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의 날] 노동자의 윤리 (엡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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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5-9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두렵고 떨림으로
오늘 말씀은 노동자의 윤리, 곧 직업인의 윤리입니다. 노동자의 윤리로서 제일 먼저 언급하는 권면은 5절의 “두렵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섬겨라”입니다. 두렵고 떨림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인간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을 인간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주인은 생사여탈권을 지닌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도 그렇지 않은가요? 회사의 오너나 상사 앞에서 우리는 두렵고 떨리지 않습니까?
새해 들어서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소위 갑질 논란이 끊이질 않습니다. 백화점 주차장에서 힘 있는 VIP 고객이 아르바이트 직원 3명을 무릎 꿇린 일로 시끄럽습니다. 그 어떤 잘잘못을 떠나 사람을 무릎 꿇게 하는 것은 그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고객의 위협에 3명의 청년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실상 그 일자리에서 잘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 아닙니까?
최근까지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에서 보인 전횡과 폭력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역시 무릎을 꿇렸고 비행기를 회항시켜 홀로 공항에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그때 그런 모독을 당했던 사무장이 상사의 행위를 밝히며 “나는 개가 아니다”란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직장은 노동자들을 개 취급하고 있습니다. 사무장의 이런 반발은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입니다. 성경이 요구할 것도 없이 직장은 그만큼 두렵고 떨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거기에는 정규직에 들어가기 위해서 스펙을 쌓고 안간힘을 쓰는 청년들이 나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능력을 발휘해도 정규직이 될 수 없었던 계약직의 비극이 그려집니다.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회사라는 존재는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여건에 있는 직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사들을 보면 정치적으로 무리하고 어리석은 결정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똑똑한데도 왜 그럴까요? 검사들도 상사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직장과 출세의 목을 잡고 있는 정치권력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지난해에 청문회에 출석했던 한 검사가 자신은 권력층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고 하며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는 항변은 매우 신선하게 느껴지기조차 했습니다. 오랜만에 결기 있는 검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직장은 두려운 곳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노동자는 직장이나 상사를 두렵고 떨림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다니는 직장이나 상사를 만만히 보지 말고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 마음을 다해서 성실하게 일을 하라는 권면일 뿐입니다. 우리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이 아니고, 직장이 두렵고 떨린 존재가 되어서 우리에게 굴종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잘못되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노예사회가 아니라 모두의 인격이 존중을 받는 민주주의 시대입니다. 사람의 인격을 볼모로 삼는 노예제 사회가 아니라 필요를 위해서 우리의 노동만을 제공하는 자본주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일정시간의 노동력만 제공했을 뿐입니다. 나의 인격이나, 나의 생각이나, 나의 감정이나, 나의 가족을 저당 잡힌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모습은 전근대적입니다. 전근대적인 노예 노동이 여전히 우리의 직장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행복한 곳이 아니라 불편하고 힘든 곳이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당한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직장이 더 이상 두렵고 떨리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직장은 행복한 곳입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즐겁습니까? 그 일의 대가로 나와 가족이 먹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큰 보람입니까?
새해가 되면 로마 가톨릭의 교황이 신년사를 발표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빌레몬서 말씀을 인용해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형제와 자매로”라는 제목의 신년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가장 역설하셨던 것은 전세계에 여전히 만연해 있는 노예노동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들과 딸로 자신의 책임하에 자유롭게 살면서 현대적 형태의 노예제도에 대해 투쟁하도록 소명받았다.” 교황은 이런 노예노동을 만드는 원인을 “금전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사람들의 타락”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소비자들은 타인을 착취함으로써 생산됐을지 모를 상품을 구입하는 것을 재고하고 불매 운동도 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비인간적 노예노동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대한항공이나 위메프나 백화점이 그 대상이 될 것입니다. 맘몬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리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최소한도로 약화시키지 않으면 우리 직장은 노예 노동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교황의 말입니다. “노예화는 인간이 아니라 돈이 경제 시스템의 중심에 있을 때 일어난다. 그렇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만물을 다스리도록 위임받은 인간이 모든 사회와 경제 시스템의 중심에 있어야만 한다. 사람이 맘몬에 의해서 대체될 때 가치들의 전복이 일어난다.”
초대 교회는 당시 고대 사회에 필수적인 사회 시스템이었던 노예제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이미 노예제도는 파괴되었습니다. 단지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서만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주인과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만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이는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1)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의 노예주인 빌레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몬1:16-17) 초대교회가 노예제 개혁에 나서지 않았지만 이미 그 안에서 노예제도는 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할 진데 현대 사회에서도 비판받고 있는 노예제 유산에 우리가 따를 이유가 무엇입니까? 직장은 두렵고 떨림으로 성실함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직장이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없어져야 할 노예제의 유산일 뿐입니다.
주께 하듯
종과 주인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주께 하듯’입니다. 5절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절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절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상전에게 대하는 것을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주님께 하는 것처럼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업을 영어로 vocation이라고 합니다. 라틴어 vocao는 부르다는 뜻입니다. calling 소명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엇으로 평가받겠습니까? 다름 아닌 우리가 직장에서 한 일로 평가를 받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사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우리는 직장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을 단순히 돈 버는 것으로만 취급한다면 참 불행해집니다. 우리는 주님이 시키신 일을 하고 있다는 태도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적당히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들은 자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오래전에 있던 일입니다. 제가 자취할 때 일본 산 전기밥솥을 중고로 샀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참 쓰다가 고장이 나서 그 바닥을 뜯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속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인데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렬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주께 하듯 일하는 태도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눈치만 본다면 적당히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어떤 일이든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적당히 시간만 때울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공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습니다. ‘성공’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최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께 하듯’하라는 것은 또한 상전이나 상사를 마치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겸손이 나오고 상사에 대한 사랑이 나옵니다. 아무리 개차반 같은 상사라도 그 자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의 연약함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부하는 상사를 키울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자신 또한 성장시킵니다. 물론 불의한 행동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지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권위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라도 상사에 대한 사랑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저도 이 부분은 참 못하는 사람입니다. 정의롭기는 하지만 상사를 섬기거나 사랑하는 것은 참 부족합니다. 예전에 제가 부목사 시절 모시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말로는 자기 부정이니 주님 사랑이니 하면서 온갖 화려한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싫어하고 멀리하려 했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그 분 면전에서 목사님을 사랑하지만 존경하지는 못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반항기 때문에 교회를 개척할 때 일절의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장로님도 원칙에 맞지 않게 행동해서 경고를 주었다가 제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저의 판단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랑과 존경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점도 있습니다. 단점만 보면 장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상사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에는 그 사람의 능력과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더구나 상사라는 권위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존경이 먼저입니다. 정의는 다음입니다. 정의는 사랑이 감싸고 있을 때 효과적입니다. 아랫사람이 잘 따르면 상사도 멋진 사람으로 키워낼 수 있습니다. 상사를 사랑하면 그 혜택은 바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불의한 상사나 권위에 대해서는 무조건 침묵해야 합니까? 이 또한 ‘주께 하듯’이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불의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나 또한 그런 불의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나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충성할 것인지 하나님께 충성할 것인지를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충성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에서 나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7절에서는 일을 하되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즐겁게 일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못해서 하지 마십시오. 설교자는 설교하는 시간이 즐거워야 하고 기다려져야 합니다. 창조력은 기쁨에서 나옵니다. 인생의 행복은 바로 일을 즐겁게 하는 데서 나옵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그런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쁨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억지로 기뻐하다보면 더 큰 기쁨이 솟는 경우도 가끔은 있지만 일 자체가 기쁘지 않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기쁨은 그 일에 대한 만족도와 보람을 보여줍니다. 기쁘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재고를 해 보아야 합니다.
조셉 캠밸이라는 신화 연구가가 『신화의 힘』이란 책을 썼습니다. 여기서 ‘천복(天福)’이라는 용어를 언급했습니다. 말 그대로 하늘이 주신 복이지만 더 정확한 의미는 그 일을 할 때 느끼는 행복감, 곧 천상의 행복(bliss)입니다. 천복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주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평생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며 불평하며 삽니다. 조셉 캠밸은 모두에게는 천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있고 이 천복을 좇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세상이 무어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조셉 캠밸은 천복이라고 했지만 기독교에서는 아것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성공했을 때도 기쁘지만 더 큰 기쁨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성취했을 때입니다. 소명은 자신이 잘 압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 그 일을 할 때 기쁨이 솟는 것, 그래서 잘하는 것, 잘해서 보람이 있는 것, 그것이 소명입니다. 여러분의 직업이,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 소명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천복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직업은 단순히 돈벌이 수단이 아닙니다. 내 자아 성취수단입니다. 이런 숭고한 의미의 직업을 현대 사회는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 격하시켜 버렸습니다.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중요한 기쁨을 빼앗아 가 버린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직장은 놀이터입니다.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까지 그 일을 즐거움으로 하십시오. 성경의 인물 중 탁월한 직장인의 모델로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성경에 기뻐했다는 말은 없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전심전력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 기쁨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시위대장 가정의 노예로 팔려갔지만 노예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그 가정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가정 총무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또 거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자 감옥지기가 제반 사무를 다 요셉에게 맡깁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는 또 최선을 다해서 일했고 결국 애굽의 모든 부가 바로의 손에 들어오도록 도왔습니다. 요셉의 모습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두렵고 떨림으로, 주께 하듯, 기쁜 마음으로 하는 전형을 봅니다.
요셉은 기쁜 마음으로 어느 상황에서든 자기 일에 열심했습니다. 기쁘게 일하면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고, 또 결과도 좋게 나옵니다. 모든 일을 기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섬김과 십자가의 사역이라는 고된 길을 가셔야 했지만 그 일을 기쁘게 감당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자신의 기쁨이요,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일에서 우러나는 기쁨이 여러분을 이끌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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