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멋을 회복하는 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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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9:15-19) “15.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16. 주여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따라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 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강한 손으로 주님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은 명성을 얻으신 주 우리 하나님, 우리가 죄를 짓고,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지난날에 우리를 구하여 주셨으니, 이제 주님의 성 예루살렘 곧 주님의 거룩한 산으로부터 주님의 분노를 떠나게 해주십시오.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의 죄악 때문에, 예루살렘과 주님의 백성이 우리 주위에 있는 민족들에게 멸시를 받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이제 주님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 주십시오. 무너진 주님의 성전을 복구하여 주십시오. 성전을 복구하셔서, 주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해주십시오. 나의 하나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눈을 크게 뜨시고, 우리가 황폐해진 것과 주님의 이름을 빛내던 이 도성의 고통을 굽어보아 주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고, 주님께서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들어 주십시오. 주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들어 주시고, 이루어 주십시오. 나의 하나님, 만민이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니, 지체하지 마십시오. 이 도성과 이 백성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비 이야기>
지난 월요일에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인데도 새로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원래 삼국지 이야기에서 조금 각색이 된 듯하지만, 아주 멋있게 들려서 오늘 설교를 이 이야기를 다시 인용하면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유비가 길을 가다가 추운 겨울에 징검다리도 없는 작은 강을 직접 건넙니다. 옷을 걷고 얼음이 얼 것 같은 차가운 강물을 겨우 건넜는데, 건너온 강 저편에서 노인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부릅니다. “야, 이 젊은 놈아, 이리로 다시 좀 건너와서 나를 좀 건너다오. 이 늙은 사람을 그냥 두고 너만 갈 수 없지 않느냐?”고 고함칩니다. 유비는 다시 차가운 강물로 되돌아가서 그 노인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이 노인이 건너온 길을 다시 돌아가자고 합니다. 자기의 등짐을 그 곳에 놓아두고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오히려 나무랍니다. 기가 찬 유비는 하는 수 없이 노인에게 그럼 여기에 좀 기다리라고 하고 혼자 건너갔다가 오겠다니까, 이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야 이놈아, 내가 너를 언제 보았다고 너를 믿고 내 등짐을 맡기느냐? 나를 등에 업고 같이 가야지!” 등짐을 가지고 도망이라도 가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지요. 유비는 그 노인을 다시 등에 업고 강을 건너서 등짐을 찾아서 강을 다시 건넜습니다. 강을 건넌 다음에 노인이 유비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두 번이나 강을 건넌 것이냐?” 유비가 대답합니다. “나는 두 배로 고생하는 것과, 모두를 잃는 것 중에서 두 번 고생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다시 그 노인을 등에 업고 가지 않았다면 첫 번째 행한 것이 모두 날아가 버리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 노인은 감탄하며 유비에게 앞으로 큰일을 할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 충고를 하겠다며, 첫째는 이런 마음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너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겉으로 나타내지 말라고 합니다. 유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도 이것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참 멋있는 이야기입니다. 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이 이런 멋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신학자 중에서 제가 아주 존경하는 분이 유동식 교수님입니다. 그 분은 영성을 순수한 우리말로 “멋”에서 풀어갑니다. 우리의 영성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고, 이것은 멋진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멋이 있어야 합니다. 멋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뭐가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나눔)를 통해서 예수를 닮아간다는 것은 멋진 삶입니다. 여기에는 거짓이 없고, 장벽이 허물어집니다. 서로에게 열린 자유로운 삶을 통해서 멋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높아져서 남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기쁨들이 나누어지는, 이런 멋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요, 이것이 곧 선교입니다.
<말씀으로 인한 멋진 삶>
구약성경을 다시 볼 필요가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그 안에서 평화를 배웁니다. 그래서 이웃과 평화하고 자연과도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사람들은 몰려올 수밖에 없어요. 평화에 갈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안식의 법을 잘 지키고, 희년을 즐기면서 사는 그것이 곧 선교였어요. 나그네를 잘 돌보아주는 그것이 곧 선교였습니다. 멋을 지켜나가면 사람들은 멋이 있는 백성들에게 모여들게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가까이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으면서, 외국에 선교사 파송하는 것으로만 선교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멋진 삶을 증거 하기 위해서 외국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삶에 나타난 멋을 지니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백성으로 멋진 삶을 누리는 것은 참으로 중요했습니다. 얼마나 중요했느냐 하면 그 멋을 잃어버렸을 때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무시하는 것은 멋을 잃어버리는 것이었어요.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고아나 과부와 같은 약한 자들을 멸시했으며 나그네를 돌보지 않았을때,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말씀을 멸시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였습니다.(이사야 1:2, 예레미야 25:8-9)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따르는 것인데 이것은 멋이 없는 추한 모습이지요. 주님은 주님의 자녀들의 이런 모습에 견디기 어려워하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해 주십니다. 탕자를 있는 그대로 용납해주시는 인자한 아버지처럼 우리를 용납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버지의 가족으로 살면 그 가족으로 사는 멋을 갖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멋을 갖고 살게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은 실망하시고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징계를 하셔서라도 우리가 그 멋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한 번 보십시오. 한국교회의 모습을 이 영화를 통해서 한 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본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분이 나빴다고 하데요. 기분이 나쁠 수밖에요. 교회가 정말 멋이 없는 집단으로 그려졌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기분은 당연히 나쁘지요. 우리 모습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어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입니다. 그대로 입니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보고 반성하고 대책을 세워야합니다. 우리의 것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멋을 되찾아야 합니다. 밀양은 남편을 잃고 온 희망을 걸고 살아가던 자식마저 유괴범에게 살해당하는 극한적인 어려움 가운데서 살아가는 주인공을 통해서, 가장 어려운 이웃이 누구를 의지하고 살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가 그 최후의 피난처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귀중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공동체가 교회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멋 아니겠냐는 겁니다. 교회는 원래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멋입니다.
<재즈와 그리스도>
재즈를 하는 사람들은 재즈분위기를 갖고 있지요. 지난주일 저녁은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재즈공연을 보았는데, 게스트로 참여한 로버트이라는 사람은 얼굴만 보아도 재즈냄새가 나는 듯했습니다. 구겨진 양복, 야릇하게 기른 구렛나루, 곱슬머리 위로 빵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양복 윗저고리 주머니에 물통이 들어 있었고, 물통에는 보리차 빛깔의 물이 들어 있었고, 한 번씩 그 물을 꺼내서 마시는 자유로움 가운데서, 하모니카와 트럼펫을 손에 잡기만 하면 어김없이 재즈 빛의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음악에 취해서 눈물을 흘리고, 흥을 이기지 못해서 발로 엉성한 앞차기를 하는 모습까지 모두가 재즈였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빵모자에서 나왔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음악에 취한 그가 모자를 벗어던지고 연주를 하는데, 여전히 그에게서 재즈가 흘러나왔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소리를 내도 재즈처럼 들렸고, 어떤 행동을 해도 재즈 냄새가 묻어났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저는 계속 로버트 생각을 했습니다. 재즈가수에게 재즈가 흘러나오는 것이 멋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멋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로버트에게 흘러나오는 재즈처럼, 우리에게서 그리스도가 흘러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흘러나와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것이 멋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와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다움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덕 Virtue라고 합니다. 덕(Virtue)의 헬라어는 “-다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덕을 세우는데 힘을 써야 한다고 여러 곳에서 강조합니다.(롬 14:9, 살전 5:11) 이것이 멋입니다. 이 멋이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풍성한 복을 누렸지만, 이것이 없을 때 멸망했습니다.
<개혁은 곧 회복이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인데,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개혁이라기보다 사실은 복고입니다.(리차드 니버) 원래 교회로 회복이고, 원래의 멋을 회복한 것이었지요. 당시에 중세교회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다움이 없었어요. 멋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다움이 나타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멋이 회복된다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회복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기쁨이 활력이 되어서 놀라운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은 참 좋은 날입니다. 종교에 눌려있던 인간을 해방한 날을 기념하기 때문입니다. 500여년이 된 자랑스러운 전통입니다. 거대한 종교에 눌려있던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뜻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바람이 일어나자 문화와 예술이 부활하여 세상에 활력이 살아났고, 학문이 꽃을 피우고,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기술혁명의 밑거름을 놓았습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교회에 대항하는 사람들로 취급되어서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했지만, 이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인간을 모든 것보다 귀중하게 취급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말씀보다 교회의 권위를 더 귀중하게 취급하는 교회에 의해서 박해를 당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다가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돌아가신 주님을 따르는 길이었으니까요.
이런 개혁(복고)들은 말씀으로 가능했고 말씀을 읽는 자들은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이런 기도는 변화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말씀의 인도에 따라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멋이 들어 있습니다. 어디엔가 안주하다가 갇혀버리는 삶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행하는 길을 알지 못하고, 내일의 변화에 자신을 내 맡긴 것처럼,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변화합니다. 우리 교회의 자랑스런 전통처럼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 나갑니다.” “Reformed church is always being reformed"
오늘 본문에서 다니엘은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도합니다. 이 기도의 중심에 예루살렘의 회복이 들어있고, 이것은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회개는 변화를 전재로 합니다. 회개의 히브리말의 원 뜻은, “돌아서다” “길을 바꾸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림으로 멸망한 역사의 아픔을 품고, 이제 길을 바꾸겠다는 기도입니다. 자신이 기꺼이 그 곳에 함께 하겠다는 열망을 품은 기도였습니다. 그냥 말로만 소원을 던지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이런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어릴 때 버스를 타면 제일 앞에 어린 아이가 기도하는 사진이 붙어 있고, 그 곳에 “오늘도 무사히”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고가 많이 났으면 그런 그림을 부치고 다녔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진의 모델이 다니엘이라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시작한 것인지? 또 그것이 다니엘이라는 말이 진짜인지 모르지만,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임에는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 모두가 그랬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내용은 단순히 “오늘도 무사히”정도는 아닙니다. 그 보다는 멋을 회복하자는 귀중한 기도였습니다. 그 멋은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였고, 번영과 멸망에 대한 선택이었습니다. 단순히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헌신이 들어간 기도였습니다. 다니엘은 기도는 변화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는 기도였습니다.
지난 주 동안에 캘리포니아의 산불로 집이 2,000채 이상 불타고, 주민 100만 명 이상이 피난을 했었습니다. 집을 잃은 한 한인가족은, 자신의 집과 함께 “26년간의 삶”이 날아가 버렸다고 한탄하기도 합니다. 금번에 이렇게 큰 산불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 말하면서 지구온난화를 말하기도 합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서 비가 예년의 20%도 내리지 않은데다가, 기온은 또 90-100도를 오르내렸기 때문에 풀과 나무들이 너무 바짝 말라서 불에 너무 잘 붙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제 매스컴에서 이런 재난에 대비해서 집을 콘크리트로 만들고 방화유리창을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 토의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만약 산불의 근본원인이 지구온난화에 있는데, 이런 방안을 세운다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점이 되지 않지요. 다니엘은 기도는 집을 콘크리트로 만들고 유리창을 방화유리창으로 만들자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생활양식을 바꾸어서 근본적으로 안전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다니엘의 기도였습니다. 큰 집 튼 차를 따고 다니는 것이 멋진 삶이 줄만 알았는데, 그로인해서 만들어낸 공해가 엄청난 재해를 만들 수 있음을 자각하고, 이제 회개하고 삶의 규모를 줄여서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 곳에 먼저 있겠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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