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의 날] 창조와 노동 (창 1:1)
페이지 정보

본문
[근로자의 날] 창조와 노동 (창 1:1)
모든 성도님들이 잘 아시겠지만 우리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에 속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단 총회에서는 3월8일, 오늘을 총회노동주일로 정하고, 총회산하 모든 교회들이 함께 총회노동주일을 지키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총회는 노동주일을 지키는 취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동 주일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참여하는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우고,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일깨우는 주일입니다. 전 세계의 양극화와 빈부격차가 극심한 현실 속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는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청년 실업자, 일자리가 없어 고통당하는 실직자, 외국인 근로자, 산업재해 노동자, 노동현장에서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와 가족들을 위해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총회의 이런 취지에 따라 우리 교회도 이번 주일 예배를 총회노동주일 예배로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노동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관련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노동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인식을 바로잡고,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노동”이라는 개념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즉 노동을 통한 세상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지만, 노동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입니다. 즉 노동은 신적인 기원을 가진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는 노동은 곧 창조의 행위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어지는 맥락에서 또 하나,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노동에 대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인간의 노동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관련된 어떤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단순히 먹고 사는 것과 관련된 문제가 아닙니다. 노동을 통한 생계유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노동의 시작, 노동의 기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노동은 먼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인간이 동참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보기에 좋은가?” 이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자연적인 환경이 그러한가에 대한 질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보기에 좋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보기에 좋습니까?
지난 금요일 저녁에 한 언론사의 저녁뉴스를 보는데 우리나라의 유명한 곡창지대 중의 하나인 김포평야와 관련된 뉴스가 있었습니다. 김포평야의 논들 근처에 공장들이 1000여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뉴스화면에서 그 공장들에서 흘러나오는, 색깔도 시퍼런 폐수들이 김포평야의 논바닥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 논에서 벼가 자라고 우리는 그 벼에서 나온 쌀을 먹게 될 것입니다. 뉴스 화면에는 그 논에서 나온 기형 개구리의 모습도 적나라하게 클로즈업 해 주었습니다.
몇 해 전,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누출 사고도 자연과 인간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중요한 한 사례로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보기 좋은 것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신 이후로 여전히 이 세상은 보기에 좋은 아름다운 것들을 포함하고 또 유지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이 세상이 보기에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인간의 노동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현상들을 생각해볼 때, 지금까지 우리 인간의 노동이 창조를 위한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를 향한 방향으로 나아왔고, 또 지금도 그러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노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노동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방향, 생명을 위하고 돕는 방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노동에 대해 생각할 때 창조가 아니라 돈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노동에 대한 일반적인 우리의 관점이 어떤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노동’ 혹은 ‘일’이라고 하면 창조를 먼저 떠올리기보다는 돈을 먼저 떠올립니다. 노동이 우리자신과 이웃의 삶과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하고, 풍성하게 하고, 충만케 한다는 점에서 노동 그 자체를 의미 있고 중요한 것으로 보지 않고, 노동을 돈과 관련지어서 경제적인 소득에 따라 평가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노동이 좋은 노동이고 가치 있는 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노동을 추구합니다. 그런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풍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즉 돈이 근본이 되는 세상에서는 노동을 창조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오직 돈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강요합니다. 노동을 돈의 관점에서 파악하게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노동만이 인기를 끌게 되고, 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방식으로만 노동과 노동자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가 겪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 실업의 문제, 외국인 근로자와 관련된 부당하고 잘못된 처우의 문제, 산업재해 문제, 노동현장의 차별과 불공정의 문제들의 바탕에는 이러한 노동에 대한 잘못된, 왜곡된 관점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동을 돈으로만 이해하고, 노동하는 사람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니까,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에 근거한 창조신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창조신학이라고 합니다. 창조론 혹은 창조신학은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다툴 때만 필요한 신학이 아닙니다. 창조신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 세상과 우리의 신앙과 삶의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이러한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영적인 측면들을 모두 포함하는 노동을, 돈이 아니라 창조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적인 방향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돕는 방향으로 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말과 몸을 통한 모든 행동들은, 즉 노동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그 세상을 향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신성한 행위입니다. 노동을 돈이 아니라 먼저 창조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면, 모든 노동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또 신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동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존중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그 질문은 “우리 사회는 과연 노동 그 자체와, 노동하는 인간에 대해 존중하는 사회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노동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그러한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와 그렇지 않는 노동자를 차별하는 사회는 아닌가라는 질문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과 부당해고의 문제를 다룬 “카트”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한 기업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였습니다. 대형 마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모금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메이저 투자사가 있어서 영화 제작비를 댄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조금씩 돈을 내어서 만든 영화라는 것입니다.
한 대형마트에 비정규직으로 고용된 등장인물들은 화장실 가는 것도 참고 손님들의 온갖 멸시와 모욕도 참고,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오직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잔업에 야간근무, 땜방 근무에 회사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했습니다. 그러나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모두 부당해고를 당하고 맙니다. 회사에 항의해 보았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애초에 계약서조차도 작성하지 않은 사람들이 태반이었습니다. 계약서가 없으니 법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이유는, 계약직이나마 일자리가 절실했던 사람들의 처지를 회사 측이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말하면 회사에서 다른 사람을 고용하겠다고 할까봐 두려워서 계약서 자체를 작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계약직이나마 일자리가 절실했던 약자들의 처지를 악용한 것입니다.
법으로 정한 시급이하의 급료를 주는 주인에게 시정을 요구한 것으로 인해 해고를 당하는 알바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 주변에서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고용인들은 모두 나쁘고 피고용인들은 선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부당해고와 불법 계약 등과 같은 약자의 처지를 악용하여 불법을 행하는 일들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은 단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인 것입니다. 노동하는 인간의 불리한 처지를 악용하여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맨 얼굴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쌍용차 문제, 기륭전자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특히 쌍용 자동차로 인해 자살한 사람, 스트레스성 장애로 인해 사망한 사람이 25명이나 됩니다.
반면에,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을 돈이 아니라 창조의 관점에서 바로 본 좋은 예도 있습니다.
“칸 아카데미”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재단은 수학, 유기화학, 예술, 역사, 천문학, 공학, 재무, 금융, 법률 등 6,000여개가 넘는 무료 강의를 인터넷 유투브를 통해 제공합니다. 칸 아카데미의 유투브 강의가 효율적인 것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되돌려보거나, 잘 알고 있는 부분은 건너뛰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이해가 늦다고 해서 무시 받을 일도 없고, 학원비가 없어도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칸 아카데미”는 살만 칸이라는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살만 칸은 잘나가던 금융맨 이었습니다. 틈틈이 그는 멀리 사는 사촌 동생을 위해서 유투브로 수학 과외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촌 동생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까지 시청하려고 몰려들어서 어느새 구독자가 수만 명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그러자 책임감을 느낀 살만 칸은 자신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무료 교육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수익도 전혀 없는 일이었지만, ‘인터넷만 있으면 가난한 이에게도 동등한 교육’을 한다는 점이 그의 가슴을 뛰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운영은 해야 했기 때문에 칸은 여러 기부단체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제일 부자인 빌 게이츠가 자신의 자녀들이 칸의 유투브 강의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빌 게이츠는 “교육의 미래를 보았다”라면서 칸에게 재단을 설립해 주게 됩니다. 처음에는 수학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6,000여개가 넘는 무료강의를 전 세계의 학생들에게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칸 아카데미는 무료강의 뿐만 아니라, 아직도 20세기처럼 일방적인 교육을 받는 아이들에게 미래 교육의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칸은 금융맨 시절보다 지금이 수 천 배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육은 깨끗한 공기나 물처럼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다.”라고 말합니다.
노동을 단순히 돈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았다면 칸은 그의 강의를 통해 큰돈을 버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을 했을 것이고, 그의 강의는 돈 있는 부모를 둔 아이들에게만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칸은 우리들에게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을 단순히 돈의 관점이 아니라 창조의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고 있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을 창조가 아니라 돈의 관점으로 바라봄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많은 고통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칸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이 창조적이며, 생명을 살리고 돕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통해 사회의 수많은 고통과 갈등을 치유해 나가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 이전글[근로자의 날]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라도 (마 20:1~16) 22.04.23
- 다음글[근로자의 날] 노동자의 윤리 (엡 6:5-9) 22.04.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