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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백성을 향한 시험 - 출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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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수인
댓글 0건 조회 8회 작성일 21-05-15 20:14

본문

제목:하늘 백성을 향한 시험

말씀:출 16:4-5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가정의 달 가운데 어린이, 어버이, 그리고 승천하신 주님을 그리며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간절히 당신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님을 구하라.”고 말씀 하신대로 기도하는 자들에게 참으로 성경에 엄청난 대 역사가 이뤄지는 다음 주는 성령 감림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첫 번째 자기 증명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먹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시는 분이십니다. 미래학자들은 인구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집니다. 인구문제란 식량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지구의 생존 문제입니다. 인구문제는 미래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원래 120억 명이 살아도 넉넉한 공간과 먹거리가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도 방주에 들어가 충분히 일 년을 살도록 계획하시고 이루셨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스스로 인간의 식량문제를 해결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스스로 해결하시는데 사람들이 욕심으로 차지하기에 좁고 모자란 환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시험이나 아브라함의 시험이나 예수님의 첫 시험의 공통점은 먹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는 문제로 시험에 빠져 온 인류의 원죄를 일으켰습니다. 아브라함은 먹는 문제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아내를 내어주는 결정적 실수를 합니다. 먹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일이지만? 반대로 없으면 가장 심각한 시험이고 싸움도 발생됩니다.

먹는 문제는 심각한 절대 절명의 문제입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양식의 문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할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살이(from hand to mouth) 인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먹기 위하여 하루 품을 파는 일은 중요한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은 우리의 떡이 되셔야 합니다. 특히 생명의 떡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이 되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에 반드시 계약과 같이 서로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매매계약을 할 때, 그 계약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이 생길 때 그 계약은 파기되고 계약 파기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벌금을 상대방에게 지불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의 계약백성인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약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이 일은 참으로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련하신 피의 계약서에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죄인이면서도 그 계약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겠다고 마음의 낙인만 찍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약은 파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세와 태도가 계약백성의 삶 - 율법을 완성하는 삶이 아닐 때에는 즉시 그 계약은 파기되고 우리는 갑절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넘어지고 깨어집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하였고, 그로 인해 이방에 포로로 끌려가는 심판을 지주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러나 하나님은 길을 주셨습니다.

1.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휴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또한 상황이 되거나 시간이 있는 사람만 지켜도 되고 안 되도 할 수 없는 계몽이나 권고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을 관통하고 있는 복음입니다. 안식일은 십계명을 준수하고 율법을 완성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그 날은 특별히 이 복된 하루를 주셔서 많은 날의 마지막처럼 안식을 누리게 되는 예표와 같이 대표성을 띕니다. 그래서 이 날을 기쁨으로 맞고 은혜를 갚는 성도들에겐 참된 안식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근원이 됨을 깊이 자각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날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에게 천국의 계획과 지혜의 복인 하늘의 양식을 공급하십니다. 우리는 이 양식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율법의 완성되신 주님의 사랑과 그분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안식일이 하늘 양식인 ‘만나’와 결부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삶의 원천이 무엇임을 자각케 하고 그 양식을 한없이 공급해 주십니다.

2. 예수님은 안식일의 실체이십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8)

예수님은 안식일의 실체로 오셨습니다. 구약의 계약백성이 평일엔 하나님께서 주신 떡과 메추라기를 먹었지만, 주일만큼은 먹을 것은 미리 토요일에 준비하고 주일인 안식일에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았듯이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안식일은 진정한 영적인 생명의 양식을 먹는 날입니다. 광야와 같은 이 땅에서 승리하며 살아갈 능력을 받는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안식일은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 날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날은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는 날이요 새로운 힘을 공급받는 날이기에 복된 날입니다. 계약백성에게 이 날은 너무도 중요한 날입니다. 그 날을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은 그 날로 말미암아 우리가 계약준수의 힘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이 날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4절)

말씀과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너무 쉬운 일이지요. 그런데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라고 말씀하시고 이후에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을 잘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3:17에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에게 벌을 주십니다. 일을 하고 먹는 것은 평생을 지배하는 인간의 문제이며 시험입니다. 먹는 문제로 아담과 하와를 시험한 사탄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 시험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습니다.

세계가 식량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농촌경제연구원의 보고에 의하면 연간 곡물생산은 18억 2690톤에 불과한 반면 소비는 19억 3210만 톤이라고 합니다. 생산이 소비에 비해 1억 톤이나 부족합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세계적인 식량위기가 당연히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절실한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는 말씀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베푸신 다음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떡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했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 물러가고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너희들도 가겠느냐?”고 하셨을 때에 베드로는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영적 떡을 아는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 첫째, 예수님은 주리지 않게 하십니다.

35절에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주리지 않을 것”이란 말은 부정과거 가정법입니다. 이 말은 “내가 언제 배고팠었나?”라고 할 만큼 먹음으로 즉시 만족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6:31에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주리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런 쓸데없는 염려에서 해방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를 가지시고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 모든 것이 주리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먹지 못하고 굶주린 성도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긍휼의 기적을 메시야 기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마귀의 시험도 보세요. 첫 번째 시험이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주린 사람을 먹는 것으로 시험하고, 예수님은 주린 사람을 먹는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린 것이 시험이 되면 마귀의 역사이고, 주린 것이 채워지고 은혜가 되면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 여러분, 누가 제일 배고파하는지 아십니까? 건강한 자입니다. 한참 자라는 아이입니다.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프다면 끝장난 겁니다. 배는 고파야 하고 안 먹으면 먹고 싶어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공급하시는 영의 양식도, 생명의 떡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싶은 사람이 건강하고, 먹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으면 영적인 병이 든 상태입니다.

● 마태복음 5:6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말이 있습니다. 정말 주리고 목마른 갈구하는 마음 상태가 필요합니다. 생명의 떡은 주리지 않게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떡에 배고파해야 합니다. 예배를 막으면 피나게 싸워서라도 얻어야하고, 숨어서라도 기도회나 예배를 사모하는 자들이 바로 카투쿰의 생존 이유입니다. 마라나타! 주리고 목말라 해야 건강하듯이 영이 건강한 자는 생명의 떡에 고파합니다. 수시로 먹으려고 해야 합니다. 안 먹으면 이미 병든 상태인 것입니다.

● 둘째,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십니다.

33절에는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의 떡”이라고 합니다. 38절에는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이라고 합니다. 41절에는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인 것은 그 근원부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 혹은 “내가 주는 떡”이라고 하시는데 왜 목마르지 않고, 어떻게 배고프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기에 이 땅에서 나온 떡과는 근원부터 다릅니다.

마귀의 시험에 대한 굶주리신 예수님의 대응을 보세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 한 마디에 마귀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합니다. 이 말은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떡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늘로서 오는 생명의 떡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생명의 떡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갓난아이가 세상의 떡을 먼저 먹고 태어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이 땅에 태어나 육을 살리는 먹을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23에는 “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은 그 근원이 사람과 다릅니다. 하늘에 근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일 수 있고, 영원할 수 있고, 주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떡은 먹고 나면 배가 고픕니다. 어떤 이는 먹고 돌아서면 또 배가 고프다고 합니다.

● 셋째, 예수님은 영생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먹는 것 때문에 영생하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생명나무 과실은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한 사망으로 가는 길을 아는 선악과를 먹고 죽었습니다. 반드시 죽게 된 사람에게 예수님은 먹고 영원히 사는 영생하는 떡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먹는 것 때문에 죄가 시작됩니다. 세상의 먹는 것으로 영생할 수 있습니까? 정반대입니다. 먹는 것 때문에 망합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이 바로 그랬습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그렇게 사람들이 먹는데 탐하고 먹는데 온 정신을 다 쏟았답니다.

로마서 14:17을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왜 ‘아니요’라고 강조하시는지 아십니까? 너무 소중하고 너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은 즐거움이고, 천국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혼인잔치의 비유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합니다. 먹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먹는 것은 그리 가치 있는 일은 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떡 나무라고 합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생명을 주는 떡이 십자가에서 자랍니다. 이것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라는 떡을 먹으면 죽어도 삽니다. 이런 영원히 사는 축복은 앞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것입니다. 계시록 7:16에는 “저희가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영생하는 떡을 먹는 하늘나라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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