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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주일]아버지의 마음 ( 눅 15: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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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수인
댓글 0건 조회 786회 작성일 21-05-07 11:39

본문

아버지의 마음  ( 눅 15: 20-24 )


옛날에는 늙고 병든 사람을 산체로 구덩이에 묻는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한 가난한 농부와 늙고 병든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농부는 늙은 아버지를 고려장 시키기로 작정하고 아버지를 업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늙은 아버지는 아들의 등에 업힌 채 꽃가지를 꺾어서 가는 길마다 던졌습니다.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왜 꽃가지를 길에 뿌리세요?”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산은 깊고 날은 저물어가는데 행여 네가 돌아가는 길을 잃을까봐 그런단다."

죠지 허버트는 "한 분의 아버지가 백명의 스승보다 더 낫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인생의 근본이며, 마음의 지주요, 근엄하고도 깊은 사랑의 화신입니다.
그러나 세릴 그레스는 "아버지가 되기는 쉬워도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잃었던 아들은 되찾는 비유입니다. 이를 흔히 '탕자의 비유'라 합니다.

그러나 윌리암 버클레이는 "이 부분을 결코 탕자의 비유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의 아버지의 비유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한량없는 사랑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인 거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확인 하시고 큰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1. 아버지의 마음은 아낌없이 주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앞부분인 12절을 보면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이 달라고 하는 재산은 본래 아들의 것이 아닌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피땀 흘려 모은 아버지의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아들이 자기 것인양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불평없이 그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왜 그 재산을 달라고 하는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 재산이 어떻게 없어질 것인지도 짐작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재산을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왜일까요?
①아들이 재산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②아들을 위하여 모은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③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마음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조건없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마음이 사랑이듯이 자기가 낳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마음도 사랑입니다.
아낌 없이 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배반하고 죄악에 빠져 멸망당할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기의 독생자 까지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증거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4:10-11)

그러기에 아버지는 밤낮없이 아들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2.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본문 20절에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집을 나가버린 아들이 돌아오기를 한없이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떠난 아들은 불효 막심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불효 막심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떠난 다음 아버지는
① 걱정하며

② 기다렸고
③ 바라보는 것이 일을 계속 하신 것입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고통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감이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그것이 곧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과연 내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인가?
아버지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스스로 깨닫고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죄악된 인생은 자기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법으로, 정치로, 제도와 풍습으로, 예술과 과학으로, 철학과 종교로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아름다운 낙원은커녕, 죄와 저주와 사망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점점 어둠이 깊어지고, 고통과 절망은 커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전능하신 사랑의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남이 모든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인간을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라.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3.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본문 20절에는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아버지의 용서하시는 행동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1)첫째,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연세가 많으셔서 눈도 흐린 상태에 있었고, 집을 나갈 때와는 너무나도 비참하게 변해버린 아들이건만 그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말입니다.
과연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알아야 합니다.(시138:6, 139:1-4).

2)둘째, 측은히 여기며 맞으려 달려갔습니다.
여기에서 ‘측은히 여겨’라는 말은 ‘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동정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 ‘잘 대해 줄 수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려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배고픔과 절망 속에서 겨우 용기를 가지고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연민의 정을 안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트랜취(Trench)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달려오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성애의 극치다"라고 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①눈으로 보았고

②마음으론 불쌍히 여겼고
③다리는 뛰어 갔으며

④손으로 안았고
⑤입으론 입을 맞춘 것입니다.

3)셋째,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을 맞추니'란 뜻은 지극한 애정의 표시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불효와 반역과 방탕함에 대한 적극적인 용서의 표였습니다.
그 아들이 자기의 입을 열어 그 죄를 고백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이미 다 용서해 버리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는 바로 범죄한 인생들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과 약속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1:18)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2).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赦)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31:34).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 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44:22)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용서해 주셨고, 아버지는 자식을 이렇게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4. 제일 좋은 것을 주는 마음입니다.

본문 16절 이하에서는 탕자의 깨달음과 결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이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했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는 재산을 탕진하고 이방인의 돼지를 치면서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죽게 된 순간 모든 것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들의 자격이 아닌 하나의 품군이 되려는 마음을 안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후회하고 회개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제 탕자는‘품꾼’즉 '날품팔이'가 되더라도 아버지께 가는 것이었습니다.
날품팔이는 일한 품삯 외에는 아무것도 청구하거나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맞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제일 좋은 것들을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뻐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2-24)

이것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기뻐하며, 아들은 아버지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뻐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그의 사랑을 믿고 그 안에 거하십시오.

서울 중앙청 뒤쪽에는 효자동이 있습니다. 이곳을 효자동이라고 하는데는 이런 유래가 있습니다.
어느 집에서 시아버지의 실수로 인하여 이불 밑에서 어린애가 깔려 죽었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생각하기를 이 사실을 시아버지가 아시면 속상할까봐 얼른 죽은 아이를 엎고 남편에게 달려갔더니 남편은 죽은 자식을 보고 할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주는〈불효자식〉이라고 냅다 뺨을 쳤더니 그 뺨을 맞고 죽었던 어린아이가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 소문이 퍼져서 그 동네를 효자동 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옛날 중국의 순임금의 아버지 고수는 계모의 꾀임에 빠져서 후처와 함께 아들을 몹시 괴롭혔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복동생이 물에 빠져 죽게된 것을 보고 순이 빨리 들어가 건네 주었습니다.
계모가 그것을 알고 그것은 순의 계획적으로 한 짓이라고 하여 피가 나도록 때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순은 지극한 효성을 다 했다고 한다.
한번은 계모가 마른 우물에 비녀를 빠트리고 순을 보고 들어가 건져 가지고 오라고 해 놓고는 얼른 남편에게 가서 물이 없는
샘을 그대로 두면 위험하니 메워 버리라고 하고는 순이 우물에 들어간 사이 돌과 흙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순은 다행이 옆으로 굴이 뚫려 있어서 빠져 나왔다고 합니다.
한번은 순에게 썩은 곡식을 다락에서 딴 곳으로 옮기라고 명령 해 놓고 순이 다락으로 올라가는 사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그러나 순은 마침 옆에 삿갓 두 개가 있어서 그것을 양 겨드랑에 끼고 뛰어 내려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못된 부모지만 효도를 잘해서 그 소문이 요임금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요임금은 효성이 지극한 순을 데려다가 자기를 이을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순 임금이 되었습니다.

한 아버지 어머니는 열 자녀를 기르는데 열 자녀는 한 부모를 섬기지 못한다(독일 속담).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완전하신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과연 그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여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세상의 험한 나그네 생활을 승리케 하시려고 보혜사 성령 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는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하여 채워주십니다. 마음” 그것이 진정 우리 크리스챤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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