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하나를 실족케 하지 말라. 마 18:1-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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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하나를 실족케 하지 말라
마태복음 18장 1-14절
설 교 : 2013년 5월 5일 어린이주일 낮 예배
찬 송 : 41장(내 영혼아 주 찬양하여라). 560장(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565장(예수께로 가면). 566장(사랑의 하나님 위하신 이름은).
어린이 날 조선일보에 <어린이는 천사가 아니다> 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린이를 천사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어린이는 어른들이 지나친 보호와 인격에 병든 어린이로 키웠기에 어른에게 인사 하나 제대로 못하고, 어린이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지 못해서 반항하는 어린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설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오늘 다는 아니지만 대학생, 노동자들의 과격한 시위 이것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타협하면 사꾸라라고 하고, 내 의견에 따르지 않으면 무조건 매도하는 비인격적인 태도는 어려서부터 바른 교육을 못한 데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두고, 어린이를 소재로 해서 말씀했습니다.
첫째, 어린이와 같이 되라(104절)고 말씀합니다.
둘째, 어린이를 영접하라(5-6)고 말씀합니다.
셋째, 어린이를 범죄케 말라(7-9절)고 말씀합니다.
넷째, 어린이를 업신여기지 말라(10절)고 말씀합니다.
11-14절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자, 곧 잃어버린 어린이, 탈선한 어린이 하나를 포기하지 말라고 찾자는 교훈으로 말씀했습니다.
첫째,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 에즈워드는 무지개를 보면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내 마음 기뻐 뛰노누나
내 인생 어렸을 때 그러하더니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다.
늙어서도 그랬으면,
그렇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나는 죽으리
어린이야말로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내 생애 모든 순간순간이
순진한 경건으로 이뤄지기를…”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순진한 경건, 그 마음은 바로 하늘의 마음입니다.
어린이가 웃는 밝고 맑고 환한 웃음!
신뢰하는 마음!
거짓 없는 마음!
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른들은 그 마음을 멍들게 하면 안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차를 몰고 버스가 드물게 다니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버스 정류장에서 학교를 가려고 기다리고 있던 1학년짜리 두 아이가 태워달라고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차를 세웠습니다. 아이가 차문을 열고 탑니다. 그런데 같이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던 어머니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왔습니다. 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이 납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아이는 문을 열고 차 뒷좌석에 앉았습니다. 아이를 내리게 하지 못한 어머니가 아이와 같이 탑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무안해서 “요즘 세상에 나쁜 사람이 너무 많다”고 횡설수설합니다. 목사님이 말을 건넸습니다.
“이 동네에 사십니까?”
“예”
“그 동네 교회의 조목사님하고 친구입니다.”
“목사님이세요? 저 조목사님 교회의 집사예요”
이제는 믿을 수 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목사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집사님, 믿고 사세요.”
그 어머니는 차 뒤에서 연신 아이를 타이릅니다.
“너 다음부터 아무 차나 세우면 때려준다. 나쁜 사람이 많아. 이 녀석아! 너 잡혀가면 엄마도 못보고 죽어!”
그렇게 불신과 부정 속에 자란 아이들이 후에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 목사님이 그 어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못해준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했습니다.
톨스토이의 인생론에 보면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농부가 지게를 지고 갑니다. 그런데 그 농부의 얼굴이 어떻게나 평화스럽고 온화하고 행복하게 보이던지, 저 사람도 가난한 농부인 것은 틀림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촌장께서는 가난한 농부인 것 같은데 어떻게도 행복한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그 농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니 내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속에 계십니다.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데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곧 어린이의 깨끗한 마음입니다.
둘째, 어린이를 영접하라.
영접한다는 것은 그를 환영하고, 그를 위하여 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른은 어른의 세계가 있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의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날 때부터 어른이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마치 자기가 어린 시절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어린이에게 완벽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린이의 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 사랑을 하고 싶어 합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교회에서 학생수련회를 갖습니다. 그런데 수양회가 끝나고 돌아오면 속옷을 비롯한 옷들이 한 박스씩 나옵니다. 학생들이 자기의 것을 챙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젖으면 젖은 대로 내팽개칩니다. 이것은 아이가 풍요 속에 자라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운 집의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어려서부터 필요를 채워주기 보다는 욕망을 채워주어서 그런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조급해진 부모는 그 아이가 자라기도 전에 온갖 것을 다 사줍니다. 겨우 돌이 지난 아이에게 세발자전거를 사 줍니다. 그 아이는 세발자전거가 얼마나 좋고 가지고 싶었던 것인지 거기에 대한 고마움을 모릅니다. 아이는 계속해서 값비싼 것만 요구하게 됩니다. 물건을 아껴 쓸 줄을 모릅니다.
이것은 부모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아이의 성격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족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어린이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에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업신여긴다는 것은 얼굴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천사가 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업신여긴다는 것은 아이를 가치 없이 여기고 그들의 의견을 유치하게 생각하고 무시해 버리는 처사입니다.
아이가 좋은 옷을 입고 나왔는데 “너 미스코리아 되겠다!”고 빈정댑니다. 아이의 학교 성적이 나쁘면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라고 한다든지, 공부 외에 다른 면에 특출한 재능이 보이면 “공부를 좀 그렇게 잘하지!” 하는 이런 식의 태도는 안 됩니다.
사실이지 아이가 전 과목 100점, 전 과목 수를 받으면 이 아이는 별 볼일 없는 아이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자녀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면 예외가 없어도, 이기주의적이라도, 교만해도, 돈에 대한 지나친 욕구가 있어도 하나도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든 면에서 잘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모든 면에 완벽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린이도 모든 것에 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운동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기억력도 좋고, 창의력도 있고, 수학도 잘하고, 국어도 잘하고…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그것은 모든 면에서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어느 교수댁의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성적표가 가, 양, 투성이었다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그렇다면 핀잔을 주며 야단을 쳤겠지요. “양이 몇 개야? 전부 가네!” 하고 야단을 치고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수의 아들이 국어만은 수를 받았습니다. 그 교수는 진심으로 그 아이를 칭찬했습니다.
“야! 우리 석이가 수를 받아왔네. 국어가 최고 점수야, 참 잘했어!”
이 아이는 어깨가 으쓱해 졌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계속 칭찬과 격려를 받은 이 아이는 6학년이 되었을 때 원고지 1,600매 분량의 소설을 썼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에 특출하면서 종합적인 인격이 갖추어지면 그 아이는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업신여기지 말고 칭찬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잃어버린 양을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양 100마리를 가졌는데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우리에 두고 또 찾은 즉 기뻐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12-13절).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결론으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은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절)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버려진 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일찍 부모를 잃고 소년소녀 가장이 된 아이들, 배움의 기회를 잃고 직업현장에 뛰어든 직업 소년소녀, 범죄단의 끄나풀이 되어 소매치기 조직배가 된 아이,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 장애자로 태어나서 제대로 돌보고 있지 않아 소외받고 있는 아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냉대 속에 탈선한 아이, 죄를 짓고 소년원에 수감된 아이, 이와 같이 잃어버려진 아이들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기성세대에 있고 우리 부모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제1 반항기가 2, 3세 때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아니야!” “싫어!”하는 부정적인 말을 한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결코 올바른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소외된 자, 잃어버린 자를 찾아야 합니다. 즉 이 작은 자 하나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의 청년들이나 선교회원들이 보육원을 방문합니다. 그들과 함께 놀아주고 안아주고 사랑을 나눠 주어야 합니다. 소외되고 작은 자 들과 함께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 사랑을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성탄절이나 명절 때가 되면 사회 고위층의 사람들이 방문하여 성금을 보육원에 내어 놓고 기념사진 찍고 어린이들을 불러 재롱을 피우게 하는 것이 싫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찾아와 함께 놀아주고 대화하는 여기에서 인간의 정서와 바른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린이들을 영접하고, 어린이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잃어버린 어린이들을 찾아 귀히 여기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
마태복음 18장 1-14절
설 교 : 2013년 5월 5일 어린이주일 낮 예배
찬 송 : 41장(내 영혼아 주 찬양하여라). 560장(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565장(예수께로 가면). 566장(사랑의 하나님 위하신 이름은).
어린이 날 조선일보에 <어린이는 천사가 아니다> 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린이를 천사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어린이는 어른들이 지나친 보호와 인격에 병든 어린이로 키웠기에 어른에게 인사 하나 제대로 못하고, 어린이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지 못해서 반항하는 어린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설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오늘 다는 아니지만 대학생, 노동자들의 과격한 시위 이것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타협하면 사꾸라라고 하고, 내 의견에 따르지 않으면 무조건 매도하는 비인격적인 태도는 어려서부터 바른 교육을 못한 데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두고, 어린이를 소재로 해서 말씀했습니다.
첫째, 어린이와 같이 되라(104절)고 말씀합니다.
둘째, 어린이를 영접하라(5-6)고 말씀합니다.
셋째, 어린이를 범죄케 말라(7-9절)고 말씀합니다.
넷째, 어린이를 업신여기지 말라(10절)고 말씀합니다.
11-14절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자, 곧 잃어버린 어린이, 탈선한 어린이 하나를 포기하지 말라고 찾자는 교훈으로 말씀했습니다.
첫째,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 에즈워드는 무지개를 보면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내 마음 기뻐 뛰노누나
내 인생 어렸을 때 그러하더니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다.
늙어서도 그랬으면,
그렇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나는 죽으리
어린이야말로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내 생애 모든 순간순간이
순진한 경건으로 이뤄지기를…”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순진한 경건, 그 마음은 바로 하늘의 마음입니다.
어린이가 웃는 밝고 맑고 환한 웃음!
신뢰하는 마음!
거짓 없는 마음!
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른들은 그 마음을 멍들게 하면 안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차를 몰고 버스가 드물게 다니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버스 정류장에서 학교를 가려고 기다리고 있던 1학년짜리 두 아이가 태워달라고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차를 세웠습니다. 아이가 차문을 열고 탑니다. 그런데 같이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던 어머니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왔습니다. 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이 납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아이는 문을 열고 차 뒷좌석에 앉았습니다. 아이를 내리게 하지 못한 어머니가 아이와 같이 탑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무안해서 “요즘 세상에 나쁜 사람이 너무 많다”고 횡설수설합니다. 목사님이 말을 건넸습니다.
“이 동네에 사십니까?”
“예”
“그 동네 교회의 조목사님하고 친구입니다.”
“목사님이세요? 저 조목사님 교회의 집사예요”
이제는 믿을 수 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목사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집사님, 믿고 사세요.”
그 어머니는 차 뒤에서 연신 아이를 타이릅니다.
“너 다음부터 아무 차나 세우면 때려준다. 나쁜 사람이 많아. 이 녀석아! 너 잡혀가면 엄마도 못보고 죽어!”
그렇게 불신과 부정 속에 자란 아이들이 후에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 목사님이 그 어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못해준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했습니다.
톨스토이의 인생론에 보면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농부가 지게를 지고 갑니다. 그런데 그 농부의 얼굴이 어떻게나 평화스럽고 온화하고 행복하게 보이던지, 저 사람도 가난한 농부인 것은 틀림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촌장께서는 가난한 농부인 것 같은데 어떻게도 행복한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그 농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니 내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속에 계십니다.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데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곧 어린이의 깨끗한 마음입니다.
둘째, 어린이를 영접하라.
영접한다는 것은 그를 환영하고, 그를 위하여 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른은 어른의 세계가 있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의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날 때부터 어른이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마치 자기가 어린 시절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어린이에게 완벽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린이의 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 사랑을 하고 싶어 합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교회에서 학생수련회를 갖습니다. 그런데 수양회가 끝나고 돌아오면 속옷을 비롯한 옷들이 한 박스씩 나옵니다. 학생들이 자기의 것을 챙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젖으면 젖은 대로 내팽개칩니다. 이것은 아이가 풍요 속에 자라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운 집의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어려서부터 필요를 채워주기 보다는 욕망을 채워주어서 그런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조급해진 부모는 그 아이가 자라기도 전에 온갖 것을 다 사줍니다. 겨우 돌이 지난 아이에게 세발자전거를 사 줍니다. 그 아이는 세발자전거가 얼마나 좋고 가지고 싶었던 것인지 거기에 대한 고마움을 모릅니다. 아이는 계속해서 값비싼 것만 요구하게 됩니다. 물건을 아껴 쓸 줄을 모릅니다.
이것은 부모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아이의 성격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족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어린이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에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업신여긴다는 것은 얼굴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천사가 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업신여긴다는 것은 아이를 가치 없이 여기고 그들의 의견을 유치하게 생각하고 무시해 버리는 처사입니다.
아이가 좋은 옷을 입고 나왔는데 “너 미스코리아 되겠다!”고 빈정댑니다. 아이의 학교 성적이 나쁘면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라고 한다든지, 공부 외에 다른 면에 특출한 재능이 보이면 “공부를 좀 그렇게 잘하지!” 하는 이런 식의 태도는 안 됩니다.
사실이지 아이가 전 과목 100점, 전 과목 수를 받으면 이 아이는 별 볼일 없는 아이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자녀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면 예외가 없어도, 이기주의적이라도, 교만해도, 돈에 대한 지나친 욕구가 있어도 하나도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든 면에서 잘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모든 면에 완벽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린이도 모든 것에 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운동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기억력도 좋고, 창의력도 있고, 수학도 잘하고, 국어도 잘하고…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그것은 모든 면에서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어느 교수댁의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성적표가 가, 양, 투성이었다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그렇다면 핀잔을 주며 야단을 쳤겠지요. “양이 몇 개야? 전부 가네!” 하고 야단을 치고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수의 아들이 국어만은 수를 받았습니다. 그 교수는 진심으로 그 아이를 칭찬했습니다.
“야! 우리 석이가 수를 받아왔네. 국어가 최고 점수야, 참 잘했어!”
이 아이는 어깨가 으쓱해 졌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계속 칭찬과 격려를 받은 이 아이는 6학년이 되었을 때 원고지 1,600매 분량의 소설을 썼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에 특출하면서 종합적인 인격이 갖추어지면 그 아이는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업신여기지 말고 칭찬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잃어버린 양을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양 100마리를 가졌는데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우리에 두고 또 찾은 즉 기뻐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12-13절).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결론으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은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절)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버려진 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일찍 부모를 잃고 소년소녀 가장이 된 아이들, 배움의 기회를 잃고 직업현장에 뛰어든 직업 소년소녀, 범죄단의 끄나풀이 되어 소매치기 조직배가 된 아이,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 장애자로 태어나서 제대로 돌보고 있지 않아 소외받고 있는 아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냉대 속에 탈선한 아이, 죄를 짓고 소년원에 수감된 아이, 이와 같이 잃어버려진 아이들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기성세대에 있고 우리 부모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제1 반항기가 2, 3세 때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아니야!” “싫어!”하는 부정적인 말을 한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결코 올바른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소외된 자, 잃어버린 자를 찾아야 합니다. 즉 이 작은 자 하나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의 청년들이나 선교회원들이 보육원을 방문합니다. 그들과 함께 놀아주고 안아주고 사랑을 나눠 주어야 합니다. 소외되고 작은 자 들과 함께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 사랑을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성탄절이나 명절 때가 되면 사회 고위층의 사람들이 방문하여 성금을 보육원에 내어 놓고 기념사진 찍고 어린이들을 불러 재롱을 피우게 하는 것이 싫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찾아와 함께 놀아주고 대화하는 여기에서 인간의 정서와 바른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린이들을 영접하고, 어린이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잃어버린 어린이들을 찾아 귀히 여기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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