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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기념주일]순교의 신앙이 회복되어야 할 교회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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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수인
댓글 0건 조회 747회 작성일 21-06-1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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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기념주일]순교의 신앙이 회복되어야 할 교회 (갈 2:20)

우리의 신앙생활 현실을 정직하게 보자. ‘바르게’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냥 ‘교회생활’을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여기어도 쉽지 않은데, ‘바른’이라는 제한적인 단어가 붙으면, ‘바르다’는 것이 주는 물음 때문에, 동시에 ‘그르다’는 잣대 위에 서야하기 때문에 신앙의 길이 여간 어려운 걸음이 아니게 됩니다. 그래도 예수님 믿겠다고 고백했고,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나선 걸음이니, 이왕이면 ‘바른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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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회개하라”가 첫 소리입니다.(막 1:15)

빈들의 소리도 주님의 길을 예비하면서 “회개하라”(마 3:2) 소리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의 첫 소리를 듣고 어떤 반응을 했던가요?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회개하라” 소리치는 입을 틀어막았죠.

만약 2,000년 전의 복음 시작 사건을, 오늘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으로 받아들인다면, 사실 이렇게 받아야 올바른 성경읽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회개하라”는 외침에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요?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예수를 잘 믿는데, 회개하라고? 웃기네!”하지 않을까요?

또는 자신을 빼고,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덩이로 듣지를 않고 누군가가 회개해야 할 텐데 하면서 강 건너 불구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죄인이니, 회개해야지”하지만,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뼈아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소망이 우리에게 있다고 자신 있게 큰 소리 칠 수 있을까요?

한 때 ‘기장교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고개를 들 수가 없어졌습니다.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타 교단들의 비윤리적이고, 비복음적인 사건들이 우리 안에서도 어둠의 독아(毒牙)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총회, 한신대학교, 교단 소속 기관들, 노회, 교회들에서 터지는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뉴스가 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코 어느 개인 한 사람만의 일탈로 치부하고 팔짱을 끼고 모르쇠로 고개를 돌려 피할 사건들이 아닙니다. 한 신앙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 모두가 함께 짊어지고 풀어야 할 신앙적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잘못되고, 무엇이 부족하기에 이런 창피한 일들이 거룩한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일까요?

 

2. 어떤 하나님을 만났나요?

신앙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 이해에 따라 그 행태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질투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축복하시는 하나님, 해방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 창조질서를 보전하시는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지키시는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 평등의 하나님 등등, 정말 다양하고 여러 모양으로 활동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에서 만납니다.

성경으로 만난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따라, 우리의 믿음의 형태도 다양하게 달라졌습니다. 문제는 고백하는 하나님은 온전한데, 고백 후에 나타나는 신앙생활이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기복신앙을 부추기는데 하나님이 동원되고, 교회생활 잘 해야 심판받아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고 축복받아 영생한다는 데에도 하나님께서 등장합니다. 해방과 자유, 인권을 주장하며 불의한 정권과 격렬하게 대결하여 사회정의를 세우는 데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며, 소위 세상에서 성공하여 권력을 쥐거나, 사회적 지위를 높이거나, 경제적 부요를 누리는 데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주실 줄 믿습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탄원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일까지 생기기도 합니다. 모두가 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데 하나님을 모셔 온다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께서 이렇게라도 역사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행태가 ‘바른 것이냐?’ 하는 물음 앞에 설 때입니다. 과연 성경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만 하는 하나님으로 믿으라고 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다고 외치며 투쟁만하면, 뒷자리 어두컴컴한 곳에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불의한 짓을 해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실까요? 평등을 소리 높이며 가난한 자를 위하기만 하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탐욕으로 뱃속이 더러워져도 괜찮다고 용납하시며 눈감아주는 너그러우신 하나님이실까요? 고백하는 것과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른 이중적인 신앙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3. 피의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놀랍게도! 성경에서 일관되게 증언하는 하나님은 피의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삭헌제 사건을 보시죠.(창 22:1-18)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창 22:1)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창 22:2)을 번제물로 바치라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정말로 이삭의 목에 칼을 들이댔습니다. 황급히 천사가 동원되고, 이삭을 대신해서 숫양이 피를 흘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속이 새까맣게 타버렸는지 어떤지 에는 무심하시면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창 22:12)하고,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한다.”(창 22:16)하며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아브라함을 흡족히 여긴 것이죠. 피의 제사 후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만약’ 숫양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가정법으로 사건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의 피는 대지를 적셨을 겁니다. 모리아 산에서는 숫양이 이삭을 대신 하긴 했지만, 피의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이 피의 제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유월절 절기는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 믿음의 근간(根幹)입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 표적이 된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대대로 지킬지니라.”(출 12:13-14) 어린 양의 희생은 모든 것의 맏이를 대신 한 것이죠. 하나님은 사람의 맏아들만이 아니라, 가축들의 초태생, 처음 익은 열매, 첫 추수를 바치라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처음 것을 ‘내 것’이라 하실까요? 왜 처음 것 받으시길 기뻐하실까요? 첫 태생의 의미는 생명을 잇는 처음 것입니다. 곧 모든 존재의 전부를 ‘내 것’이라 하시는 것이죠. 존재의 전부를 바치는 상징이 피 속에 담겨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중요한 제사가 있습니다. 속죄제입니다. 레위기에 자세하게 방법이 기록되었는데,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뿌리고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레 4:35) 했습니다. 이 역시 피의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임을 증언합니다.

 

4. 피의 제물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를 받고 뭍에 올랐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한 것은, 유월절 희생양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사야의 예언인 ‘고난 받는 종’으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사 53:47)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십자가의 길을 향하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요 17:4)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기뻐한다’고 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피의 제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피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기 때문에 기뻐하신 것이죠. 이 일을 히브리서는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려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고 했습니다. 피의 제물이 된 예수님은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으로 아사셀 염소가 되어 고난을 받았습니다.(히 13:12)

 

5. 순교의 피로 세워지고 자라는 교회

그리스도교는 기억의 종교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3-25에서 정말 중요한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떼어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성만찬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피의 제물이 되신 십자가의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라는 것이죠.

 

교회는 이 피의 제물이 되어 몸과 피를 나누어주어 죄인들의 생명이 되어주신 십자가를 기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나도 그처럼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주님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후, 성만찬공동체가 세상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핍박의 파도는 새싹이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을 시기하였습니다. 스데반이 사울 앞에서 순교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순교의 피를 헛되게 하지 않았죠. 흩어진 성도들이 들불처럼 복음을 전하고, 세상 구석구석에 주님의 몸이 섰습니다. 다시 시련의 폭풍우가 불어치고, 순교의 피가 땅 위에 뿌려졌습니다. 폭풍우를 피해 흩어진 성도들은 흩어진 그곳에 십자가의 복음을 마른 땅에 빠지지 않도록 박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피의 제사가 반복하여 드려지는 동안, 땅 끝까지 복음은 전파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될 일이 있습니다. 순교의 피가 “교회를 부흥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따라 사는 사람”이 많아졌을 뿐입니다. 이 중요한 사실이 구별되지 않으면, 거룩한 희생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행한 일들이 무엇입니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부흥, 교회 성장,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꿩 잡는 것이 매”식으로 매진해 왔습니다. 그 열매가 무엇이던가요? 알곡이었나요? 쭉정이였나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이끌지 못하고, “교회 다니면 복 받는다”고 ‘복’에 매달려 살도록 기만했던 일은 얼마나 많습니까? 일일이 나열하려면 밤을 새우며 소설 100권을 써도 모자랄 것입니다.

 

왜 이런 꼴이 되었습니까? 순교신앙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회개하라”는 복음의 첫 외침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순교신앙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6. 순교의 신앙이 회복되어야 할 교회

그러면 순교신앙이란 어떤 것을 말할까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계 2:10)하셨으니, 목숨을 끊어 “죽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 성도는 한 사람도 없게 되겠지요.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서 순교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a) 이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는 것, 이것이 순교신앙이요,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피의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겠다고 나선 성도들, 성직자라면, 이제부터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도록”해야 합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는 방법대로 사는 신앙, 이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과 같지 아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교인이 되기 전에, 먼저 바른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흠 없는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악의 유혹이요 어둠의 속삭임인 거짓과 기만과 속임과 탐욕 등 어둠에 속한 것들과 손잡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속사람이 지르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솔직히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우리는 불평을 많이 합니다. 우리 교단을 볼 때에도 걱정도 끊이질 않습니다. 분노도 생깁니다. 그런데 불평하고, 걱정만 하고, 화만 낸다고 잘못된 교회가 바뀌던가요?

 

● 1960년대에 한국을 방문한 펄벅 여사가 명동에 있는 청동다방에 들렸습니다. 이 다방에는 공초(空超) 오상순 시인이 마련해 둔 사인북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펄벅이 남긴 글입니다.

『어둠을 불평하기보다는 단 한 자루의 촛불이라도 밝히는 것이 났다』

어둠을 보고 나의 촛불 하나를 켜는 것, 지금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만사의 성사(成事)에는 희생 없이 되는 일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성장하는데 부모의 희생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학자가 배출되는데 스승의 헌신적인 가르침이 따릅니다. 나라를 국난에서 지키는데 순국의 희생이 있었으며, 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하는 데에도 수많은 희생의 붉은 피 흘림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자그마한 가게를 지켜 가족의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일용할 양식을 얻는 데에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의 가장의 발품, 노력이라는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몸으로 체득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는 길에 순교신앙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순교신앙이 주님의 몸인 교회를 자라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피의 제사’를 원할까요?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성도들이 피의 제사를 드렸던 때는, 오히려 교회는 평화롭고 평안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존경도 받았습니다. 성도들은 비록 고난의 태풍 속에 있었지만, 확고부동한 소망과 믿음으로 신앙은 더욱 단단했고, 성결(聖潔)했으며 경건했고 맑았습니다. 분명하게 어둔 세상의 빛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련도 없고, 탄압도 없는 오늘에는 타락한 교회, 교인들, 직분자들, 성직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게 된 것이죠. 순교신앙이 상실된 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보다, 자기를 만족하게 하는 것으로 멈추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 가짜 믿음일 뿐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한국교회의 회생은 피의 제사의 회복에 달려 있습니다.

순교신앙이 살아나야 합니다.

오늘 누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닮아가면서,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단 한 자루의 촛불’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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