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제목: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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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제목: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교독문: 120. 성탄절(2). 말씀: 누가복음 2:8-14. 찬송가: 115. 기쁘다 구주 오셨네.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디이비스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12월에는 두 개의 크리스마스가 있다.
하나는 글자 그대로 크리스마스이고, 다른 하나는 X_mas다.”
여기에서 X라는 글자는 라틴어가 아니라, 미지의 수, 모호한 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디이비스는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모르는 모호한 크리스마스를 X_mas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X_mas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검은 크리스마스입니다. 권력과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연스럽게 선물을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알고 검은 뇌물을 주고받는 성탄절을 말합니다.
◆핑크 크리스마스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점잖고 인품이 있어 보이던 사람들이 기회는 이 때다 하고 광란적인 행동으로 돌변하여 온갖 도색과 음란과 술로 지내는 크리스마스를 말합니다.
◆회색 크리스마스입니다. 파티, 친교, 술 모임 등을 가지다 보니 정신이 몽롱하여져서 회색이 되어 버린 크리스마스를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크리스마스를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이지요.
▮이런 X-mas와 대비되는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하얀 크리스마스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얀 크리스마스는 눈과 같이 희고, 성결 되게 지내는 크리스마스를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목자들의 처음 성탄이 바로 하얀 크리스마스였습니다.
▮2024년에 맞이하는 성탄절이 바로 하얀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첫 번째 성탄절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 사람들은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신분이 달랐고 국적도 달랐고 축하하는 방법도 달랐습니다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기쁨과 감사로 아기 예수를 경배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목자들에게 성탄의 처음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자들이 밤중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을 때 천사들이 나타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전합니다.
천사들이 전해주는 소식은 크게 3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닌 몇몇 사람이 아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은 얼마나 좋은 소식이겠습니까? 두 번째로, 아기 예수의 탄생이 그렇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은 그 아기가 구주, 즉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 메시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런 구세주로 오신 메시야를 구분할 수 있는 표시가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라는 것입니다.
아기를 쌌던 강보는 값싼 천을 말합니다.
▮구유에 누워있다는 것은 아기가 동물들의 축사에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처럼 구세주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구분하기 좋은 표시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출산은 예전이나 오늘이나 거의 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방이 없어도 출산하려는 산모를 짐승의 마구간으로 보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기를 강보에 싸서 구유에 누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졌습니다. 누가는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16:18)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그렇다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어있는 아기는 무슨 표적이겠습니까? 오늘은 주님이 오신 이유를 다른 환경과 상황과 사람들의 악함을 표적으로 보는 특별한 말씀으로 누려 보려고 합니다.
1. 먼저는, 사람들의 악함의 표적입니다. 당시 호적하기 위하여 고향을 찾아간 많은 사람들 때문에 여관에 자리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만삭이 된 산모를 마구간으로 보낸다는 것은 정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산모를 마구간으로 보내고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성탄절 연극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대본에는 요셉이 ‘방을 빌려주세요, 아이가 태어나려고 합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
여관 주인은 ‘방이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세요.’ 그렇게 대답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연극은 대본대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옆에 있던 여관주인의 아들이 그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떠나가는 요셉을 부르는 것입니다. ‘요셉, 다른 곳으로 가지 마세요. 제방이 있으니 마리아를 데리고 제방으로 빨리 오세요.’ 이 여관집 아들은 대본에도 없는 말을 하였습니다. 당연히 연극은 엉망이 되어 버렸지만, 사람들은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보게 되었고 잊을 수 없는 성탄절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방이 없다고 축사로 요셉과 마리아를 쫓아낸 것은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악하고 이기적이었는가? 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들 때문에 주님은 마구간으로 쫓겨 갈 수밖에 없었고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지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진 아기는 인간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잘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어있는 아기가 오늘날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먹지 못하여 뼈만 앙상하게 남겨진 아이들, 파리 떼가 온 얼굴에 달라붙어도 그것을 쫓을 힘이 없는 아이들, 병들어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아이들, 전쟁의 상처로 얼룩진 아이들. 비단 이런 아이들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이런 있을 수 없는 일들,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것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리고 영적으로 죽어 가는 아이들을 방치하죠.
▮옛날 베들레헴 사람들만 그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바로 그런 일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는 인간들의 악함과 죄인 됨을 잘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그러기에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에게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 주님은 우리에게 방을 내주라고 하십니다.
2. 두 번째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오심을 믿지도 않고, 다 제각기 자기의 안위와 하나님을 모르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무지로 죽어 가는 표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런 계획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수차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언된 인간의 구세주는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자가 없기에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어있는 아기였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는 그러기에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함박눈이 몹시 내리던 성탄절 날이었습니다. 믿음이 깊은 남편을 따라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내는 계속 의심을 토해 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실 수 있어요? 난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남편은 의심하는 아내에게 계속 설명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 문 앞에 이르자 이상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 왔습니다.
참새들이 눈이 많이 쌓여 먹이를 얻지 못하고 집문 앞에서 비실비실 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얼른 집으로 들어가 먹이를 가져와서 새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자 새들이 푸드득 하며 날아가 버렸습니다. 남편은 실망하며 말합니다. “새들아! 난 너희들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야. 이것을 먹지 않으면 너희들은 굶어서 얼어 죽는다고.”
그러나 새들이 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날아가는 새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뜻을 어떻게 너희에게 전할 수 있겠니? 내가 새가 되지 않고서는”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내의 뇌리에 무엇인가 스쳐 갔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속 사랑을 베풀었지만 인간들이 하나님 품을 떠났던 거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행 16:31)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인간의 몸을 입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인 된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인간이 되어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3. 세 번째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실 구세주의 표적이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은 화려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이 존경하고 좋아하고 높이는 것은 역시 보암직스런 위치나 권력으로 왔다면 어땠을 까요? 이 표적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셔야 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낮아지신 모습인지 모릅니다.
▮우리 인간이 짐승이 되어 짐승과 같이 사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육신 하나님은 개선장군처럼 인간의 화려함과 높음과 명예스러운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낮아지고 겸손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첫 번째 모습이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여리고 약한 아기의 모습입니다.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는 후에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마지막에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모습으로 그의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구유와 나귀와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시면서 이런 비천하고 낮아지심의 모습을 보이셨겠습니까?
왜 화려하고 높아지고 명예스러운 모습으로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세상을 비판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세상에서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예수님을 애써 외면하고, 화려하고 높아지시고 풍성하신 예수님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구주 되신 예수님의 표적은 다름 아닌 구유에 누워있는 모습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구주 예수님의 표적이듯이 오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이처럼 낮아지고 남을 섬기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고, 그 예수님을 믿어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일 때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축복과 평화를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기독교인의 표시는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벌어 잘 사는 것입니까? 높은 지위에 올라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독교인의 표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의 증거는 주님을 닮아가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낮아지시고 더욱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더욱 사랑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요 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성도의 증거가 기껏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증거가 기껏 식사할 때 고개 한 번 숙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증거가 이력서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면서 죄를 벗어 버리고 천국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절호의 기회를 얻은 기적이요, 표적인 것입니다.
세상이 이기적이고, 타락하고, 예수님은 없다고 말하며 동물 같이 사는 삶을 살다 지옥을 가는 이치와 법인데 우릴 구원하시려고 즉 회복을 이루실 이 말씀은 정말 큰 표족입니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오강남 교수가 ‘예수는 없다.’ 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초판이 발행된 지 몇 달 만에 13쇄가 발간 됐고 총 45,000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이 책은 무신론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현대교회와 교인들을 향한 비판의 책입니다.
“역사적 예수는 있지만 교회와 우리의 삶속에 예수는 없다.” 성탄은 있지만 예수가 없는 성탄, 성탄은 있지만 성육의 본질이 없는 성탄, 이런 면에서 예수가 없다는 도전에 할 말이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요 교회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비판을 받는 이유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하나님의 표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어있는 아기가 구세주의 표적인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삶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표적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표적으로 섬김과 희생과 사랑의 길로 즉 진리의 길로 걸어 갈 때 주님의 구원과 영생의 빛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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