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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고난주일]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누가복음 23장 26-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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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93회 작성일 18-03-2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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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누가복음 23 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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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 주일이고,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이 때쯤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두 단어가 생각이 납니다. 하나는, ‘가상칠언(架上七言, The Seven Last Words of Christ)’입니다. 주보 묵상 란에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남기신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을 묵상하는 것으로 고난 주간을 보내시면 좋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단어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고난의 길 혹은 슬픔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Golgotha, 해골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라틴어로는 Calvary) 언덕까지 걸어가신 길을 부르는 말입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지금의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으며, 성지 순례객들이 걸어보는 필수 코스이기도 합니다.

 

이 길의 길이는 약 1.5km 짧은 거리가 아닙니다. 폭은 2m 정도의 좁은 길입니다. 비아돌로로사는 예수님이 채찍을 맞은 곳에 세워진 채찍교회에서 시작 됩니다. 이 채찍 교회는 빌라도의 집무실이 있던 곳에 세워 졌는데, 지금은 알 오말리알 대학(Al-Omariyel-College)’이라는 아랍 학교의 교정이라고 합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총 14개의 장소(Station)로 되어 있는데, 빌라도 법정, 선고교회, 채찍교회, 첫 번째 넘어진 곳,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곳,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간 곳, 베로니카를 만난 곳, 두 번째 넘어진 곳,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한 곳, 세 번째 넘어진 곳, 십자가가에 못 박히기 위해 옷을 벗긴 곳, 형틀에 못 박힌 곳, 운명한 곳, 아리마데 요셉이 시체를 내린 곳, 예수님 무덤입니다. 아마 이 길을 걷는 사람치고,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라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할 겁니다.

 

십자가의 길은 평지가 아니고 경사진 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고, 게다가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심했을 겁니다. 특히 예수님은 이전에 겟세마네 산에서 잡히신 이후에 수시로 가하는 폭행으로 인해 온 몸이 멍 자국이었고,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을 겁니다. 더구나, 빌라도의 명령에 의해 로마 군병들이 가하는 살벌한 매질을 당하셔서 피를 많이 흘리셨고 온 몸은 찢겨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강제로 씌워서 얼굴은 피 범벅이 되었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실 정도로 힘드셨기 때문에, 로마 병사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따라가며 그 광경을 보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그토록 사랑해 주셨던 12명의 제자들은 다 도망가서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 주목할 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자들입니다. 이 여자들의 정체는 평소에 예수님을 섬겨왔으며(음식, , 잠자리 등 사역 편의 제공)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따라온 사람들(27:55),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여자들( 15:41) 이었습니다. 남자들이 강한 척, 센 척 하지만, 결정적인 장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여자들의 숨겨진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23:17)고 합니다. 이 여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는 표현으로 봐서, 예수님을 죽이라는 군중이 압도적으로 많기는 하였지만, 예수님의 고난을 진심으로 뼈저리게 생각하고, 구슬프게 흐느끼며, 비통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무리도 생각보다는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 기독교가 아무리 변질되고 종교적 순 기능이 약화 되었다고 하여도, 진실한 믿음을 지켜가려는 사람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곳곳에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여자들의 변절하지 않는 행동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 길을 올라가시면서 정신을 잃을 지경의 몸 상태셨지만, 많은 무리의 여자들이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다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들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말씀 하십니다.예수님은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여자들과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걱정해 주고 계십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울라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여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더욱더 소리 내어 흐느꼈을 겁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29-31절 까지 부연 설명을 해 주십니다.

 

그날(심판의 날)이 오면, 상상하지 못할 공포의 대 재앙이 찾아 올 터인데, 그 때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9:6) 극악의 고통의 상황이어서, 임신과, 출산, 젖을 먹여 보지 않은 여인이 오히려 복이 있을 거라고 하십니다.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더 복이 있을 정도의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최후 심판의 날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날을 대비하여 예수님 자신이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니 똑똑히 보고 기억하여, 이것을 헛되이 하지 말고, 나를 위해 슬퍼하는 비통과 탄식의 울음소리를, 우리() 자신의 구원과, 자녀들과 이웃들의 구원을 위해서 흘리라고 부탁 하신 겁니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자녀를 위해 울라 이 말씀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던 사람들에게만 들려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숨어버린 사람이나, 예수님의 처참한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십자가의 주님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녀의 구원을 위해서,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눈물 흘리지 않는 다는 겁니다. 십자가 고통의 심각함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에수님의 희생의 가치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울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경고의 말씀도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날이 곧 다가온다는 심각함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피 범벅이 된 얼굴로, 숨이 차셔서 그렁그렁 쇠 소리 나는 음성으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절규하듯 말씀하신 마지막 생생한 육성 유언을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가, 생명의 길로 가느냐, 멸망의 길로 가느냐의 갈림길이 됩니다.

 

우리는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며, 또 고난 주간을 준비하면서,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심정으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갔던 큰 무리의 여자들 속에 합류하여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리고 묵상가운데 주님이 가신 그 길의 상황을 자세하게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자녀를 위해 울라”, 주님의 음성을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집중해야 합니다. 저를 통해서, 강단에서 선포 되는 말씀으로 끝내지 말고, 여러 분이 직접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지하여, 예수님을 찾아가셔서 정확하게 들으시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들어야만, 내 구원의 문제가 올바로 해결되어 있는지 확인 할 수 있고, 내 자녀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교육 방법과 목표를 정할 수가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말씀을 들어야만,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자녀로서, 품위 있고, 겸손한 삶을 살아갈 있는지를 계속적으로 고민 할 수 가 있습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시면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십자의 주님만을 따라 가시면서, 오직 내 자신과 자녀들의 구원의 은혜만을 간절히 구하며, 피와 살을 다 내어주신 예수님께 진심어린 감사의 고백을 드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처참함 몰골로 끌려가신 예수님은 드디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영화에서 보시면, 예수님의 양발과 손에 박혔던 못은 어마어마하게 큰 대못입니다. 십자가 나무 두께를 관통해야 하고, 또 죄수들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으로 요동칠 때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큰 못이 필요 했을 겁니다. 십자가 대못은 손바닥에 박은 것이 아니라, 손 목 뼈 사이에 박았습니다. 몸의 무게로 인해 살이 처지거나 찟겨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못이 박히는 것도 극한의 고통이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쇠 대못이 뼈를 갉아 먹는 고통이 반복되었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예수님은 이 극한적인 고통의 상황에서도, “아버지!, 저들은 알지 못하고 하는 일이니,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기도하셨습니다. 저라면 발악을 하고, 욕에 욕을 했을 겁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아무리 말하여도, 그 고통의 백만분의 일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리면 평균 3일에서 일주일 사이에 죽는다고 합니다. 십자가 처형자들은 대개는 정치범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끔직한 상황을 보고 로마에 대항할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죽을 때까지 며칠이고 잘 보이는 곳에 그냥 매달아 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고통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죽지도 못하고 매달려 있는 끔찍한 몸부림 속에서 미쳐간다고 합니다. 소리지르다가, 깨었다가를 반복하다가 정신이 이상 되어 서서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평균에 훨씬 못 미치는 6시간 만에 일찍 숨지신 것은, 이미 채찍질로 인해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설교를 위해 십자가 고통을 묘사하는 글을 쓰면서도,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는 돌 같은 제 마음이 참 딱해 보이고, 한심해 보였습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이 감당하신 십자가 고통 때문에 지금의 평안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하는 사람인지, 거룩하다고 불려지는 성도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부끄럽고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자기 십자가를 지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예수님의 고난을 모독하는 일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합니다.

 

죽음 앞에 용감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라도 죽음이 두렵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철이 들지 않는 사람을 ··”, 하나님도 포기한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흉악하고 난폭한 사람일지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어린 아이처럼 순해 집니다. 그 만큼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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