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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날- "스승” 요 1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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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수인
댓글 0건 조회 559회 작성일 17-05-1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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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날- "스승” 요 13:13-15
 
1. ‘스승’을 ‘자기를 가르쳐 주는 사람. 선생’이라 사전은 정의했어요.
‘선생(先生)’을 한자풀이 하면, 먼저 선(先)에 날 생(生)입니다.
먼저 태어나 인생을 살며 깨닫고 얻은 지혜를 자기에게 가르침을 주신 분을 스승이라 합니다.

마침 1965년부터 ‘스승의 날’을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로 정한지, 50년이 되어
오늘 설교 제목을 ‘스승’이라고 정하였습니다.

과거 스승의 날 풍경은 사제(師弟)간에 아름답고 따뜻한 존경과 사랑이 오고갔다고 한다면,
오늘의 스승의 날 풍경은 찬바람이 분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임용된 지 2년 된 새내기 초등학교 선생님이 “차라리 스승의 날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교육부 당국이 함정단속을 하면서 학부모로부터 “내 아이, 잘 부탁합니다.”라는 촌지나 선물을 받는지 감시하는 상황이 되어 마음앓이를 하면서 한 말입니다.

선생님들을 예비범죄자로 보는 시각이 기막히게 하는 것이죠.
왜 이런 현실이 되었을까요?

선생님의 월급봉투가 얇았던 때, 국민의 생활이 가난했던 때에는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아야 한다는 존경이 있었죠.

그런데 교사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정년퇴직 후의 생활도 보장되고, 국민들의 생활도 일용할 양식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된 오늘에는, 오히려 존경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선생님에 대한 존경을 돈으로 대체할 수 있고, 선생님의 사랑을 물질로 살 수 있다는 생각들이 교육현장을 병들게 한 이유 중 하나라도 봅니다.

여기에 부채질한 부분이 선생님들께도 있었죠.

지식의 전달자로서 선생이었지, 앞서 살아 보이는 스승으로서의 선생님이 되지 못했다는 것들이 적폐(積幣)가 되고, 스승을 만나기 어려운, 스승이 사라진 오늘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2. 교회 이야기를 해 봅니다.
한 때, 이상한 현상을 경험한 때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성공했다고 우러러 보는 큰 목사님들이 은퇴를 하면서 후임 목회자를 정했는데,
은퇴목사님과 놀라울 정도로 판박이가 된 현상입니다.
목소리뿐만이 아닙니다.
행동거지도 은퇴목사님과 같습니다.
은퇴목사의 빙의(憑依)라고 할만도 합니다.
은퇴목사님의 설교집이나 자신의 목회관이 담긴 책을 발간하면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목사님들이 흉내를 내던 때가 있었어요.
후배 목사님들은 유명한 은퇴목사님을 목회의 스승으로 삼아 배웁니다.

원로이며 은퇴한 목사님들의 책에는 자신의 목회에 대한 경험담을 담는데,
조금 듣기에 거북한 비판적인 말을 할 텐데 이해하셔요.

교인 후려패기 방법이라든가, 헌금 많이 내게 하는 기술이라든가,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성취하는 방법 등을 남기는데, 후배목사님들이 목사님의 후덕한 인품이나 목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보다는 기술적인 것들만을 전수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정작 예수님이 없어요.
복음적인 신앙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죠.

흔히들 못된 시어머니를 미워하면서 배운다고 하죠?
부목사들 끼리 뒷자리에서 담임목사를 흉보면서 배워, 자신이 담임목회를 할 때에는 더 강력해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비유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예루살렘 성전을 비교해 봅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이 바르고, 제 역할을 정직하고 정의롭게 행했다면,
예수께서 “때가 찼다.”하시며 이 땅에 오셨을까요?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은, 타락한 종교의 표본이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판단이죠. 조직과 제도의 불의, 제사장들의 권력욕, 형식적인 제사로 겉으로는 북적거리고 쉴 틈 없이 번성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은 허위와 기만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도 같았죠.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떨까요?
걱정스럽게도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을 지향하고 있어요.

예수께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허물어지리라 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무너지고, 교회가 시작되죠.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지만, 1,5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교회는 다시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됩니다.
이것이 로마가톨릭교회입니다.

종교개혁으로 개혁교회가 탄생했죠.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예루살렘 성전화(聖殿化) 된 가톨릭교회를 허물고 바른 교회를 세우자는 것이죠.
그런데 5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번에는 개혁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교회처럼 된 가톨릭교회를 개혁하면서 시작된 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된 또 다른 예루살렘 성전이 되고 말았어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 위치에 있는 성직자들이 누굴 스승으로 삼고 있습니까?

오늘의 교회 현장을 보면서, 정치적으로, 세상적으로 성공한 목사님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바로 여기에 한국교회의 근원적인 잘못이 있어요.


3. 요한복음 13:13-15을 다시 읽어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께서 본보여 주신 일이 발 씻어준 것 뿐 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발을 씻어주는 일만 행하면 되나요?
아닙니다.

예수께서 본보여 주신 일은 많죠.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가는 것도 본보여 주셨어요.
도움이 필요한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끝없이 나누셨어요.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아 두셨나요? 아니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셨어요.

늘 하나님과 독대하기 위하여 뒤로 물러나기도 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 소외 받는 이들에게 다가가셨고, 외롭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셨어요.
아파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 주셨지요.

어떤 조직을 하고, 조직을 통해 권력을 쥐려고 하지 않았어요.

강도만난 사람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셨고,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편들어 생명의 길, 새 길을 열어 주셨어요.

예수께서는 평화와 화평을 이루셨고,

예수께서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보여 주셨어요.

굳이 산상수훈(山上垂訓)의 말씀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가 몸말이 되어, 길이 되었고, 빛이 되었고, 생명이 되었어요.

이 모든 것이 무엇일까요?

선생, 곧 스승으로서 본보이신 것이죠.

“너희에게 행하게 하려 하여 분을 보였노라.”
이 말씀을 우리는 마음으로 새겨야 해요.

 
4. 초대교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서’가 모든 믿음의 목표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신앙 한 가운데에 둔 것이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 2:5)이었습니다.
고난 속에서의 초대교회는 오직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였어요.

사도행전 7장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순교를 예수님의 죽음처럼 표현한 것도 ‘그리스도를 본받자’는 신앙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삼아,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타났어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어요.
성빈(聖貧)의 성자 프란시스가 그랬고, “의사가 되어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내 삶을 바치겠다.”고 마음먹고 의사가 되어 평생토록 자신의 맹세를 지킨 장기려 박사님, 사람들은 선생님이라 부르죠.

간디,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 테레사 수녀, 슈바이쳐 박사, 손양원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등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아요.
이들은 우리의 스승이라 불릴 만한 분들입니다.

이들에게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두들 예수님의 조각을 자신들의 삶 가운데에 가진 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분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산, 예수님의 편린(片鱗)으로 인해 비로소 스승이란 말을 듣게 된 것이죠.

 
5. 지난 주간, ‘스승의 날’이라고 해서 몇몇 후배 목사님들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스승의 날인데, 목사님 생각이 나셔요.”라 한 전화랍니다.
솔직히 전화를 받으며 몸이 간지러웠답니다.
아름답게 핀 난화분도 받았어요.

자신들의 혼인주례목사라고 스승의 날에 맞추어 예쁜 꽃다발을 보낸 젊은 부부도 있었어요.

자신을 돌아보게 하더라구요.

돌아보니 부끄러웠죠.

내게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편린(片鱗)이 있나 하는 반성이었어요.

과연 나는 예수님의 삶을 앞서 살아 보인, 곧 선생(先生)인 목사인가?

나는 길 되신 주님의 길을 걷고 있으며,

빛 되신 주님의 빛을 밝히며 살고 있는가?

나는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시 물질욕망이나, 명예, 권력에 대한 갈증으로 몸부림치며 추구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사람을 살리는 목사였나?

난 혹시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과도 같은 오늘의 교회를 지키려고만 한 목사는 아니었을까? 조직과 제도, 관행과 관습의 타성에 묻혀 생동감이나 생명력을 과거에 묶여진 현실의 틀 속에 꽁꽁 가두어둔 목회를 해왔던 것은 아니었나?

교인들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생명을 바치는 심정과 자세로 목양했던가?

내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삶이 있는가?

선물로 받은 꽃바구니와 하분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스승으로의 목사로 인사를 받음에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어요.

 

6.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하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스승이 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어쩌면 단순하고도 명료한 길입니다.
일방통행의 길, one way입니다.
여러 길이 있어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길 뿐입니다.
문제는, one way 옆에 유혹과 시험의 신기루 길이, 길이 아님에도 길처럼 보이게끔 하는 가짜 길이 있다는 것이죠.

One way끝에는 구원, 영생, 하나님의 복이 있지만, 신기루가 만든 길 끝에는 죽음, 파멸, 심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짜 길은,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창 3:6) 보이게 한 마귀의 유혹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에 40일 금식 후에 예수께 와서 시험한 마귀의 세 가지 미끼(마 4:1-11)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신기루 길에 마음과 뜻을 주는 순간, 미끼가 품은 독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자기만 높이기 시작합니다.

 
자, 이 유혹을 뿌리치면서
우리의 손을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은 손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의 무릎을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 위해 꿇었던 무릎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께서 제자들의 젖은 발을 닦아주신 수건이 될 수 있도록 해 봅시다.
이렇게 조금씩 우리들에게서 예수님의 조각들이 드러나도록 힘쓰며 살다보면,
어느 날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은 스승이 되어 있을 겁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신앙생활에 진실 된 행복이 넘치게 됨을 확신합니다.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삶 속에 신앙의 편린(片鱗)으로 삼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믿음의 본으로 보여주고 살아 보이신 것들을 우리들 믿음의 삶에 간직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한 사람의 스승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강 석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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