렇게 늦게 오십니까? 이렇게 늦게 오시면 안 오신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여러분, 진리는 간단합니다. 길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신앙이 없으면 말이 많아지고 이론이 많아지고 신학이 복잡해집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으면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마지막 날’은 종말 때 곧 세상 역사가 끝날 때를 말합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다 살아난다는 것을 말다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부활 때에는 나사로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다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리적 믿음입니다. 그냥 배운 바 교리를 알고 있는 것이지 정말로 마음에 딱 믿은 것은 아닙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사도신경 고백하듯이 믿는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입으로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리적 믿음, 관습적 믿음입니다.
   지금 마르다가 그렇습니다. 그냥 머릿속에 하나의 신앙교리로 믿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오라비도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오빠가 죽었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 왜 늦게 오셨습니까? 주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요즘 아이들 말로 하자면 “예수님, 미워요. 미워, 진짜 미워.”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정색을 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예수님이 곧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을 저 멀리 있는 교리에서 찾지 말라. 머릿속에서만 찾지 말라.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지금 마르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니”라고 하십니다. 꼭 마지막 날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당장이라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활과 생명이라는 것이 꼭 마지막 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에 얽매이고 교리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믿는 데에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26절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 사람 안에 ‘영생’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영생은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낙원(천국)에 가서 영생을 누리고 또 마지막 날에는 몸이 다시 살아나서 몸과 영혼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 안에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요한일서 5:11-12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자 마르다가 깜짝 놀라서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 한 대 맞은 기분입니다. 마르다의 불신앙적 태도가 들켜서 예수님께 한 대 얻어맞은 기분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한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립니다. 좋은 말로 해서는 잘 안 듣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큰 소리로 야단을 한 번 쳐야 정신을 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르다도 한 대 맞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빨리 오시지 않고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죽고 나서 오시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렇게 불평과 원망을 하다가 예수님께 한 대 맞고는 화들짝 정신이 들어서 말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나이다.”(27절) 
  이것은 자기변호입니다. “주님, 제가 믿음 없는 여자로 보이십니까? 저는 이래도 주님을 잘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모범 답안입니다. 요즘 학생들이 시험 치면 모범 답안을 달달 외워서 쓰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범 답안은 처음에 베드로가 만든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 이것은 100점짜리 신앙고백입니다. 마르다가 이 모범 답안을 듣고서 외워 두었다가 자기 말로 조금 바꿔서 고백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도 훌륭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면 마르다는 올바른 부활 신앙을 가졌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뒤에 39절에 보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려고 무덤 앞에 섰습니다. 유대인들은 대개 바위를 파서 동굴 속에 시신을 천으로 싸서 넣어 놓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 동굴 앞에는 큰 돌을 갖다 놓습니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못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간혹 사람들 중에도 시신 도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덤 동굴 앞에 큰 돌을 굴려서 입구를 막아 놓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덤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일꾼 몇 명이 달라붙어야 합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여러분, 시체가 썩으면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단백질 썩는 냄새가 납니다. 특히 삼겹살 많이 먹고 치킨 많이 먹은 사람의 시신이 썩을 때에는 고약한 단백질 냄새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채식만 해도 시신이 썩을 때는 고약한 냄새가 날 것입니다. 지금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났으니 시신이 썩기 시작합니다.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지금 무덤의 돌을 옮겨놓으면 동굴 안에 갇혀 있던 냄새가 밖으로 확 나올 터인데, “왜 쓸 데 없는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죽어서 썩고 있는데 왜 쓸 데 없는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하는 말입니다. 마르다의 이 말에는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27절에서 마르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거짓 고백, 헛고백이었을까요? 여기에 번역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원문(페피스튜카)에 의하면 “내가 믿나이다”가 아니라 “내가 믿었나이다.”입니다. 완료입니다. 영어로 하면 “I have believed.”가 됩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들도 거의 다 현재로 잘못 번역하고 있습니다(KJV, NKJV, RSV, NRSV, NIV, ESV 등). NASB만 바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루터역도 현재로 잘못 번역했으며 중국어, 러시아 성경도 다 현재로 잘못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1637년에 화란에서 나온 화란국역은 현재완료로 바로 번역했습니다(ik heb geloofd). 1951년에 나온 새 번역(NBG)도 바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바른성경,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 개정판 등 다 잘못 번역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완료’(perfect)는 영어의 완료와 비슷하지만 좀 다릅니다. 헬라어의 완료는 “전에 믿었다. 그래서 그 믿음의 결과 또는 영향이 지금 어떤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 저는 이미 전에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결과로 믿고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마르다의 이 고백은 여전히 교리적 신앙, 관습적 신앙입니다. 전부터 그렇게 믿고 외우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험 치면 100점 맞는 신앙이지만, 실제로는 안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주일학교 다닐 때부터 들어서 달달 외우고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실제 문제에 부딪히면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무덤 앞에 도달해서 “돌을 치우라”고 하셨는데도, 마르다는 여전히 그의 불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헛수고를 하십니까? 벌써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짜증이 좀 났을 것입니다. 몇 번 말해도 못 알아듣고 안 믿으니 말이죠.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40절) 좀 역정을 내시는 말씀입니다. “제발 불평하지 말고 믿어라. 믿으면 네 오라비가 살아날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덤 안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저 동굴 안에서 죽은 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습니다. 보니까 손과 발은 베로 동인 채로 나왔습니다. 천으로 둘둘 만 채로 나왔습니다.  머리는 수건에 싸인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마르다는 그 순간 아마 기절초풍했을 것입니다. “어머나, 이게 웬일이냐? 꿈이냐 생시냐? 오빠 맞아?” 그러자 나사로는 아마도 “무슨 소리야? 오빠도 몰라보다니 ... 아니, 며칠 됐다고 오빠도 몰라보냐?”라고 했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또 야단맞았습니다. 마르다는 오늘 계속 야단맞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연거푸 두 번 야단맞고, 오빠에게서 또 야단맞았습니다. 그래도 마르다는 이 날이 생애 최고로 기쁜 날이었답니다. 왜냐하면 죽었던 오빠가 살아났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또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부활의 주님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르다처럼 그저 교리적 믿음, 이론적 믿음만 가지고 계십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실제 생활 속에서는 불평과 원망이 가득합니까? 예수님 앞에서도 여전히 하면서 원망하고 있습니까? 무덤 앞에서도 “벌써 냄새가 납니다.”고 하면서 원망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교리적 믿음이 아니라, 이론적 믿음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에게 부활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요 생명임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나 죽으나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이 되시고 생명이 되심을 굳게 믿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비록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더라도 예수님은 다시 살리시고 걸어 다니게 하실 줄을 믿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험하고 악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실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고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마르다처럼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오직 부활과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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