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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묵상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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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89회 작성일 18-02-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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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묵상 자료집

 


사순절에서 부활절까지 이어지는 절기는 교회력에 있어서 대강절에서 성탄절까지 이어지는 절기와 함께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 중의 하나이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봄’을 뜻하는 "Lent"로 불려지기도 한다. 봄에 이 절기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 절기는 성도들이 신앙을 성장시키고 회개함으로 부활절을 위해 준비하는 시기이다. 이 절기는 특히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때이다. 사순절은 특별한 회개일인 속죄일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2월 25일)에서 시작되어 성금요일(Good Friday, 4월 10일)의 슬픔과 비극 가운데 끝난다. 사순(四旬)이라는 말은 40일을 뜻하는 한자말이다. 올 해 사순절은 2월 25일부터 4월 11일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 기간이다.

사순절은 자기 근신과 금식의 기간 즉, 영적 훈련의 기간이다. 사순절은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으로 향해가는 순례로 이것에는 자기부인이 포함된다. 사순절에는 자신이 죽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번 사순절에는 다음 사항을 실천해 보자

1)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성경을 읽는다.

2) 매일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

3) 가능한 범위 내에서 금식을 한다. 기호식품(커피, 초콜렛, 담배, 술), 군것질, 오락을 삼간다.

4)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 주변에 아픔을 당하는 이웃과 친구를 찾아보고,

그들을 찾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돕고, 복음을 전한다.

 

첫째날

주님, 주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시139:1)

묵상할 성경 말씀: 시편 139편

첫 날부터 넷째 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무엇을 행하시며, 사람은 무엇이며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묵상합니다. 오늘은 시편 139편을 읽으며 하나님의 가까우심과 함께 계심과 사랑하심을 느껴 보십시오.

 

시편 139편은 4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6, 7-12, 13-18, 19-24

첫째 단락에서 하나님의 현존(現存)과 전지(全知, 모든 것을 아심)는 인간의 행동반경과 그 육체에 이르기까지 온통 인간을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내가 내 자신에 가까운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일상생활의 모든 활동의 핵심부에서 나에게 존재와 의욕, 그리고 행동을 허락하고 계신 분입니다.

둘째 단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 우주 공간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피하여 달아날 곳도 없습니다.

셋째 단락에서 우리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일 주님이 무엇을 미워하셨더면, 당신은 어느 것도 창조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지혜서11:21-12:2) 어머니가 사랑으로 자녀를 출생시키듯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가야 할 사랑의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넷째 단락은 시인의 기도입니다. 나와 함께 계시고, 어느 곳에나 계시고,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내가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를 살피시어 영원한 길로 인도해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이다.

 

하나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나를 철저히 시험해 보시고, 내가 걱정하는 바를 알아주십시오.

내가 고통받을 길을 가고 있지나 않은지 나를 살펴보시고,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둘째날

주, 우리의 하나님, 주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시8:1)

묵상할 성경 말씀: 시편 8편

하나님은 어디에나 현존하십니다. 하늘과 달, 태양과 별들에도, 깊은 바다 속과 동물들의 무리와 겨울에 소복소복 내리는 눈 속에도 그분은 계십니다. 대자연의 이 모든 요소들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그분의 뒤따를 수 없는 부드러움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인 그분, 따라서 그분은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당신의 현존의 흔적을 남기시는 분입니다. 돌풍의 힘센 바람을 만날 때도 나는 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가을 날 아침마다 내리는 서리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자상한 사랑과 보살피심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시편 8편의 시인은 자기 시의 처음과 끝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에 대한 놀라움과 동시에 기쁨의 환성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창조된 이 세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 주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 지요.”

그런데 시인은 5절에서 우주와 그 삼라만상 가운데 사람이 절정이요 으뜸가는 존재란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4절에서 사람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부족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창조한 온 피조세계를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젖먹이와 어린이들의 찬송을 통하여 원수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2절)

주께서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주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셋째날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시1:1)

묵상할 성경 말씀: 시편 1편

시편 1편은 인간의 자유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갈래의 길, 곧 삶과 죽음,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성공과 실패를 첨예하게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인간은 말할 것도 없이 삶을 선택하여, 어리석음과 사람을 죽음과 실패로 인도하는 우상숭배의 길을 배척합니다.

복된 사람은 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서 살아가지 않고 오직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복된 사람은 언제나 물이 풍부하게 흐르는 시냇가에 굳건히 뿌리내린 거목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나무의 잎사귀가 시들지 않아서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흔히 나무는 수직선의 형상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아래에는 뿌리가, 위에는 열매가 달린 과실수가 그 의인의 모습입니다. 복된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을 밤낮으로 묵상하여 그 결과로 지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 거목의 뿌리가 하나님의 말씀이었기에 그런 거목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악인의 모습은 복된 사람의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악인들의 모습은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곡식알의 ‘겨’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곡식의 알맹이가 아닌 겨는 시냇물 곁에 심어진 나무와는 정반대로 바람에 흩날리는 성분을 지녔고, 움직임도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인 방향입니다. 겨는 곡식알이 아니므로 뿌리를 내릴 수도 없습니다. 겨의 성분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음을 표상합니다. 결국 악한 자들이 성공할 가능성이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참된 사람되게 하는 도구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넷째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묵상할 성경 말씀: 에베소서1:3-14

 

세계와 그 가운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피조물을 통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왜 이런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은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의 계획은 인류 역사의 세세대대로 이어지며 이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계획을 통해 보이는 존재들과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모두 사랑 안에 일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각자 안에 실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 1장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운명이 예외적으로 위대하고 영원하며, 또 우리의 희망은 그 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미리 세우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따라 예정하셔서,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었음으로약속하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다섯째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묵상할 성경 말씀: 누가복음5:1-11

 

넷째 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과 그분의 계획하심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묵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 관하여 묵상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들을 알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합니다. 오늘부터 며칠 간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죄악으로 얼룩진 우리의 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죄악이란 원래 자기 의지로만 자기 존재를 실현하고자 하는 고집,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사랑의 관계 안에 자신을 두기를 거부하는 것, 모든 의존의 거절, ‘나’라는 존재의 고독속에 안주하려는 아집입니다. 이냐시오라는 분은 죄란 “우리 주 창조주 하나님께 존경과 순종하기위해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죄란 개인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근본적인 분열의 상태입니다. 나는 두 갈래로 분열되어 있는데, 하나는 나를 ‘높은 곳’으로 부르고 있는 사랑과 빛의 경향이요, 다른 하나는 나를 낮은 곳으로 유인하고 있는 ‘내 나쁜 마음’의 경향입니다. 내 마음의 선택을 따라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를 조금지었다, 많이 지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낫다는 차원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란 망각이나 나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살고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세상을 거꾸로 뒤집어 엎어 버리는 일종의 존재론적인 난폭한 무질서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애매모호한 욕망, 우리를 옭아매는 두려움, 우리 자신만을 찾는 이기주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우리의 본능들, 무질서한 우리의 생각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나’만이라는 이기주의의 중력에 눌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나는 내 존재의 뿌리 속에 있는 심각한 죄악의 상태를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속의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여섯째날

하나님께 속한 자는 그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라.(요8:47)

묵상할 성경 말씀: 요한복음8:21-47

 

우리는 지금 둘째 단계의 둘째 날을 맞고 있습니다. 이 둘째 단계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랑의 결핍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안된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우리 자신을 촉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 악의 심장부로 내려가는 중에 나는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알고자 노력하는 것은 나의 구체적인 악이며,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당황함’입니다. 그리스도 그 분이 내 안에서 그 의식을 일깨우고 있으며, 그리스도 자신도 그 안에 갇히게 함으로써 나를 그 부끄러움과 당황함에서 구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은 우리를 죄의 본질 가까이로 데려갑니다. 아들에 의해 해방된 하나님의 자녀들과 자기네 아비의 욕망을 성취시키는 악마의 자식들을 대립시키어 투명함, 진리, 관계, 생명, 아버지의 뜻을 항상 따름, 사랑안에서의 자유로움 앞에, 자아 폐쇄, 타자의 인정 거부, 관계의 부재, 거짓말, 고독과 분열을 세워 놓고 있습니다. 한 존재가 진실되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을 존재케 하는 ‘관계’를 마음 속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 계신 아들처럼 우리도 존재를 선물로 준 모든 이, 혹은 그 존재에 참여케 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우리의 삶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이제 죄는 그 깊은 본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하게 하고 사랑안에 그 존재를 머물게 하는 ‘관계의 거부’입니다. 마음의 경향이 죄를 결정합니다. “너는 네 자신이 닮고자 결정한 자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네가 만일 아들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너는 그 때 진리를 알게 되고 또 진리는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네가 만일 너의 특권들, 가령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특권일지라도 그것들 안에 네 자신을 폐쇄시킨다면, 그와 같은 너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너의 욕망은 자기 자신 안에 그리고 죽음 안에 스스로를 폐쇄시키는 악마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일곱째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묵상할 성경 말씀: 로마서7:7-25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은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들의 죄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향하는 그 마음을, 자기자신에게로 바꾸어 버리는 이 죄는 온 인류에게로 퍼져있습니다. 창조 속에서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방인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고, 또 유대인은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을 선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물을 자기의 영광으로 돌리며, 자기를 다른 이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하나님앞에서 죄있다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과 죽음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혼자의 힘으로 그 생지옥에서 탈출하려고 하면 오히려 내적인 분열을 더욱 체험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악을 일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혹은 이방인 모두에게 구원과 생명이 주워지고 의로워지는 것은 우리의 의로움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만 하나님은 모든 분리의 벽을 무너뜨리고 미움을 죽임으로써(에베소서2장)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에 의해 길게 묘사된 로마서1-11장의 이 죄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이자 또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어떤 때에는 이방인 존재하고 어떤 때는 유대인이 존재하고 있어, 내 속의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물에 집착하여 그것으로 충분한 양 거만을 떨고 있는가 하면, 내 속의 이방인은 자아를 왕으로 삼고 결국 죽음의 노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러한 죄의 모습들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묵상해 봅시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리는 사람들이여,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 죽음을 낳는 세상의 슬픔과는 달리 그 눈물은 ‘하나님에 의한 슬픔이며’ 하나님은 그 슬픔을 통하여 우리에게 회개를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고후7:10)

 

여덟째날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없는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다(눅15:7)

묵상할 성경 말씀: 누가복음15장

기뻐하며 살찐 송아지를 잡아 풍성한 음식을 장만하여 먹고 마시고 담소하는 즐거운 잔칫집의 분위기는 누가15장 전체를 감싸고 있는 기본요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중심주제가 되는 잔치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세 개의 비유를 이야기하게 하는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잔치를 벌이게 되는 동기는 잃었던 양 한 마리, 잃었던 은전 한 닢, 잃어버린 작은 아들을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상실과 회복, 그리고 축제와 환희라는 주제 덕분에 누가복음 15장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어제 읽었던 로마서의 말씀에 비추어 오늘의 본문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아들의 죄는 자유를 행사하여 유산의 몫을 한꺼번에 차지하는 이방인의 죄입니다. 그는 나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은 깡그리 나의 차지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기 때문에 결국 유산의 탕진으로 치닫고 맙니다. 그가 이 탕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그에게 모든 것을 주는 분인 아버지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은 빵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말씀드려야지....” 작은 아들의 자유는 다시 사랑으로 자신을 개방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로마서에서 보는 것처럼 나무랄 데 없는 유대인 큰 아들은 이 사랑에 마음의 문을 꼭꼭 닫아버립니다. 그는 자신의 옳음을 핑계로 권리를 요구하고 또 동시에 제 동생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속한 모든 것이 네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잘못의 횟수가 얼마나 빈번하였던가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사랑으로 자기 삶의 방향을 돌려 거기서 모든 선의 원천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탕자건, 나무랄데 없는 큰 아들이건, ‘모든 피조물 중의 첫 아들’인 예수님의 의로움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아홉째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묵상할 기도문: 위의 기도문

 

동방정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문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생 동안 무한히 반복하더라도 그 진리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온 종일토록 이 기도문을 반복하며 묵상해 봅시다.

때때로 우리의 죄에 대한 느낌들은 가짜일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매우 불쌍한 죄인이며, 나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기도 중에 원통함, 실망, 죄책감, 타자와의 비교, 불건전한 슬픔 등이 생기면 그것들은 분명히 성령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흔적을 지닌 느낌들은 용기와 부드러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사랑을 향해 좀더 자신을 개방하고 싶은 욕망 등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느낌을 낳고 또 동반하게 하는 지식은 자신 혹은 이웃들에 대한 분석의 결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이 지식은 모든 비교를 제거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심층부로 내려가게 하는데, 거기서 우리는 스스로 선행을 할 수 없다는 것과, 동시에 모든 완전한 것으로 불리움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깊은 구렁 속에서 나는 주님께 부르짖고 있나이다.”(시편130). 내가 부르짖었더니,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시편18:20)

 

자신의 죄에 대한 묵상을 묵상하며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아보십시오 우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눈앞에 모시고 그분께 물어보십시오. 어떻게 주님은 창조주이시면서 사람이 되셨으며, 어떻게 영원한 삶에서 현세적인 죽음에 이르러 내 죄들을 위해 그렇게 죽으셨는지.” 다음에 내 자신에게 눈을 돌려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열째날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 내안에 정직한 영을 새 영을 넣어 주십시오(시51:10)

묵상할 성경 말씀: 시편51편

 

이제 우리는 셋째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묵상을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더욱 깊이 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죄악 속에 예수님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인류의 가장 깊은 죄악속으로 내려갈지라도 예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깊은 악의 구렁, 지옥 속에서 구원의 차원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지옥보다 더 강한 사랑의 차원입니다.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비의 원천을 만납니다. 아토스라는 분은 말했습니다. “지옥 속에 의식적으로 머물라. 그러나 결코 절망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거기서 나를 위하여, 모든 이를 위해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는 어린 양, 구세주로 계신다. 그분은 또 나를 형제애로 인도하신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하여 친교가 가능해집니다. 나는 그분께 내 존재를 드리고 또 그분은 당신의 존재를 나에게 주십니다. 나는 그분앞에 나의 모든 죄와 인류의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서는 예수님의 은총이 더 풍성하게 내리는 법입니다.(롬5)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가장 깊은 곳, “내 나쁜 마음의 심연으로 내려가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구렁텅이로 내려감은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정화시켜 줍니다. 그 내려감은 사랑에 의해 이끌려 다시 올라오게 됩니다. 자기 안에서 악에 대한 저항감을 느끼고 고통스럽지만 자신을 변화시켜가게 됩니다. 나는 악을 폭발케 하면서 악에서 빠져 나옵니다. 나는 인류와 세상의 심장부인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다시 발견합니다. “나를 주님의 면전에서 내치지 마옵소서. 주님만이 나의 생명이십니다. 구원은 당신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나의 가장 깊은 곳, 악한 생각이 가득한 곳, 더러운 생각이 가득한 곳으로 깊이 내려가봅시다. 거기서 예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시는 은총을 발견합시다.

 

열한째날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사함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눅7:47)

묵상할 성경말씀: 누가복음7:36-50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칼로 난도질하듯이 분석하는 것을 의미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독하게 남아있을 뿐입니다. 시몬이 식사에 불청객으로 온 그 여인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비밀스럽게 보시는 그 깊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여인을 인정했고, 또 예수님에 의해 인정받았습니다.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 자기 자신을 아무것으로도 고발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행위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도성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알고 있고, 또 바리새파 사람 시몬은 그 누구보다도 그 여인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몬은 율법과 죄의 수량 그리고 개인적인 정당화라고 하는 것들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영역밖에 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존재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하지만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그녀는 스스로가 죄인이고 또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분석이나 수량, 죄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흘리는 그녀의 눈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눈물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죄들, 수많은 죄를 예수님에게 넘겨버립니다. 사랑이란 친교요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욕구이기 때문에 분리의 모든 벽을 허물어 버립니다.

오늘 하루, 말이 아닌 눈물로 기도하며 나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 봅시다. 거기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봅시다. 거기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열두째날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묵상할 성경말씀: 누가복음19:1-10

 

오늘 말씀의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기쁨과 ‘가난의 정신’을 갖게 되는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모르던 삭개오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자 힘쓰고,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결국 구원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얼른 나무에서 얼른 내려와 기뻐하며 예수를 모셔들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삭개오는 많은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것이 그를 기쁘게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는 로마의 앞잡이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돈을 모으는 자에서 자기 돈을 나누어주는 사람으로, 나무 위에 있다가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으며, 예수님을 사람으로 알다가 구세주로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 속에서 많은 군중들과 삭개오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군중들은 삭개오를 비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삭개오에 의해 많은 피해를 보고 가난해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군중들도 역시 예수님을 간절히 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삭개오의 집으로 가는 예수님을 보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만과 고집에 휩싸여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4배의 손해배상을 해주는 것으로보아, 군중들은 부자가 되고 삭개오는 가난한 자가 됩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했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이 구주라고 깨닫게 됩니다.(9절)

경제적인 차원에서 볼 때 처음에 부자인 삭개오는 가난한 자로 변하고 반대로 군중은 처음에는 가난하였지만 부자가 됩니다. 군중은 예수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지만, 삭개오는 그의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먹고 자게 됩니다. 삭개오는 신바람나고 기쁨에 가득찬 인물이었지만 군중은 불평과 슬픔에 젖어 있는 무리들입니다.

오늘 하루, 삭개오가 만난 예수님을 만나고 묵상하며 우리들의 삶속에서도 삭개오가 누렸던 기쁨과 가난의 정신을 이루어봅시다.

 

 열셋째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막8:34)

묵상할 성경말씀: 마가복음9:34-38

 

이제 우리는 네 번째 단계로 접어듭니다. 오늘부터는 「회개에서 사명으로」으로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과 「너는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우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심을 묵상하고 그 분 삶의 신비들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이 계획에 가장 잘 부응할 수 있는 방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부르심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의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발견해야 할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에게로 가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해가야 한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오실때까지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이 이루어야 할 소명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소명이란 어떤 업적보다 인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자기 삶의 중심인 사랑을 발견하는 때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삶에서도 똑같습니다. 인격적인 예수와 함께하지 않는 한, 그분을 위해 시작한 사업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고 해도 실패의 쓴 잔을 마실 수 있고, 또 인간적 성공으로 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 혹은 저것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에 앞서 “그분 곧 그리스도는 나에게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소명이란 언제나 전진하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소명에 충실하겠다는 이유로 그 발견의 때로 되돌아가기를 원하지만, 소명이라는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보물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시켜야 할 하나의 삶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지 말고 오히려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뜻을 이루는데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열넷째날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막12:33)

묵상할 성경말씀: 마가복음12:28-34

 

부르심을 받는 사람은 두갈래 방향으로 동시에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나는 수평적인 방향으로, 다른 하나는 수직적인 방향입니다.

수평적인 부르심이라는 사람으로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인간으로의 부르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증진시켜야 할 이 인간적인 것이라는 무엇입니까? 사람을 향상시킨다는 욕망속에서 사람들은 흔히 우리에게 거짓 신들, 우상들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인간을 자기 욕망들과 거짓스러운 발전, 그리고 노예화하는 기술에 떠넘김으로써 비인간화합니다. 이때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더 이상 모르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의 연구, 실현, 그리고 정복을 통해 자유와 상호인정 속에서 사랑의 힘에 자신을 개방할 때 오직 인간답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를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요,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것도 오직 그 사랑의 역동성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이 자기 본연의 인간이 되는 것은 헌신, 봉사, 철저한 자기 희생 등으로 표현되는 모든 사랑의 응답의 깊이를 발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르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을 우리 각자 안에서도 실현할 것을 촉구하는 부르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에베소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을 높은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분은 죽음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사랑안에서 사신 후에 십자가를 통해 이 업적을 이룩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봉사입니다. “그 봉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선물로 내 주는 것입니다.” 고통과 영광 안에서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실현한 것을, 그분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 안에서 계속 실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제자들을 모으셨고,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하루 이 두 부르심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며 살아갑시다. 사랑이란 두 글자가 이 묵상을 도와줄 것입니다.

 

열다섯째날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히11:26)

묵상할 성경말씀: 히브리서11장

 

하나님의 이러한 부르심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응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방식은 끝까지 사랑하고, 우리에게 자신을 넘겨준 ‘종’(엡5:2)의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그분과 함께 우리 안에 있는 자아 추구, 자기 사랑의 모든 것을 공격하도록 촉구합니다. 나를 위하여는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으면서, 내 존재를 오로지 그리스도께 드리며 살기로 다짐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림으로, 헌신함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 헌신은 나의 깊은 곳, 아버지께서 비밀스럽게 나를 보시는 그곳, 내가 그분과 함께 홀로 있는 곳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많은 것들을 하기 위해서, 혹은 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모순에 찬 비난이나 멸시를 받더라도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하여 그분만이 원하는 것을 수락합니다. 나는 무슨 일이 닥치든 언제나 만족합니다. “하나님, 주님만을 원하옵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간에 나는 당신을 받아들이옵니다.”

그렇게 해 나갈 때 나는 그분과 함께 있는 그 깊은 곳에서 갑자기 온 우주가 나의 동반자임을 발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또 그분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이 ‘구름처럼 허다한 증인들’과 함께, 아브라함처럼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면서 길을 떠난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이 헌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 목숨을 얻는다.”(마16:25)

오늘 하루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께 드릴만한 나의 모습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깊이 묵상하며 지내봅시다.

 

 열여섯째날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20:22)

묵상할 성경말씀: 마태복음20:20-28

 

오늘 우리는 우리의 헌신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는가를 묵상합니다. 어떻게 내 헌신을 보장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끔씩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처럼 말합니다.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이 어머니는 자신과 아들들이 예수님께 행한 것들, 업적들을 의식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상을 달라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머니의 부탁을 한 마디로 거절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부탁을 계기로 그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마시는 잔을 각자가 마실 것을 요구하고 그리고, 각자 자신을 드릴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종으로서 헌신한 예수님에게 요구되었던 잔이었습니다. 그 잔이 우리들 각자에게도 요구되는 것입니다. “너희들 가운데는 권위를 힘으로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너희들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다. 너희들 가운데서 누가 첫째요 누가 꼴찌인가를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그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사도들은 응답합니다. 과연 그들은 자기네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분의 잔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기네가 그분과 함께 그 잔을 마실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분은 이러저러한 형식의 봉사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런 식으로 우리가 응답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데 두려움을 갖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보다는 자신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개방시켜주는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은총으로 나 자신을 드립니다.” 주님의 은총은 우리를 끊임없이 헌신하도록 돕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들의 업적이 아니라, 오늘의 있는 모습 그대로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열일곱째날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20:22)

묵상할 성경말씀: 요한일서2:15-17

 

이제 우리는 다섯 번째 단계로 접어듭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후에 우리들의 삶에 주어지는 다양한 상황들을 어떻게 식별하고 판단할 것인지를 묵상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우리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방식에 우리 자신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그 방식을 우리 자신의 삶의 선택들에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는 가난한 자가 되어라, 다시 어린이가 되어라, 네 자신을 너의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길 위에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선택에 있어 실패할 것입니다. 오늘은 유혹에 관한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우리들은 삶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유혹을 만나게 됩니다. 유혹은 소유하고, 또 그 소유물에 집착하는 것, 사람들로부터 받은 영광, 일시적인 성공, 모든 형태의 권력에 집착하는 자아 의지에서 생겨납니다. 유혹을 받을 때 자아는 ‘자기의 소유’로서 집착하게 되는 어떤 것과 연결되는데, 그것은 육체의 건강과 아름다움, 돈, 성공, 이루어 놓은 업적, 완벽성 등입니다. 자기를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는 그는, 자기가 원하는 사물과 스스로를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물 자체를 절대화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절대화된 사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배척해 버립니다. 신앙까지도 말입니다.

 

이 유혹은 우리 모두를 걸고 넘어지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 우리의 덕행들, 우리의 업적들, 어떤 일에서든지 나의 권리를 찾고 주장하려고 합니다. 이 거대한 욕심은 우리가 속한 학교, 가정,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유혹은 내 안에 선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극복해야 할 유혹은 자기의 권력과 부, 자랑(각자는 어느 모로 보나 어떤 부와 능력과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다)만이 아니라 영적인 힘과 부를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려는 그런 유혹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를 깊이 묵상해 봅시다.

   

열여덟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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