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설교]실족과 용서의 교훈 (눅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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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실족과 용서의 교훈
교독문: 말씀: 눅 17:01-04 찬송가:
지독하게 공부하지 않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아들 옆에서 날밤을 새기도 했고, 비싼 돈 들여 그 유명한 족집게 과외도 시켜봤지만 아들의 성적은 자꾸 떨어지기만 했습니다. 속이 상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너 이 자식! 이번에도 성적 떨어지면 아예 가족의 연을 끊자. 이번에도 성적 떨어지면 그땐 내 아들이 아닌 줄 알아. 알았어?”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긴장해서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드디어 성적표를 받는 여름방학 날이 돌아왔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과 마주친 아버지는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야, 너 성적 어떻게 됐어?” 그러자 아들은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아저씨, 누구세요?” 말 한마디라도 권위 있게 그리고 언행일치를 가르치는 부모가 되어야겠습니다. ^^ 아들도 아버지도 용서합시다. 이런 일을 용서 못하는 당신도 용서합니다.
● 오늘은 한민족이 지키는 즐거운 추석 명절이 있는 즐거운 주간인 거룩한 주일입니다.
추석 명절은 가족들이 모여 기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 말로 실족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말로 인한 스트레스는 부부, 가족처럼 정서적으로 친밀한 사람들이 모이는 명절에 더 많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리도 아는 말을 조사해서 강조합니다.
고려대 성영신 심리학과 교수는 ‘서구 사회와 달리 가족 간에 못할 말이 어디 있느냐’라고 생각하는 우리 의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가족이니까 다 해도 된다.(오~ 하지 마세요)” 라는 생각이 오히려 가족 간에 질서가 무너지고 화평이 깨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말입니다.
귀성길 자동차 안에서 말로 싸움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열에 여덟 쌍의 부부가 다툰다고 합니다. 성영신 교수는 꽉 막힌 자동차 좁은 공간에서 스트레스의 강도는 잠수함이 되곤 한다고 합니다. 폐쇄된 공간에 갇힌 스트레스와 맞먹는다고 합니다.
● 조선일보가 빨리쿡닷컴(www.82cook.com)과 ‘명절 때 어떤 말이 가장 짜증나는가?’란 조사에서 응답자 71%가 ‘시어머니의 말’ 때문에 스트레스가 싸인다. 고 합니다.
1) 시어머니 말 중 며누리가 ‘차가 밀려서 늦었습니다.’ 라니 시어머니 ‘꾸물대다가 늦었지머’
2) 실컷 정성을 다해 차려준 음식을 잡수시고는 ‘그래도 김치가 최고야’
반대로 따뜻한 말은 힘을 준다고 합니다. ‘차 한 잔하고 쉬었다 해라’ ‘네가 시집와서 고생 많이 한다.’ ‘머리 스타일을 바꾸니 더 젊어졌다’ ‘아이들을 잘 가르쳐서 영리하구나.’ ‘살기 힘든데 용돈을 이렇게 많이 주니’ 칭찬하는 말은 곧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의미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 조선일보 1월 28일자 2면에 ‘말 폭탄’이 명절을 망친다. 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1) 처녀 총각 아픈데 찌르기
장가가려면 직장 잡아야지. 직장도 못 찾아, 이력서 좀 내봐, ‘실업자 언제까지 할 거야?’ 시집은 언제 가나? 너도 많이 늙었다. 점점 더해서 “왜 그렇게 사니. 차라리 죽어라.” 에 이르기까지.
2) 동서지간 자기과시하기
설 뽀나스 얼마 받았어? 월급은 제대로 나와? 그 동내 아파트 값은 좀 올랐어?
3) 시어머니가 며누리 면박주기. 좀 일찍 출발하지 그랬니? 벌써 가게? 네 남편 피곤하게 친정엔 뭣 하러 가냐? 아직도 무소식이냐?
4) 부부간 트집 잡기 그래도 우리 어머니 시집살이에 비하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냐. 당신네 부모만 부모야? ------- 습관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에 엄청 놀라서 스트레스 받지 말아요.
●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가요? 결혼기념일에 나는 아내에게 어디를 가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냥 오랫동안 안 가본 곳에 가고 싶어요" .........나는 아내를 부엌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너무 오랜 만에 만나서 할 말도 없고 그래서 인사한다고 한 말이 상처를? 말을 배웁시다.
예수님은 베레아 사역을 마치시고 다시 유대지방으로 오셔서 사역하신 내용을 본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용의 중심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그들과 수평적 관계인 하나님과의 삶에서 가져야 할 덕목들의 교훈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죄의 유혹과 용서에 대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실족에 관한 말씀입니다.
1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실족케 하는 것’이란 <스칸달론>입니다. 뜻은 야생 짐승을 잡을 올가미를 만들어 보이지 않게 설치해 두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길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올무를 만들어 영적, 육적으로 죄악에 빠지게 하는 것을 실족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도록 하는 고의적인 모든 유혹적인 행위입니다.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시편 140:5). 인간은 마음이 부패하다가 보니 상대방을 함정에 집어넣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을 함정에 넣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화로다’란 이 세상은 행한 대로 나에게 돌아옵니다. 화로다란 행한 대로 돌아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도 영원한 형벌에 처하십니다.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일은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말을 배워서라도 상대를 위로하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2. 작은 자들을 실족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2절에서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 우는 것이 나으리라.” ‘작은 자’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믿는 연약한 초신 자들을 작은 자로 지칭했습니다. ‘연자 맷돌’이란 <필로스>입니다. 뜻은 ‘몹시 어렵게’ ‘힘들게’란 의미입니다. 큰 곡식을 작은 가루로 만드는 기구로 사람이 손으로 돌리는 것은 맷돌이라고 연자 맷돌은 짐승을 이용해서 돌립니다.
삼손도 연자 맷돌을 돌리면서 기도한 일도 있습니다. ‘그 목에 매이우고’란 죄수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맷돌의 구멍에 끈을 끼어 목에다 걸고 달리기를 시켰다고 합니다. 그 고통은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군에서도 무거운 배낭을 지고 달리기를 할 때 고통을 느낍니다. 특수 훈련을 받은 분들은 모래주머니를 다리에 달고 달린다고 하니 사람은 어려워도 힘들어도 당하면 모두 감당하게 됩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면 그 몸은 고기밥이 될 것이 뻔합니다.
본문은 믿음이 적은 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실족의 일을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작은 자를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 큰 죄가 된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3. 죄는 경계하고, 말로라도 회개하면 계속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3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믿음이 작은 자들을 실족케 하지 말아야 하면서 조심할 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죄는 어떤 경우라도 용납하거나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미워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란 경계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경계’란 <에피티마노>입니다. 뜻은 ‘책망과 경고’입니다. 한글의 경계의 개념은 가까이 하지 말며 선을 그어 두고 대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죄는 책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고해야 합니다. 죄는 무섭게 다루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음행에 일을 책망과 경고를 약하게 하니 점점 확산이 되어 심각한 신앙의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만인 앞에 잘못을 고백하며 회개한 증거가 분명하거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성도들은 죄는 같이 호응해 주어 같이 죄인이 되고, 회개한 자는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저사람 이런 사람이라고 하면서 끝까지 용서하질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위배가 되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예수님은 용서의 한 개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에서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의 개념은 세 번 용서하는 것이 최고의 관용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심은 횟수에 관계하지 말고 회개하면 언제든지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용서하는 자보다 죄를 범하는 자가 형식적으로 회개한 척 할때 용서 자는 계속 손해를 보아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러더라도 주님 말씀대로 끝까지 용서를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용서는 육의 마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 속에 거하시면서 하나님이 힘주실 때 가능합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성령으로 행하기 때문에 가능한데, 육의 마음으로는 용서가 불가능하며 용서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을 실족하게 해서도 안 되고, 회개하는 자를 용납해주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당부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은혜를 받으셔서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그러므로 침묵은 금이라고 솔로몬은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선포하고 그 선포된 말씀으로 사는 것은 참으로 선한 것입니다.
즐거운 명절 말로 실수하지 말고, 은혜로운 말을 함으로 행복한 명절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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