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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주일]돌.탕.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교회(눅 15: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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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른곰
댓글 0건 조회 561회 작성일 17-10-28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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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5:25-32 <돌.탕.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교회>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독일의 마틴 루터가 당시 로마교회, 교황의 타락, 면죄부 판매와 같은 부패상을 바라보면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의 유명한 구호가 있지요. 오직 은혜! 믿음! 오직 성경!... 마틴 루터, 존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성경말씀에 기초해서 개혁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서 오늘의 개신교(기독교)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특히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것 중 하나가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교회가 요구하는 성례들에 다 참여해야 한다든지, 어떤 선행이나 행위에 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어떤 공로나 업적이 구원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리나 사상은 성경의 구원관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구원은 사람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당시 율법적인 사고와 습관에 젖어 있는 교회를 향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은혜의 회복을 외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구원이 오직 은혜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면서, 우리의 신앙은 변질되기 쉽습니다. 은혜로 시작된 신앙이 율법화되면서, 하나님이 주인되셔야할 교회가 사람이 주인되는 교회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인되는 교회가 되면 중세교회의 모습이 또 다시 재현되고, 그렇게 되면 교회는 언제까지나 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창립 34주년을 맞이한 서울중앙교회가 어떻게 하면 다시금 새로워져서 성장해갈 수 있을까 기도하면서 생각하는 가운데, 그 성장의 해법이 <오직 은혜>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성령님께서 저로 하여금 감동을 주셔서 눅 15장을 펼쳐서 보게 하셨습니다. 눅 15장 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복음의 핵심을 잘 표현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탕자 비유>하면 그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에 초점을 맞추어서 읽는데, <탕자 비유>의 진수는 맏아들과 아버지와 대화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맏아들과 아버지와의 대화 속에서 그 아버지의 진정한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은혜의 핵심이요, 그 은혜가 우리 안에 회복될 때 비로소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영적 부흥과 성장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돌.탕.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교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돌.탕.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의 약어입니다. 돌.탕.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오게 되고,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오면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제 돌.탕.아버지의 마음으로 한 번 들어가 봅시다. 우선 본문 앞 부분에 보면,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 중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미리 재산을 달라고 해서 집을 나갔습니다. 당시 율법 규정에는 재산 상속시, 장자는 2/3를, 차자는 1/3을 상속하게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신 21:17). 그런데 사실상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미리 유산상속을 해달라는 것은 큰 불효입니다. 더욱이 이 둘째 아들은 재산을 받아가지고 가출을 해서 밖에서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려서, 나중에는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잘못한 줄 알고,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아버지 입장이었다면, 그 둘째 아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를 들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10억이란 재산을 받아서 밖에 나가서 좋지 않은 일에 다 써버리고 무일푼이 되어서 돌아왔다면, 그 아들을 다시 받아주실 수 있습니까? 인간적으로는 그런 배은망덕한 아들을 다시 받아준다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리 착한 부모라도 그런 불효막심한 아들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혼자 살겠다고 집을 나가면서 자기 몫을 다 챙겨나간 사람이 무슨 면목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며, 또 그런 아들을 누가 다시 받아주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을 다시 받아 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돌아와서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회개했습니다. 눅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이런 회개에 앞서서 이미 그 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명해서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도록 했습니다.  
  
참 극적인 드라마 아닙니까? <탕자의 비유>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세상에서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대죄인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신다는 진리를 말해줍니다. <탕자의 비유>를 읽어보면, 그 안에 천국이 어떤 곳인지 보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오늘 본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 잔치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알지 못했던 첫째 아들, 맏아들이 일하다가 집에 들어왔을 때의 일입니다. 맏아들이 집에 돌아와보니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렸고, 그 이유를 종에게 알아보니 집나간 동생이 다시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맏아들이 노해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28절). 아버지는 맏아들 이야기를 듣고 나와서 맏아들을 권해서 들어오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29-30절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말대로라면, 맏아들은 모범생, 효자였습니다. 아버지와 집안을 위해서 충성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하나라도 잡아서 잔치를 벌인 적이 없었는데, 저 방탕한 동생, 아버지 살림을 창녀들과 더불어 다 써버린 저 죄인을 위해서 이렇게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인다니...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때 아버지는 그 맏아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31-32절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먼저는 맏아들을 인정해주었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누가 뭐래도 너는 이 집안의 장자요, 앞으로 내가 죽으면 내것은 다 네것이 된다... 그러면서 둘째 아들로 인하여 잔치를 벌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내가 잃었다가 얻었다>... 오직 그 이유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생각하면, 윤리적으로 생각하면 맏아들의 생각대로, 둘째 아들은 다시 집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다시 들어온다고 해도 아들로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 들어와야 됩니다. 잔치가 웬 말입니까? 비난을 받으면서 들어와도 겨우 들어올까말까한데... 
그 엄청난 재산을 한 순간에 다 말아먹고 돌아온 아들을 보고 기뻐할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어디에다가 그 많은 재산을 다 썼느냐> 일일이 추궁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피땀흘려 모은 재산인데... 아들이 회개하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이 진실로 한 고백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나는 너같은 아들 둔 적이 없다. 나가라. 다시는 집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라> 냉정하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조금도 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기뻐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가 잔치를 벌일 정도로 기뻐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아들이 돌아왔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 집나간 아들! 몹쓸 짓을 한 아들! 율법적으로 판단하면 정죄받고 심판받아야만 하는 아들! 그런 아들이었지만, 그런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받아주었다. 집나갈 때 가지고 나갔던 아버지 그 많은 재산... <너 내 재산 어쨌냐> 재산의 <재>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 그 자체가 기뻤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돌.탕.아버지의 마음이요, 오늘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어떤 죄인이라도 다 받아주십니다. 율법적으로 볼 때 범죄한 자라도 회개하고 그저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다 받아주십니다. 둘째 아들의 과거를 묻지 않았듯이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저 집으로 돌아왔다는 그 자체로서 기뻐하십니다. 잔치를 벌일 정도로 기뻐하십니다. 혹 탕자 비유를 읽을 때마다, 둘째 아들을 보면서 얄밉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재산 다 탕진하고 무슨 낯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또 거기에 대환영을 받고, 다시 아들로 살아갈 수 있나... 그러나 여러분, 그 둘째 아들인들 그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아마도 평생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아버지를 향해서나 형님을 향해서 종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돌.탕.아버지가 계신 곳이 천국인데, 오늘 우리 교회가 그런 천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돌.탕.아버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아들을 기쁨으로 받아주었던 것처럼, 우리 교회도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그 어떤 죄인이라도 기쁨으로 받아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사람이라도 우리 교회에 오면 기쁨으로 받아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의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닙니까? 사실상 이 <탕자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오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면서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비유를 하시면서 <탕자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탕자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는 과연 오늘 돌.탕.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돌.탕.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교회입니까? 혹시 탕자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교회는 아닙니까? 깊이 생각해보면, 내가 예수믿고 하나님의 집에 들어온 것도 오직 은혜로 들어온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올 자격이 없지만, 은혜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나는 집 밖에서 방황하는 둘째아들이요, 동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맏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천국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오늘의 서울중앙교회도, 한국교회도 없습니다. 
제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대학원에서 신약학으로 코스웤을 다 마치고 마지막으로 어렵게 어렵게 논문을 써서 마지막으로 논문지도교수 앞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 교수님은 그 학교에서 최고의 실력자이면서 깐깐하기로 소문난 교수님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허점을 발견하면서 논문을 집어던지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 분 앞에 논문을 내놓았습니다. 최종적으로 그 분의 싸인이 있어야만 통과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거의 무표정인 그 분의 얼굴에서 이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김충현, 자네는 율법으로는 안되지만 은혜로 해주는거야> 한 마디... 싸인... 그러면서 작은 미소를 지어주셨습니다. 그 때 저는 속으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만큼 <은혜>의 의미가 깊이 깨달아진 적이 없었습니다. 

34년 동안 열심히 달려온 서울중앙교회! 이제 앞으로도 달려갈 것입니다. 바라기는, 21세기, 거친 바다를 항해하게 될 우리 서울중앙교회가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교회로 계속 성숙해져서, 이 땅에 방황하고 죽어가는 한 영혼을 살리고 또 살리는 구원의 방주로 계속 성장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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