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부족함을 채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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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을 채워 주세요.
(창세기 2장 18-25절)
결혼한 사람은 따라 합시다. <돕는 배필이 됩시다.>
앞으로 결혼할 사람은 따라 합시다. <돕는 배필을 꼭 찾으세요.>
결혼하신 분들은 다 경험하는 것이지만 성장환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부부에 대해서 이런 말까지 있지 않습니까?
"부부란 10대에는 서로가 꿈속에서 살고, 20대에는 서로가 신이 나서 산다.
30대에는 서로가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서로가 체념하고 산다.
50대에는 서로가 가엾어서 살고, 60대에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되니까 산다.
그리고 70대에는 서로가 고마워서 산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깨어지고 무너지기를 원하는 것은 사단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행복한 가정은 서로의 노력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 부부는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영국 리버풀 대 연구진이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부부 사진 160쌍, 그러니까 320명 얼굴 사진을 섞어 놓고 부부를 짝맞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거의 다 맞추었습니다.
부부는 얼굴도 닮아 간다는 사실입니다.
같이 웃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감정을 나누기에 얼굴에 감정선이 같아 지기에 모습이 비슷하여 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부부는 감정 표현도 같아 진다는 사실입니다.
식성도 같아 집니다.
취미도 같아 집니다.
부부는 병도 같아 집니다.
식성과 운동량이 비슷하기에 병도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성격, 가치관 그리고 생각까지 같아 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부부는 결혼하면 3주 서로 연구하고 3개월 사랑하고 3년 싸우다가 30년을 참고 견디게 됩니다.
다름으로 만나 같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부입니다.
같이 살다보면 모든 것이 같아집니다.
부부는 서로 다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의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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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인님의 댓글
강수인 작성일
(09)
부족함을 채워 주세요.
(창세기 2장 18-25절)
결혼한 사람은 따라 합시다. <돕는 배필이 됩시다.>
앞으로 결혼할 사람은 따라 합시다. <돕는 배필을 꼭 찾으세요.>
결혼하신 분들은 다 경험하는 것이지만 성장환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부부에 대해서 이런 말까지 있지 않습니까?
"부부란 10대에는 서로가 꿈속에서 살고, 20대에는 서로가 신이 나서 산다.
30대에는 서로가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서로가 체념하고 산다.
50대에는 서로가 가엾어서 살고, 60대에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되니까 산다.
그리고 70대에는 서로가 고마워서 산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깨어지고 무너지기를 원하는 것은 사단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행복한 가정은 서로의 노력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 부부는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영국 리버풀 대 연구진이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부부 사진 160쌍, 그러니까 320명 얼굴 사진을 섞어 놓고 부부를 짝맞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거의 다 맞추었습니다.
부부는 얼굴도 닮아 간다는 사실입니다.
같이 웃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감정을 나누기에 얼굴에 감정선이 같아 지기에 모습이 비슷하여 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부부는 감정 표현도 같아 진다는 사실입니다.
식성도 같아 집니다.
취미도 같아 집니다.
부부는 병도 같아 집니다.
식성과 운동량이 비슷하기에 병도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성격, 가치관 그리고 생각까지 같아 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부부는 결혼하면 3주 서로 연구하고 3개월 사랑하고 3년 싸우다가 30년을 참고 견디게 됩니다.
다름으로 만나 같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부입니다.
같이 살다보면 모든 것이 같아집니다.
부부는 서로 다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의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부부는 돕는 배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혼자 사는 것이 부족하다 그래서 돕는 배필을 주셨습니다.
부부는 서로의 인생을 책임져 줘야 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격려하고 칭찬해야 합니다. 아내들의 격려와 칭찬은 사회생활에 피곤한 남편들에게 훌륭한 보약이 됩니다. 남편들은 아내의 격려를 갈망합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을 격려하는 일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매일 한마디씩의 보약을 처방합시다. “당신 정말 멋져요”, “당신이 세상에서 최고예요”, “당신은 참 훌륭해요” 하고 말입니다.
제가 경주로 임원대회를 하고 집에 돌아 왔는데 아내의 얼굴이 환했습니다. 내가 없으니 잘 지낸 것 같습니다. 하루 3끼 식사 준비 안해도 좋아서 인지 얼굴이 밝았습니다. 제가 <얼굴이 빛난다>고 하니까 <남편의 얼굴이 보니 좋아서 그런다>고 하니까 내마음이 좋았습니다.
제가 교회 없는동안 교회에 가서 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얼굴이 환하다는 것입니다.
칭찬받는 남편이 사회생활을 잘하고 직장생활을 잘하고 가정생활을 잘합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합니다.
아내가 남편이 하는 일을 인정해 주고 감사하면 신이 나서 남편은 일을 더 잘 합니다. 남자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자신의 노고를 아내가 알아주고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을 할 때 더 잘합니다.
남자는 경쟁적이고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지배적인 성향을 드러냅니다. 여자가 이것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들은 아내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를 무시한다는 것은 자신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남편의 기도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이야기를 꺼내면 남편은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원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말에 관심을 가지고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은 내말을 안들어요><내가 이런 말을 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조선시대에 문무백관에 모아 놓고 왕이 말했습니다.
아내의 말을 잘 듣는 남자는 빨간 기 쪽에 서시오- 49명
아내의 말을 안 듣는 남자는- 노란 기 쪽에 서시오- 1명,
왕- 어떻게 그대는 아내의 말을 안 듣느냐고 묻자 -
<오늘 아침 아내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해서 이곳에 섰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왕이 껄껄 웃었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남편와 아내는 돕는 배필입니다. 부부로서의 짝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보고, 아내는 남편을 보고 <당신은 내뼈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당신 때문에 살아><나, 당신이 있어 행복해>라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저 요즘 이런 소리를 듣고 살아 갑니다.
2)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부모자식 관계는 세워주어야 합니다.
엄마가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 9살 난 철수에게 “철수야 이다음 장가가면 엄마랑 같이 살자”고 말했습니다. 철수는 갑자기 얼굴이 심각해지더니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한참 후에 돌아온 철수는 어두운 얼굴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아무래도 그건 안되겠어요.” 엄마가 “왜 안되니?”라고 묻자 철수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옆집 영희가 안된데요”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또한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에베소서 6장 2-3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부모공경은 인간이 인간의 첫도리입니다. 잘되고 장수하는 비결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세워 드리세요.
부모가 자식을 세워주는 것, 자식이 부모를 세워주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마땅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아이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는 누어있던 아이를,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를 먹기고 재우고 씻겨서 서서 다니게 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당연히 해야 합니다. 부모의 도리입니다.
반대로 자녀가 스스로 서서 사회생활하고 자기 짝 찾아서 결혼해서 살 때 쯤 되면 부모는 점점 더 약해져서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일터에서는 젊고 유능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 줘야하고 육체적으로 노화 현상이 일어나서 힘이 없어집니다. 이때 자식들은 부모를 세워줘야 합니다. 이것이 효도하는 것입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세워줘야 합니다.
이처럼 부모 자식관계는 서로 세워주는 관계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도리입니다. 이것이 옳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잠언 22장 6절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니자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6장 4절에 <또 이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녀들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신체장애를 극복한 자랑스러운 영국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인 "프랑크상"을 수상한 엘리자베스 바를로라는 여성은 런던 심포니 오케
스트라의 비올라연주자이다.
그녀는 열여섯살때 청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위대한 음악가의 꿈을 키워가던 바를로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꿈과 희망을 모두 잃고 깊은 절망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향한 희망의 빛을 놓지 않았다.
"네가 비록 청력은 잃었지만 아직 시력은 남아 있단다.
사람들의 입술을 보고 말의 뜻을 파악하는 독순술을 익히도록 해라.
그러면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단다."
어머니의 격려에 힘을 얻은 바를로는 독순술을 배워 사람들과의 대화는 물론 비올라연주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최고의 비올라연주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말 한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우리 부모가 자녀에게 할수 있는 것은 사랑하며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축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최고가 되개 하실 것이다>고 축복할 때 자녀들은 최고가 되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너는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귀한 인물이 될것이다>
부모를 세워주고 자녀를 세워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를 두고 자녀을 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3) 하나님이 만드신 형제관계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형제관계는 아름다움과 미의 문제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형제가 연합하는 것은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관계는 성령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함께 해주는 겁니다. 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을 구할 때는 주십니다. 구할 때 얻은 것이 형제입니다. 형제는 피를 나눴습니다. 초대교회에는 그리스도인의 피를 나눈 형제들이 아름다운 공동체가 서로 나누고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아름답고, 선하고, 향기로운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요일 저녁에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음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내마음에는 마음의 그릇이 좁으니까 근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성령님을 고백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를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큰일이고 답답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큰 일들이지만 성령님이 함께 해 주시고 도와 주신다는 것을 체험하면 어려운 문제가 해결받을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번주 한주간 살면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학교생활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게 하고 직장생활에서는 직장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신앙생활에는 신앙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도록 성령과 동행하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부는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행복합니다.
부모자식은 부족함을 세워 주어야 행복합니다.
형제자매는 부족함을 함께 해주야 행복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이 필요하다고 고백합시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하다고 고백합시다. 말씀과 사랑이 필요하다고 고백합시다.
칭찬과 격려가 필요하다고 고백합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돕는 배필로 인하여
<이는 내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이~" 모두 하나님이 하신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하나님이 연합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강수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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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보고에 의하면 어른들이 하루 130명씩 가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청소년들이 아니라 어른 가출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른들도 철이 없어 아이 같은 어른이 많이 있습니다. 빈곤과 가정불화 등으로 지난해에만 4만 7,254명의 어른이 가출하였습니다. 이 수는 IMF 때의 2배에 해당합니다. 오히려 청소년 가출은 다소 줄어 작년 한 해 동안 청소년 가출은 1만 3,374명이었습니다. 어른들의 가정에 대한 책임이 점점 소홀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비 샌더스가 쓴 ‘돌고래에게 배운다’란 책을 보았습니다. 돌고래는 무리의 위협을 받을 때마다 맨 바깥에 수컷들이 열을 짜고, 그 안쪽에 암컷들이 열을 짜고, 그리고 한 가운데 어린 돌고래가 열을 짠다고 합니다. 돌고래는 가족의식과 동료의식이 매우 강하다고 합니다. 돌고래도 이렇게 살아가는데 위협이 있고 빈곤이 있다고 하여 어른이 가족을 버리고 가출하는 것은 돌고래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우리 사회에 가족 간의 대화가 날로 줄고 있습니다. 가장의 20%이상은 전혀 가족과의 대화가 없다고 합니다. 아기를 낳은 산모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율이 세계에서 제일 낮습니다. 이혼률은 거의 5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저런 이유로 혼자 사는 ‘나홀로 가구’가 250만 가구나 됩니다. 가정에 대한 의미와, 책임과, 목적이 상실되어가는 시대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가정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서로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고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창조하시므로 천지창조를 마무리하셨습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하므로 마무리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의 첫 번째 기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였습니다. 성경은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기관인가 하는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가정은 교회의 원형입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에 예루살렘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이었습니다. 골로새교회는 빌레몬의 집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눔바의 집이었습니다. 빌리보교회는 루디아의 집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모든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인 곳이 교회와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이 그리스도가 주인이고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가정을 소홀하게 할 수 없습니다. 가정 없이 사람된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란 말은 원래 ‘살암’이었다고 합니다. 살이란 살덩어리를 말입니다. 그리고 암이란 여자 즉 어머니를 뜻한답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원래 뜻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온 살덩어리”란 말입니다. 참 가정적인 표현이지요. 사람은 모름지기 가정적이어야 합니다. 가정을 소중히 여겨야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여리고 사람인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보고 싶은 마음에 나왔지만 키가 작고 사람들이 이미 많이 몰려나와 있어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갔고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내려오라고 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머무시겠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부정한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남의 것을 억지로 탈취한 것이 있으면 네 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도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삭개오는 늦게 나왔기 때문에 뽕나무 위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좀 일찍 나오지”라고 그를 비난할지 모르지만 그가 늦게 나왔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기에 예수님도 그를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삭개의 집이 예수님을 모신 집이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인정하신 복된 가정이 된 이유를 살펴보고 우리의 가정이 예수님이 머무시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가정입니다.
3절과 4절에는 말합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삭개오는 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라고 표현합니다. 그의 간절한 마음, 보고 싶어 하는 그의 열정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5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위로 삭개오를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내려보고 있고 예수님이 우러러 보게 하는 불충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삭개오를 우러러 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머무신 동기는 보고자 하는 삭개오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보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있고, 열심이 있는 가정에 예수님은 머무십니다.
어느 가정이든지 열심히 살고, 열심히 가족이 함께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읽고, 열심히 성경쓰기에 참여하고, 열심히 교회 출석하는 가정은 평안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보기를 원하는 열정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가시덤불이 불꽃에 타지 않는 신비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기이한 광경을 보리라”고 하면서 험한 산을 올라갔습니다. 호렙산은 올라가기가 그리 쉬운 산이 아닙니다. 힘들게 올라갔을 것입니다. 보려고 하는 열망과 호기심이 없이는 올라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산에 올라갔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모세는 나이 40세 때에는 문제를 보았으나 80세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이상한 별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기이히 여겨”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외로운 들을 지나 예수님이 계시는 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런 보기를 원하는 호기심이 결국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모시는 마음이 되고,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에 예수님을 보리라는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 28:1)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는 열망을 가진 가정에 예수님은 머무십니다. 예수님을 우리 가정에 머물게 하시려면 예수님을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교회에 나오시면 예수님을 봅니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을 봅니다. 기도를 하면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이 이곳에도 계시는데 보지 못하는 분 안 계십니까? 키가 작아서도 아니고 눈이 나빠서도 아닙니다. 간정한 마음이 있으면 지금 여기에 계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삭개오의 다른 식구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다른 식구 들은 삭개오 한 사람 덕분에 예수님을 모시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가정의 주인 되게 하고 예수님이 그 집에 머무시게 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의 간절한 열망이 예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까? 뽕나무에 올라갈까요? 현대에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마태복음 5:8에는 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시편 11:7에는 말합니다. “정직한 자가 그 얼굴을 뵈오리라.” 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이 정직한 자가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는 자는 마음이 청결한 자일 것입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일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할 테니 말입니다.” 어떤 이는 청결은 성결의 사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성결한 자입니다. 이런 자의 가정에 예수님은 머무십니다.
둘째,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가정입니다.
뽕나무 위의 삭개오를 보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 때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6절은 그의 신속하고 간절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의 마음의 자세는 이미 예수님이 머무실만한 집이었습니다.
삭개오의 태도를 보세요. 첫째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즐거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기꺼이 맞았습니다. 셋째는 영접하였습니다. 환영하며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이미 하나님이 머무시는 마음이었고 천국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삭개오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 이런 비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고 머무시는 그 기쁨 외에 어떤 것도 그에게는 관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손님을 맞는 자세를 보면 기꺼이 맞이하는 사람이 있고,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태도에 따라 상대방의 느낌은 천지차이입니다.
노천명시인의 ‘임이 오시던 날’이란 시가 있습니다. “임이 오시던 날/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그도 저도 아니오이다/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여인의 속절없는 애틋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주님을 만나려고 기다리는 마음이 이만도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바라고 기꺼이 영접하는 가정에 들어가시기를 원하시고 그 집에 머무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요한복음 1:12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는 사람, 모시는 사람은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모시면 머무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수넴여인은 엘리사에게 작은 방을 마련하였습니다. 작은 침상과 촛불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런 모시는 정성이 결과적으로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살게 하는 은혜를 입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베다니의 집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 곳에 지나실 때마다 모신 흔적이 있습니다. 이런 알뜰하고 정성스런 대접이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주님이 슬퍼하시며 죽은 지 나흘 되었지만 다시 살리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보고 베드로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왔습니다. 이런 극진한 마음이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영접하는 첫 번째 이방인 개종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작은 소자를 대접하고 모시면 그것이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자에게 예수님을 대하듯 대접하세요. 집에 모셔 들이세요. 이것이 예수님을 모시는 방법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영접하면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영접하면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영접하면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 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여 주인 되게 하여야 합니다. 가정의 주인이 내가 아니니까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가정의 주인 되게 하여야 합니다.
루디아는 바울을 자신의 집에 들어와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을 억지로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고 사도행전 16:15은 말합니다. 바울이 들어와도 복을 받고 그 집에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예수님을 모신 가정이 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기 싫은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보세요. 로마서 1:28에는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고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좋아하면 머무십니다. 그러나 싫어하면 떠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떠난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등입니다. 세상에 못된 것은 죄다 하나님이 마음에서 떠난 결과입니다.
우리가 바르게살기 위해서라도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바르게 서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들어오셔서 주인이 되시고 머무십니다. “주 네 맘에 들어가시려 하네. 왜 모시지 않느냐. 이 세상의 그 누가 막으리요. 너의 대답 무엇이냐. 언제나 주님은 기다리셨고 또 지금도 기다리셔. 주님께선 문 열기 원하시며 지금 기다리시네.” 주님을 기다리게 마시고 모시고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분의 가정에 주인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께 회개하는 가정입니다.
8절에는 삭개오의 용감한 자기 회개가 나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며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 말은 삭개오의 자발적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강요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 회개합니다.
회개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하나가 되어야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죄를 알고, 잘못을 느끼고, 새로운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삭개오는 아는 것에 머문 것이 아닙니다. 느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줄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나의 사랑하는 책’에서 “회개는 내적 가책이 외적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외적 행동이 없는 회개는 참 회개가 아닙니다.
완전하게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은 구원에 이르는 가정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가정은 회개로 완성된 가정입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은 회개한 가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고 합니다. 삭개오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집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이 그 온 집에 이르렀습니다. 삭개오 한 사람 덕에 온 가정이 구원받는 놀라운 은총을 입습니다.
지난 5월 7일 신문에는 아름답고 훈훈한 기사가 났습니다. 어떤 70대 할머니가 37년 전에 기차 무임승차한 것을 갚기 위하여 30만원과 사과 편지를 서울역에 두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워 그렇게 했는데 이제 갚고 싶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를 믿는 분이라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회개는 실제로 자신의 것으로 갚는 것입니다. 의지가 없는 회개는 속임수입니다.
회개는 가장 온전한 제사입니다. 사죄의 은총이 있어야 완전히 예수님이 머무시고 떠나지 않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9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회개가 없는 불의하고 죄악이 있고 더러운 곳은 예수님이 머무실 수 없습니다. 이런 더러운 곳은 예수님이 머무실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어떤 죄 많은 여인이 와서 옥합을 깨트리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300데나리온의 가치를 가진 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300데나리온이면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1500만원은 되는 향유입니다. 이 여인은 이 비싼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닦았습니다. 이 여인의 많은 죄가 다 사해졌다고 예수님은 사죄를 선포하십니다. 이 여인의 고 비싼 대가가 없이는 참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참 회개가 가능합니다.
어느 회사에 있는 값비싼 컴퓨터가 고장이 났습니다. 컴퓨터 기술자는 하루 종일 거대한 컴퓨터를 상대로 고장 난 부분을 찾기 위해 씨름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고장 난 곳을 발견하여 한군데에 분필로 하얀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그 부분의 부품을 교체하여 완전히 기능을 회복하였습니다. 이 기술자는 수리비로 5만 달러를 청구하였습니다. 이 회사는 수리비가 너무 비싸다고 하여 자세한 명세 계산서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기술자는 “분필로 동그라미 치는데 1달러, 동그라미 칠 부분을 찾는데 49,999달러”라고 계산서를 적어 왔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고치고 돌이키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이 이상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결론
어느 책에 보니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Women pack, but they never carry”(여자들은 짐은 싸지만 운반하진 않는다)라고 조크를 하였습니다. 제가 어느 목사님께 그 책을 보여주었더니 “맞네. 맞어”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목사님은 “짐 싸는 게 짐 드는 것보다 힘들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목사님이시죠? 어느 것이 더 힘들고, 더 중요하다기 보다 둘 다 중요하지요. 그런데 역시 짐은 여자가 싸는 게 좋고, 짐을 드는 건 남자가 좋아요. 남편과 아내의 차이를 인정하십시오. 좋은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일을 덜어줍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일의 가치를 존중합니다. 이런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감사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감사할 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감사합니다. 이런 가정이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이런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인 가정은 누구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존귀하고 주인 되시는 분이십니다. 가정의 왕이나 더구나 폭군이 되지 마십시오. 집안의 왕은 주님이십니다. 집안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의 족장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제사장 되어야 합니다.
역대상 17:24에는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서 견고히 서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우리 모든 가정이 주 앞에서 견고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연동의 가정들이 예수님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하고,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외적 행동으로 회개함으로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02)
행복이 넘치는 가정
김형준목사
룻기 1:6-18
정작 자신은 한번도 가정의 행복을 누려보지 못했던 존 하워드 페인이라는 분이 “home sweet home"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세상에 쾌락과 궁전 가운데로 내가 돌아다닐지라도
나를 언제나 겸손케 하는 것은 내 집 같은 곳이 다시없음이로다.
가정은 하늘로부터 아름다움이 있는 곳
그리고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는 곳
온 세상을 온통 다 찾아보아도 이런 아름다움을 다른 데에서는 찾을 수 없네.
가정! 가장 감미로운 나의 가정 같은 곳은 다시없도다.
정다운 아버지의 미소 짓는 무릎 아래에 앉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그리고 나를 위로하고 달래시는 어머님의 어루만지심이 얼마나 다정한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쾌락을 찾아 배회할지라도
나에게는 나에게는 다만 가정의 즐거움만을 다오.
가정! 가정! 가장 감미로운 내 집 같은 곳은 다시없도다.
많은 근심의 짐을 지고 나는 돌아오리라.
마음이 가장 사랑스러운 위로와 따스함이 거기서 나를 향해 미소하리라.
나는 다시는 그 오두막집을 떠나지 않으리.
그처럼 포근한 내 집 같은 곳은 다시없으리.
가정! 가정! 감미로운 내 가정 내 집 같은 곳은 다시없도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우리 마음속에 묘한 푸근함과 향수가 떠오릅니다. 가정의 어떤 것이 푸근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 가정이 화려한 궁궐 같은 집이라서 그럴까요? 아니면 식탁 위에 산해진미가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은은한 불빛과 감미로운 음악이 있어서 그럴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나 쉴 수 있었던 어머니의 품, 지치고 힘들어도 돌아갈 수 있었던 넉넉한 어머니의 가슴, 한없이 울어버릴 마음의 아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버리고 나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는 그 어머니의 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가정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안정과 편안함 가운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기댈 때마다 항상 받쳐주셨고, 폭풍우에 검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길이 막혀도 아버지가 헤쳐 나갔던 그 길 따라 온 식구가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시작되고 우리의 인생이 마감되는 그 곳, 가정! 얼굴을 맞대며 싸우고 울던 형제, 자매들, 형제 때문에 야단맞아도 그렇게 밉거나 싫어 할 수 없었습니다. 부대끼며 짜증나고 힘들더라도 돌아서서 다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기에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맙니다.
그러나 아름다웠던 기억들과는 다르게, 가족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 때문에 생각하면 쓰리고 아픈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향수와 푸근함을 기억하면서도 동시에 그렇지 못했던 어머니, 그렇지 못했던 아버지와 형제들, 원치 않는 가정의 아픔과 다툼과 비극 가운데 불행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에도 많이 있습니다. 따스함과 편안함을 주었던 부모님,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 형제, 자매들이 세월의 흐름 앞에 어느새 나의 짐이 되고 있고, 내 아픔과 고통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엘리멜렉 가정은 단란하고 아름다웠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에 예기치 않은 흉년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흉년을 피해서 삶의 자리를 모압이라는 땅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모압 땅으로 옮긴 엘리멜렉의 가정은 흉년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가장과 갓 결혼한 두 아들이 죽고 세 명의 과부만이 남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에 불어 닥친 흉년이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던 우리 가정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찢어놓고 갈라놓았던 일들은 없습니까? 가족간에 이해와 사랑의 흉년이 들어 미움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소망이 없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흉년 때문에 삶의 자리를 옳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새롭게 살겠다고 시작했던 삶 속에 더 큰 어려움을 만나서 회복할 수 없는 중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둡고 험난했던 사사시대 가운데서도, 깨어지고 부서져서 실패한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게 구원 사역을 준비해나가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서진 가정을 통해서 조차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 존귀하고 아름답게 이뤄 가심을 보여줌으로 인해, 가정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린 아픈 우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없었던 세 명의 과부만이 남은 이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가정이 되었을까요? 더 나아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가정의 풍요로움, 그 풍요로움을 지키고 누릴 수 있는 삶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나오미와 룻이라는 한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희망의 메시지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다리고 있던 그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이 가정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고 복되게 살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오미가 자기와 자기 가정 속에 닥친 불행과 어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생각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20절에서 21절을 보면 「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고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 룻기 1장에 보면 ‘돌아가다’라는 단어가 8번씩이나 나옵니다. 나오미가 말할 때마다 "돌아가야 된다, 돌아가야 된다." 이야기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자신의 인생과 가정에 불어 닥친 어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떠난것에서 원인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은 하나님 백성이 당신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나오미는 흉년이라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가르치시기 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를 듣는 것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고통과 아픔을 피하여 쾌락과 즐거움을 선택했던 자신의 삶과 자기 가정의 선택이 잘못 되었음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육체적인 것에 더 관심이 있었고, 또한 자기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후손들로 기르는 것보다는 모압의 이방인들과 결혼시킴으로 하나님의 백성들과는 상관없는 백성으로 살아가게 만들 정도로 무감각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보다는 내 편안함과 편익을 쫓아서 선택했던 나의 태도가 오늘 내 삶 속에 이러한 불행과 어려움을 불렀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돌아보는 나오미는 하나님 앞으로 다시금 돌아가고자 믿음을 선택하여 자기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나오미의 홀로서기의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특히 여인들은 더 합니다. 여인들은 평생 세 남자를 의지하고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 젊어서는 남편, 나이 들어서는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상황은 더욱 더 심각합니다. 나오미의 이런 모습을 토머스 풀러(Thomas Fuller) 라는 분은 풀핏주석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연약한 존재이며, 여자 중에서도 노년기의 여자는 더욱 약하다. 그 중에서도 과부는 더 불쌍하며 거기에 가난한 과부는 더더욱 측은하다. 나아가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 중에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은 더욱 처량하며 그곳도 먼 타국에서 객이 된 자식 없는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는 실로 가련하며 불쌍하다. 진정 욥이 남자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었다면, 나오미는 여자 중 가장 처량한 지경에 빠진 여자」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재기할 힘도 나이도 돈도 가족들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두 사람,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신체적으로 연약하기에 며느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연령이지만 홀로 서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남편 의지하고, 내 돈 의지하고, 내 자식 의지했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삶의 결단이 며느리들도 돌려보내며 홀로 하나님 앞에 돌아서겠다는 행동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원치 않은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뒤돌아 볼 때 후회하고 원망하고 계십니까?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만큼 섬세하게 살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 내 삶이 있다고 믿는다면, 내 삶에 문제의 원인을 어디서부터 찾아야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으라고 명하신 그 자리와 나에게 살라고 명하신 삶의 모습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 즉 하나님 백성답게 살라하시는 메시지를 져버리고 편리한 대로, 유익한 대로, 육신의 보이는 대로 선택하여 살아왔던 내 삶을 돌이키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나오미의 모습처럼 우리의 모습도 그러해야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 그것이 회복과 쓰임의 첫 번째 걸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오늘 내 삶을 진정으로 회복시키시고 내 가정을 다시 회복시키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그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 밖에 없다고 살아온 인생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돌아보며 새롭게 정립하는 나오미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의지하셨습니까? 남편과 아내를 의지하셨습니까? 그럴 줄 몰랐다고 울고 있다면 진작 알았어야 할 내용입니다. 자녀도, 남편도, 아내도, 물질도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하거나 평안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이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다시 시작하리라는 그 결단, 그것은 오늘 나의 삶 때로는 희망 없어 보이는 내 가정에 새로운 생명의 출발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부서지고 깨어지고 희망이 없던 이 가정이 회복되고 존귀하게 쓰임 받은 이유는 남아 있는 세 식구 속에 남다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세 과부는 각자 인생 속에 다가온 불행을 받아들이면서 더 심각한 불행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불행을 사랑으로 극복하는 놀라운 사랑이 남아있는 세 식구 속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보면 “함께” 라는 단어가 무려 5번 정도 나옵니다. 고통과 환난이 닥치면 가족들 간에 원망하고 원인을 다른 가족이나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남편과 두 아들들을 잃어버리고 자손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생애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우리 집안 망쳤다고 원망할 것입니다. 두 며느리 입장에서 살펴보십시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어버렸다면, 부모의 죄 값으로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부모를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남편이 아팠을 그 때 부모가 조금만 더 다정하고, 더 적극적으로 보살펴 주었다면 남편이 살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남편을 잃어버린 여인의 마음은 이미 멍들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서운합니다. 섭섭합니다. 상처가 됩니다. 동시에 이제는 혼자 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인생의 거추장스러운 것은 다 떨쳐버리려고 합니다. 신경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신문과 TV에 한 여인이 나와서 울면서 호소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내 자녀를 찾아달라고, 내 자녀를 잃어 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에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는데, 아이를 죽인 범인은 바로 그 어머니였습니다. 아이를 죽인 이유는 새로 사귄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니, 남자가 아이가 있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아이를 자동차 속에 두고 호수 속으로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내 인생을 출발할 때 거추장스러운 것은 자녀라도 떨쳐버리려고 하는 시대의 풍조 그것이 그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 이혼하는 가정 가운데에서 자녀를 서로 양육하려 하지 않겠다고 하는 모습 속에서도 곧잘 발견하게 됩니다. 버려져서 고아원으로 가는 자녀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지를 특별히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세 과부가 함께 일어납니다.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심지어는 어머니가 가는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동행하겠다고 두 며느리는 이야기합니다. 문화가 다릅니다. 그리고 풍속도 다릅니다. 언어도 다릅니다. 종교도 다릅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익숙한 것과는 결별하는 선택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니면 두 아들과 남편을 잃은 저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알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와 동행하고자 하는 두 며느리를 보게 됩니다.
신명기 23장 3-4까지 보면 암몬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가도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가지 못하는 주변인의 신세로 전락할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니면 저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위로할까’ 헤아리며 따라가는 며느리들의 눈물겨운 사연들을 보십시오.
동시에 어머니 나오미의 모습을 보십시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진실된 사랑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7절, 8절 말씀에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노라」 ‘선대한다’는 히브리 단어 “헷세드” 의 원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상관없이 일정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그 마음을 헷세드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너희들이 정말로 나와 내 가족들을 변함없이 진실로 사랑해준 것을 내가 알고 있다. 고맙다. 그런 사랑을 베풀었으니 하나님도 너희를 축복하기를 원한다. 이제는 되었다. 나도 내 삶에 너희들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기에는 나는 너무 늙고 희망이 없고, 이제는 너희들의 삶을 살아서 나가” 라고 이야기합니다. 젊은 며느리들에게 그들 자신을 위한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을 이해하는 어머니와 함께 붙들고 우는 두 며느리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서로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는 가족들을 하나님은 결단코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러한 이해와 사랑이 있는 가정이 망하는 것을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아무리 좋은 가정도 이 사랑이 없으면 부서집니다.
가정생활 하면서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부모님들이 아닙니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어머님들이 아닙니까? 어느 곳을 지나가다가 시판에 적힌 어느 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심순덕님이 지으신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입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 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쳐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엄마의 사랑. 그러나 당연하게 받아들인 엄마의 인생 그 뒤안길에 한 여인이 느끼는 슬픔과 눈물, 한숨과 탄식을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가정에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 형편과 내 상황에 따라서 편안하게 생각하고 내 중심적인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가정입니까? 이런 가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떤 시어머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분은 아들을 결혼시키기 전에 27살에 혼자가 되어서 아들을 길렀습니다. 둘만 살았기 때문에 며느리를 맞이한다는 것이 너무나 기다려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친구들은 식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래, 내 아들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6개월 정도만 같이 살다가 따로 살게 해 주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몇 번인가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이야기하면 화를 내고 역정을 내면서 ‘나는 어머니를 떠나서는 살수가 없어요. 그럴 수는 없어요.’ 라고 이야기 하던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 1주일 뒤부터 눈치가 이상해졌습니다. 자신은 며느리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몰래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하고, 일도 없이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배회하고 놀다가 저녁에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서 며느리 오기 전에 밥을 해 놓고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들 내외는 4개월 만에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이제 혼자구나 라는 생각, 의지하고 있던 기둥이 뚝 부러지는 듯한 허탈감과 서러움 때문에 이사하기 전 날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사하는 날 아침 따뜻한 밥을 준비해서 이제는 이것이 마지막 식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야기 하면서 먹으려고 했는데, 아들 부부는 이사 가는 집 이야기를 하며 들떠서는 마음으로 울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전화 한 통 오더니 그 다음부터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아! 30년 동안 돌아오던 아들이 이제 나보다 더 편안하고 좋아하는 곳으로 갈 곳이 있구나. 생각 하니 혼자 남은 외로움이 그 뼈 속을 파고들었습니다. 비가 오면 정신 잃은 사람처럼 우산을 들고 정류장에 가서 아들을 맞이하러 갈 때도 많았고, 혹 아들이 저녁을 먹으러 올까 밥을 많이 해 놓고 기다렸다가 밥 늦게 식은 밥을 몇 숟가락 먹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어머니 마음을, 한 여인의 마음을 모른다면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편리와 우리의 이익과 유익을 찾아서 판단하며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라면 이런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회복할 사랑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의 아픔의 소리를 듣습니까? 얼마 전 나온 책 중에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부모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던 자녀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결국은 증오감 때문에 부모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한 아이의 절규가 책으로 나온 것입니다. 가족간의 대화가 없고 서로의 아픈 마음을 알아 줄 수도 함께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가정이라면 그 가정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이 가정이 다시금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 아름답게 쓰임 받았던 세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가정에는 하나님을 믿는 나오미와 룻의 공동 기도 고백과 신앙 고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같은 신앙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이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신앙이 하나 된다는 것은 단순한 일치감이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그러합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기의 자부들에게 자신들의 갈 길을 가라고 권고할 때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붙좇았더라’라는 히브리어로 ‘다브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굳게 결합하다. 붙들고 늘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연상해 보십시오. 며칠 전에 일본 영사관 창살을 붙들고 자기 딸은 창살 안에서 보고 있는데, 끌려가지 않으려고 이 창살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중국 공안원들에게 끌려가는 한 여인의 처절한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창세기 2장 24절에서는 아담과 하와와 ‘결합하다’라는 단어와 동일하게 사용되었고, 시편 63장 8절에서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런 고백이 16절,17절에 나옵니다.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며,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니 어머님이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장사될 것이라.」라고 고백합니다. 엘로힘!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이 룻의 신앙 속에는 이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이방 여인인 룻이 어디에서 그 신앙을 본받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부들에게 이야기할 때, 여호와 혹은 전능자라는 단어를 1장 속에 무려 7번이나 사용합니다. 대화의 주어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7번이나 사용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남편이 죽을 때에도, 자신의 큰아들이 죽을 때에도, 둘째 아들이 죽을 때에도 죽음 앞에서도 철저하게 신앙 고백을 했던 그 나오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희망이 없어 좌절하여 주저앉아 울고 싶을 그 순간에 절망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내 삶이 하나님께 있노라. 내 운명이 하나님께 있노라. 내 축복이 하나님께 있노라.’ 고백하며 인생의 거친 길을 걸어가는 모습 속에서 룻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어머니, 아버님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절망스러운 일이 오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는 모습이 아니라, 나의 삶은 하나님께 있노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노라고 고백하며 툴툴 털고 기도의 자리에 서는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에서 천금으로도 살 수 없는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이 자녀들에게 물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신앙이 전달될 때,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을 통해서 메시야의 조상으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각각 가정에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나타낼 중요한 시기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도우시는 주님을 최악의 상태에서도 신실하게 믿고 오히려, 다른 가족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부모님들이라면 말로만 물질로만 그리고, 인간적인 교양으로만 전달하는 삶의 영향과는 분명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원망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이혼율이 30%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고통과 다툼 그리고 무너짐의 소리들이 여기저기 들려집니다.
로마제국 멸망사를 기록했던 에드워드 기본이라는 역사가는 로마제곡의 멸망이 바로 가정의 타락에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급속한 이혼율의 증가와 또 한 가지는 종교의 타락이었습니다. 절대성을 상실한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쾌락과 상황이라는 것에 도전을 받을 때, 튼튼했던 철의 나라 로마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가시고기라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쓴 등대지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님을 두고 삼 남매 사이의 심리적인 갈등과 다툼을 그린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어머님을 요양원으로 보내기로 했던 삼 남매의 결정 그러나, 어머님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막내아들이었던 재우라는 형제는 자기가 있던 외딴 섬 등대에 어머니를 보시게 됩니다.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남다르게 느껴보지 못했던 이 아들에게 어머니는 짐에 불과했습니다. 날마다 밥을 내놓으라고 하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어머니, 자신의 삶의 리듬을 깨뜨리는 어머니를 모신다는 것은 그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등대에 불이 나가서 불을 켜기 위해 나가게 됩니다. 가만히 있던 어머니가 여러 번 부릅니다. “재우야! 가지마. 가지마.” 하지만 재우는 어머님께 “어머니, 저는 가야합니다. 여기 냉장고에 음식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갑니다. 등대에 올라가서 끊어진 퓨즈를 갈아 넣고, 전기를 다시 연결시키는 순간 재우는 감전되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맙니다. 의식을 찾았을 때 그의 내장은 타 들어가는 것 같고 몸은 오그라들고 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 이대로 죽겠구나!’ 그렇게 자신을 포기하고 있을 때, 수 백 계단을 올라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치매를 앓고 있던 자기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올라오면 분명 죽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 내려가세요.” 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힘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가까이 옵니다. 어머니가 또 이야기를 합니다. “너 왜 밥 안주고 여기 있어. 밥 줘!” 그러면서 동시에 “너 힘드니, 내가 너를 살려줄게.” 그리곤 무릎에 아들을 눕힙니다. 빗물을 떠서 이 아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빗물이 들어갈 때 타들어가는 속이 다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세요! 여기 있으면 죽어요. 어머니, 돌아가세요.” “아니야,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치매에 걸려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한 노인 안에서는 동시에 모성본능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옷을 벗습니다. 속옷을 벗고 속옷을 빗물에 적셔 아들 입에 넣어 줍니다. 나흘 뒤에 구조대가 왔을 때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살리고 어머니는 죽었던 것입니다. 하반신 마비가 되었던 아들 그러나 잊혀져서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느꼈기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이러한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이 오늘날과 같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불행과 갈등 다툼과 고독을 다루고 있지만,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족이 무엇인지 아니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떠하십니까? 진정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03)
행복을 회복한 가정
조봉희목사
룻기 4:13-17
과거 프랑스에는 모두 69명의 군주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백성들로부터 진정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군주는 겨우 세 명에 불과했습니다. 생 루이, 루이 7세, 그리고 앙리 4세, 세 사람입니다.
프랑스의 어느 작가는 그들에겐 백성의 아픔을 이해하고 상처를 싸매 줄 줄 아는 매력이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군주들과 달리 그들만이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감쌀 줄 아는 특별한 인간미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와의 정 깊은 대화였습니다.
다른 군주들은 어머니와 떨어져 유모의 손에 의해 키워졌지만, 유독 그 세 군주만은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품이 이렇게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들어가는 학교는 어머니라고 하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는 최초의 스승이며 최고의 스승입니다. 어머니의 얼굴은 우리들의 교과서였고, 어머니의 무릎은 우리들의 교실이었으며, 어머니의 말씀은 비타민이고, 어머니의 손길은 우리들의 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가슴은 모든 인간의 고향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이 세상 어떤 어느 것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넓고 깊고 높습니다.
예컨대, 새들은 힘써 만든 둥지일지라도 1년 뒤엔 철수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기한이 없습니다. 새들은 불구가 된 새끼는 둥지에서 떨어뜨리지만, 어머니는 부족한 아이일수록 더 사랑합니다. 어미 새가 하는 일은 먹고 지키는 두 가지 뿐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간호사가 되고 교사가 되고 요리사가 되고, 재봉사가 되고 운전 기사가 되고 상담자가 되고 청소부가 되고 때 미는 자가 되고 동무가 되어주십니다. 이밖에도 어머니의 역할은 수없이 많습니다. 새들의 어미는 시한부로 새끼를 돌보고 책임을 벗으나, 어머니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세상에는 진통제가 많지만 어머니의 입맞춤만큼 효력이 있는 진통제는 없습니다. 아이들의 가슴속에 쓰는 어머니의 편지는 세상의 어떤 거친 바람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훌륭한 영문학자요 시인 피천득 선생님이 이런 고백을 들려줍니다.
그의 어머니는 30대 젊은 시절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어머니의 인상과 아름다운 추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기에, 그는 이런 소원을 노래합니다.
"내 인생의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나는 여전히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너는 알고 있는가, 네가 기뻐할 때 어머니도 기쁘고, 네가 슬플 때 어머니도 슬프고,
너의 성공이 곧 어머니의 성공이며, 너의 부끄러움이 어머니의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반면에 어머니는 겉으로 울고, 아버지는 속으로 키운다고 합니다. 또, 어머니의 과잉 사랑을 견제하는 역할을 아버지가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배의 돛이라면 아버지의 사랑은 키와 같습니다. 키는 물 속에 잠겨 보이지 않으나, 배의 방향을 인도하는 막중한 역할을 합니다.
아버지의 미소 속에는 아이를 위한 장래의 걱정이 있고, 아버지의 주머니 속에는 아이를 위한 희생적 준비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아이에게 훌륭한 모범이 못 되고 있다는 가책이 있고, 아버지의 심장 속에는 좀더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결심이 있습니다.
아버지란 '내가 훌륭한 아버지 구실을 하고 있나?' 라고 날마다 자책하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란 결혼식 같은 때에 눈물을 별로 안보이지만, 목구멍 속으로 우는 분이십니다.
아들딸이 늦게 돌아올 때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고,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내다봅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일터로 나가지만 그 머릿속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울고 겉으로 위로하는 자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속으로 사랑하고 겉으로 책망하는 자입니다. 아버지는 엄한 얼굴을 가졌으나 부드러운 심장을 가진 자입니다. 아버지는 최후의 존재하는 아이의 고향이며, 배신하지 않는 아이의 친구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착잡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들딸이 '나를 닮아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두려움과 자비, 위엄과 사랑의 양면을 동시에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날을 상징하는 꽃은 사랑과 존경의 뜻을 품고 있는 카네이션이지만, 아버지날을 상징하는 꽃은 민들레입니다. 민들레는 짓밟힐수록 다시 일어나 더 힘차게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뭉개 없앨 만한 힘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어떤 풍파와 역경도 감수하는 순교자적 사랑입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부모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 더 높은 것 같아"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행복한 가정생활을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Jack Dominian).
『지지, 치유, 그리고 성장』입니다.
아마 이런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룻기에 가장 리얼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원래 룻의 가정 배경은 참 불행합니다. 완전히 패가망신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룻기의 메시지는 행복의 회복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행복을 회복한 가정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세 사람의 장례식으로 시작하나, 마지막은 결혼식의 기쁨과 탄생의 축제로 회복합니다.
즉 1장에서는 엘리멜렉과 말룐과 기룐이라는 세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하나, 4장에서는 오벳과 이새와 다윗이라는 세 사람의 역사적 출생으로 회복됩니다.
눈물로 시작한 내용이 축가로 전환됩니다. 사별의 통곡으로 시작했으나 탄생의 기쁨이 연속됩니다.
가난하게 출발했는데 풍요가 찾아옵니다. 고독하게 등장했는데 희열에 찬 모습으로 부각됩니다.
모든 것을 잃었던 불행에서 이전 것보다 더 풍족하게 회복하고 누리는 행복이 강조됩니다.
이방 땅의 죽은 우상으로부터 약속의 땅의 살아 계신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지난 10년 동안의 고생이 영원한 영광으로 바뀝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가정이 어떤 환경에서 출발했던지, 새로운 회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지나온 세월 동안 어떤 쓰라린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있었던지, 더 풍족한 회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룻기 4장 15, 16절에서는 가정의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회복자(Restorer), 봉양자(Nourisher), 양육자(Care)』입니다.
모든 불행으로부터 완전하게 회복된 가정의 진면목을 부각시켜줍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황홀한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이 돌보시는 가정입니다
룻의 가정이 행복을 회복할 수 있었던 근저는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총』입니다.
본문 13절에서는 "주님께서 룻을 보살펴주시므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상기시켜줍니다.
『돌보심의 은총.』이것이 룻기의 중심주제이기도 합니다.
같은 시대에 쓰여진 구약성경의 사사기는 "한 나라(이스라엘)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주지시켜준다면, 룻기는 "한 개인, 한 가정을 돌보시는 하나님??

강수인님의 댓글
강수인 작성일
(06)
신앙의 가정으로 만들어 가라
(출 20:1-17)
1.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 가정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
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창 6:8-12).
2. 믿음으로 인정받은 아브라함 가정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
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
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1-4).
3. 자녀들을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한 아므람 가정
“아므람의 처의 이름은 요게벳이니 레위의 딸이요 애굽에서
레위에게서 난 자라 그가 아므람에게서 아론과 모세와 그의 누이
미리암을 낳았고”(민 26:59).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
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출 3:1-3).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출 15:20).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출 28:1)
4. 신앙의 계보를 이어가는 살몬의 가정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 1:5-6a).
5. 외가의 믿음을 이어 받은 디모데 가정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
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
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2-5).
(07)
부부의 행복
에베소서 5편 22절 - 33절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어느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사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목사님께서 말했습니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믿음이지요. 슬픔은 뒤를 돌아보게 하고,
걱정은 주위를 둘러보게 하지만, 믿음은 위를 바라보게 하지요. 믿음은 모든 절망을 이기게 하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까지도 정복하는 영원한 생명이기에 믿음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화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막 결혼식을 치른 신랑 신부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랑 신부는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지요. 사랑은 가난도 부요하게 하며,
눈물도 달콤하게 만들고, 적은 것도 많게 만들지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지요.”
화가는 전쟁을 마치고 지쳐 돌아오는 한 병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병사는 화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평화이지요. 평화는 전쟁을 멈추게 하고,
참된 안식과 기쁨을 가져다주니까요. 평화야말로 우리 모두의 참 소망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화가는 다 다른 대답에 갑자기 고민이 됐습니다. “과연 믿음, 사랑, 평화를 어떻게 표현해 낸담.”
그렇게 고민하며 집으로 들어서던 화가는 '아빠'를 부르며 가슴에 안기는 자녀들에게서 믿음을 보았고,
그리고 아이들과 자신을 쳐다보며 말없이 웃고 있던 아내의 눈망울 속에서 사랑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화가의 마음속에 밀려드는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넘쳐 났습니다. 화가는 지체하지 않고,
붓을 들어 자신이 그리고자 했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의 제목은 '가정'이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넷째주일 부부주일입니다. 5월 21일이 부부의 날이었거든요.
‘가정의 달 5월에 둘(2)이 하나(1) 되자’는 뜻으로, 5월 21일이 부부의 날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의 날에는 남편은 아내에게 빨간 장미를, 아내는 남편에게 핑크장미를 주는 날입니다.
물론 홀로 되신 분들을 위해서는 자녀가 대신 아빠에게, 엄마에게 장미꽃을 전해 주는 날입니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미혼남녀는 아직 피지 않는 장미, 일명‘못다 핀 꽃 한 송이’를 선물합니다.
가정의 회복이야말로 허물어져 가는 문명을 세우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문명에 대한 최종 평가는 그 문명이 어떤 유형의 남편과 아내, 부모를 만들어 냈느냐에 좌우된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가정의 중심은 자녀가 아니고 부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국가보다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창조하셨고, 부모보다 자녀보다 부부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 부부를 창조하시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가정의 중심축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결혼이고, 그로인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의 중심축인 부부의 관계가, 안타깝게도 지금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여,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심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성경 창세기 1장 27절, 28절 말씀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가정 축복자임을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모든 부부들이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 행복한 부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시 한 번 결혼주례사를 듣는다 생각하시고, 부부의 행복과 축복원리를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부부의 행복과 축복원리는, 부부는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부부가 등산을 하던 중, 힘이 든 아내가 남편에게 콧소리를 내며 업어달라고 했습니다.
차마 남자 체면에 안 된다고도 말 못하고, 남편은 아내를 업고 가는데 등에 업힌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나 무겁지?"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그럼,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뎅이는 부었지."
잠시 후, 땀을 뻘뻘 흘리며 남편이 아내를 내려놓더니, 이번엔 자신을 업어달라고 합니다.
아내가 끙끙거리며 남편을 업었는데, 미안했던지 등에 업힌 남편이 물었습니다. "여보, 난 가볍지?"
그러자 아직 화가 안 풀린 아내가 낑낑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었지, 싸가지 없지, 쓸개 빠졌지. 얼마나 가벼운데?"
이런 부부는 하나가 아닙니다. 분명히 둘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이런 부부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31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부부는 결혼을 통해, 부모를 떠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합하여 한 육체로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즉 부부가 된다는 것은 모든 일에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쪽인 남녀가 하나로 완전해 집니다.
결혼을 통해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고,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고, 신앙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부는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것이 바로 부부입니다.
이렇게 둘이 합하여 한 육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 희노애락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아픔이 둘의 아픔이 되고, 한 사람의 기쁨이 둘의 기쁨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부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살아가기에 신령한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부생활을 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부부생활은 어떻습니까?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고,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셋이 하나 되는 신령한 연합을 이루셨습니까?
주님과 함께 둘이 하나가 되는 부부생활로, 가정과 부부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부부의 행복과 축복원리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부터 24절 말씀을 우리 여자 분들만 함께, 큰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 시작.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봉독한 말씀은 아내는 남편의 권위에 따르고, 주안에서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가정의 행복과 축복을 위해, 성경의 가르침대로 남편에게 복종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아내는, 결코 하나님께 복종하는 성도일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격언집인 탈무드에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남자를 늙게 하는 네 가지가 있는데, 불안, 노여움, 자식, 악처이고 그 중에 첫째는 악처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는 누구인가? 그는 순종하는 아내를 얻은 남자이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 공처가 - 아내에게 매여 사는 안타까운 남편을 말합니다.
경처가 - 아내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 경기를 일으키며 사는 불쌍한 남편을 말합니다.
기처가 - 아내를 보는 순간 기절하는, 기절초풍하는 남편을 말합니다.
사처가 - 아내를 보는 순간, 기절을 넘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남편을 말합니다.
이 유머 가운데 뼈가 있습니다. 이 시대 남편들은 똑똑한 아내보다 순종하는 아내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사소한 일로 남편인 엘버트와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왕의 남편인 엘버트 경은 너무너무 화가 나서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꽝 닫은 후 잠가버렸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에게 사과할 겸 방문을 노크했습니다. “누구요?” “나 영국 여왕이요.”
그러나 남편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여왕이 다시 부드럽게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요?”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예요. 문 좀 열어주시지 않겠어요.” 남편은 문을 열고 아내를 맞아주었답니다.
지금 이 시대의 남편들은 아내들의 따스함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내의 순종이 꼭 필요합니다.
유명한 음악가 바하는 35세 때 첫 부인을 잃고, 두 번째 아내인 안나 막달레나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순종하는 아내였습니다. 남편의 모든 일에 한 번도 ‘아니요’라고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하는 아내에게 늘 악보를 기록하는 것을 부탁했습니다. 13명의 자녀를 돌보느라 늘 힘들었지만 순종했습니다.
바하의 칸타타 300곡 중, 190곡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바로 아내의 순종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 아내로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순종의 삶을 통하여 남편들의 기쁨과 위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라는 감명 깊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한겨울, 당신의 퇴근 무렵, 따뜻한 붕어빵 한 봉지 사들고, 주차장에 서 있겠습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당신의 피로한 어깨를 그냥 느끼겠습니다.
당신이 들어오는 당신의 집을, 향내 나는 그런 집으로 만들겠습니다.
때로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로, 때로는 보리차 끓이는 냄새로, 때로는 진한 Chanel의 향기로,
말을 하지 않아도 피곤에 지친 당신을 위해, 나는 슬며시 레몬 넣은 홍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미모와 외모로서 당신 곁에 잠시 머무르는 여자로서가 아니라, 나는 당신의 가장 가까운 벗으로서,
있어도 없는 듯, 없으면 서운한 그런 맘 편한 얘기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아내가 되겠습니다.
잠을 청하기 위해 불꺼놓은 보금자리에서 대화하다가 동이 트는, 풍성해진 우리 맘을 발견하겠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나를 빌어 태어나는 아이가 장성해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당신으로 꼽는다면,
나는 영광스럽게도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여도, 행복해 하는 아내가 되겠습니다.
늘 사랑해서 미칠 것 같은, 꼭 내 것으로만 여겨지는 그런 아내가 아니라,
아주 필요한 사람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공기 같은 아내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행여 내가 세상에 당신을 남겨두고, 먼저 떠나는 일이 있어도,
가슴 한구석에 많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그런 현명한 아내가 되겠습니다.
지혜로와, 슬기로와, 당신의 앞길에 아주 밝은 헤드라이트 같은 불빛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호롱불처럼, 아니 반딧불처럼, 당신 가는 길에 빛을 비출 수 있는 그런 아내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내가 흰서리 내린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당신은 내게 정말 필요한 사람이었소.’
‘당신을 만나 행복했었소.’라는 말을 듣는 그런 아내가 되겠습니다.
세 번째 부부의 행복과 축복원리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우리 남자 분들만 함께, 큰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 시작.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할 일 한 가지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얼마큼 사랑해야 하는가?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주심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아내를 ‘사랑하라’고 할 때의 사랑은 ‘아가페’를 의미합니다. 곧 희생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즉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셨던 것처럼, 죽기까지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아내들은 남편들의 무관심, 남편들에게 무시를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폭언, 인격적 모독도 당하고, 심지어는 폭행도 당하고 사는 아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이 남편을 생각하면 87%가 스트레스가 일어나고, 우울증 증세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코놀리’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남편의 인격의 참 지표는 아내의 건강’이라고 했습니다.
남편들이 아내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 가에 대한 평가는 아내의 건강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생활 10년 된 부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아내보다 남편들이 요구한 것이 2배나 더 많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이 조용하고, 말 잘 듣고, 항상 웃고, 온순하고, 겸손하고, 순결하고,
인내하고, 친절하고, 손님대접 잘 하고, 집안 청소 깨끗이 하고, 싹싹하고, 소박하고, 검소하고,
무슨 일이든지 “아니요” 하지 않고, 남편의 말에 절대 순종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갖춘 아내는, 이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남편 된 성도 여러분! 남편의 가장 큰 본분은 그 아내를 사랑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남편은 아내를 희생적인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부인 교회를 위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치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신 희생적인 사랑으로 아내 사랑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헨리 스미드라는 분은 이렇게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그의 가슴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가슴에 있는 갈비대로 아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콜롬비아 바이블 컬러지에 로버트슨 맥퀼퀸이라는 학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 무리엘이 치매에 걸리자, 그 동안 맡아온 학장직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아내의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무리엘은 지난 8년 동안 건강이 점점 약해져왔다.
나의 아내 무리엘이 내가 함께 있어주는 것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내가 없으면 불안해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학장직을 사임하고, 아내의 곁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내가 42년 전 결혼서약을 하면서,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아내 무리엘을 돌볼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은 아내가 나를 40년이 넘도록 돌보아 왔지만, 이제는 내가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돌보는 것이다.
물론 의무감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얼마나 감동적인 고백입니까?
성경은 아내 사랑의 표준을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러므로 이 시대의 아담인 남편 된 여러분에게 아담의 사랑고백을 아내들에게 하라고 부탁할께요.
"아담이 이르되 나의 사랑하는 아내 하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사랑고백은 "당신은 내게 있어서 최고로 소중한 존재요. 내 생명과도 같은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아담의 아내 하와를 향한 이 사랑의 고백은 언제였습니까?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입니다.
아담이 처음 본 하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담이 하와와 첫선을 보는 자리에서 그토록 멋진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아담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배필로 짝 지워 주셨다!"는 이 믿음이 아담에게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아담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즉석 미팅에서, 그같이 멋진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아담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아담은 즉석에서 그 같은 사랑고백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부부된 여러분들에게 바로 이런 아담과 같은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 하나님!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내게 가장 좋은 아내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남편들만 아니라 아내들도 "오, 하나님!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내게 가장 좋은 남편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정의 행복은 바로 이런 부부의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멘입니까?
어떤 두 젊은이가 아주 뜨겁게 연애를 하다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일년도 채 안되어서 이혼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참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남편이 퇴근 후에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매일같이 이별가만 부릅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한 많은 미아리고개" 등, 이런 이별가만 자꾸 부르니까 결국은 이별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말이 중요합니다. 한 남편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에 이렇게 고백한 시가 있습니다.
근사한 카페에서 젊은 연인들이 마시는 커피보다, 당신이 자판기에서 뽑아 준 커피가 더 향기롭습니다.
회식자리에서 건네는 비싼 양주보다, 식사 후에 당신이 건네는 냉수 한 잔이 더 맛있습니다.
모피코트를 입은 사모님보다,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을 입은 당신이 더 아름답습니다.
갈비찜을 잘 만드는 일류 요리사보다, 라면을 푸짐하게 끓이는 당신이 더 위대한 요리사입니다.
허리가 으스러지도록 껴안는 젊은 연인보다, 오늘 하루도 수고하라며 흔드는 당신의 손이 더 뜨겁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값싸게 내뱉는 사랑보다, 늘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짓는 당신이 더 영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바로 나와 함께 늙어가는 당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살펴 주시고,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돌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배필을 주셨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장 좋은 배필을 주셨다는 이 믿음을 가질 때, 우리도 아담처럼 사랑고백을 하고,
이별가가 아닌 사랑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부 사이에 애정을 표현하면서 살아가고, 또 그렇게 노력할 때 함께 행복해 질 수 있게 됩니다.
네 번째 부부의 행복과 축복원리는, 남편과 아내가 각각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3절 말씀을 우리 다 함께, 큰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 시작.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한 부부가 차를 타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두꺼비 한 마리가 도로 가운데서 어슬렁거리면서 지나가는 게 보입니다. 그래서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다행히 두꺼비는 죽지 않았지만, 옆자리에 타고 있던 아내가 자동차 앞 유리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습니다.
아내는 "그까짓 두꺼비가 뭐가 중요하다고 급브레이크를 밟아 사람을 다치게 하느냐?"고 화를 냅니다.
그런데 차 밖으로 나온 부부는 그 두꺼비가 보통 두꺼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꺼비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구해 주신 답례로 세 가지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런 행운에 너무 기뻤지만, 서로 바라는 게 달라서 부부는 세 가지 소원을 쉽게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예배 마치고, 집에 돌아가셔서 세 가지 소원을 상의해 보십시오. 절대로 싸우지 마시고요.
차를 길옆에 세워 놓고 모의에 들어간 부부는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지만, 의견일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티격태격 말다툼을 한 후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 번째 소원은 같은 소원인 돈으로 하고,
나머지 두 개의 소원은 각자 한 가지씩 이야기하자." 그래서 3가지 소원을 말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부부의 공통된 소원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돈을 달라.' 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두꺼비는 그들에게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대궐 같은 저택에,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손 하나만 까딱 해도 온갖 시중을 들어주는 하인들을 거느리는, 그야말로 호의호식하며 살게 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부부가 각자 하나씩 소원을 말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먼저 부인이 두꺼비의 귀에 대고 조용한 말로 이렇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두꺼비님, 제 소원은요.
젊은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돼지처럼 먹고 노는 저 남편이 죽고 근사한 남자를 만나 재혼하는 것입니다."
남편도 두꺼비 귀에 대고 가만히 이렇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두꺼비님, 제 소원은요. 매일 앙알거리며,
잔소리만 하는 저 마누라가 죽어버리고, 멋진 여자와 재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여러분! 이 두 부부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둘 다 재혼도 하기 전에, 죽는 소원이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부부가 싸움을 하고, 남편이 집을 나가 방황하다가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댑니다.
그런데 그때 아내가 찬송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귀 기울여 들어보았습니다. / "돌아 와 돌아 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와 어서 와 돌아오라."
남편은 아내가 부르는 찬송소리를 듣고는, 남편인 자기를 생각하고 부르는 줄 알고 감동이 되어 문을 열고,
들어가서 화답합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부부는 오래 만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 끌어 안고 이런 찬송을 불렀답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부의 행복은 사랑을 받을 때가 아니라, 각자가 서로 줄 때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을 먹고 산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가정의 달 5월에 다시 한번 우리들의 가정, 특히 가정의 기본을 이루는 부부의 사랑을 점검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은 육체적으로 한 몸, 정신적으로 한 마음, 신앙적으로 한 믿음이 되어 있는 부부입니까?
아내 된 성도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순종하는 아내로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남편 된 성도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시고, 믿음의 반석도 든든한 여러분의 즐거운 동산,
오직 예수님만 섬기는 부부가 있는 복된 가정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08)
그리스도인의 부부생활
마가복음 10장 6-9절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셔서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중매를 서신 것입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들은 가정생활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계 각국에 체인점을 갖고 있는 미국의 유명한 호텔 '홀리데이 인'의 회장인 '윌리엄 월터'(William B. Walter)라는 사람은, 성공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네 가지 사랑을 말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둘째 가정을 사랑해야 하며, 셋째 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넷째 일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에 성공하려고 하기 전 먼저 가정생활, 부부생활에 행복하고 즐거운 승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서로 존경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이해해야 합니다.
메데루샤인은 왜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창조하셨는가를?
① 하나님은 여자가 교만해질까봐 남자의 머리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② 너무 정욕적이 될까봐 남자의 눈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③ 호기심이 지나칠까봐 남자의 귀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④ 말이 많을까봐 남자의 입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⑤ 시기 질투가 많을까봐 남자의 심장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⑥ 너무 돌아만 다닐까봐 남자의 발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⑦ 여자는 여자이니 정숙하고 존경하여 아끼라고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에도 승리적인 삶을 사는 행복한 가정은 서로 존경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이해하는 가정입니다.
2. 사랑을 발전시켜 즐거움을 더하는 부부입니다.
사랑은 결혼과 동시에 완성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예의 범절도, 이제부터 시작이지 완성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혼하고부터 더욱 깊고 즐거운 사랑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서로가 배우자의 민감한 부분을 찾아 환심을 사도록 노력하면서, 남편은 구태의연한 체면에서 탈피하며 부인은 남편을 위하여 단정하고 화사한 옷으로 미소 띤 얼굴로 남편을 맞이하고, 부부간에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아내의 할 일은 자기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지 개심 시키는 것이 아니다"고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아내 '루스 그래함'은 말했습니다.
잠언 5장 18절에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고 했으며, 히브리서 13장 4절에는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고 하셨으니, 부부의 침실은 최초의 에덴동산이니 육체로 부부간에 즐기는 것은 사랑의 즐거움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부부간에 육체의 사랑은 "서로의 충족관계요, 자신의 몸을 아끼는 행위요, 사랑의 표현이라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3. 없는 중에도 절제하여 서로 감사의 조건을 찾는 부부입니다.
절제가 없고 감사가 없는 가정 치고 즐거운 가정이 없으며, 감사하는 가정이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실 때 남자를 지배케 하려고 했다면 아담의 머리로 여자를 만드셨을 것이다. 만일 여자로 남자의 노예가 되게 하려고 했다면 아담의 발로부터 여자를 만드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었으니 이것은 남녀의 인권이 동등함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여자의 인권을 존중하고 서로 절제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승리적인 삶을 사는
행복한 부부가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벧전 3:1-8, 엡 5:21-22, 딛 2:5).
4. 긍정적으로 살면서 서로 일하는 부부가 승리적인 삶을 사는 행복한 부부입니다.
평생을 함께 살면서 부부간에 대화나 생활이 시종일관 부정적인 삶을 사는 이가 있고, 그 반대의 삶을 사는 가정이 있습니다.
평생 일하지 않고 사는 이가 있고,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시간까지 일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승리의 삶을 사는 부부는 열심히 일하며 긍정적인 삶을 사는 부부가 행복한 부부입니다.
5. 예수님을 내 집주인으로 모시고 믿음으로 사는 부부가 승리적인 즐거움의 삶을 삽니다.
제일 행복한 가정은 여호와를 모신 가정이라고 시편 128편에 말씀했고, 여호와가 허락하지 않은 집은 내 것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국가가 아니면 존립할 수 없다고 시편 127편에 말씀했습니다.
세상 것을 다 가져도 예수님을 버리면 다 잃게 되고, 세상 것을 다 잃어도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세주로 모시면 다 얻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바람이 몰아치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마 7:24).
우리 모두 예수님을 내 집 주인으로 모시고 믿음으로 살아 비가 오고 바람이 몰아쳐 홍수가 나도 흔들리지 않는 가정, 무너지지 않는 부부가 되어, 부부생활의 승리하는 즐거운 가정, 행복한 부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하고 승리하는 부부의 생활은
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이해하는 부부
② 사랑을 발전시켜 즐거움을 더하는 부부
③ 없는 중에도 절제하며, 서로 감사의 조건을 찾는 부부
④ 긍정적으로 살면서 서로 일하는 부부
⑤ 예수님을 내 집 주인으로 모시고 믿음으로 사는 부부 라고 했습니다.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가정과 부부의 생활속에 충만하사, 승리하는 행복한 부부생활, 가정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