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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흔적이 내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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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수인
댓글 0건 조회 7회 작성일 21-06-19 02:18

본문

이런 흔적이 내게 있는가?

말씀: 갈 6: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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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 강수진 씨는 지금으로부터 40 여년 전인 지난 1986년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최연소 단원으로 입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발레단에 입단했다고 해서 그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그는 7년 동안 군무만 하는 이름 없는 무용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연 배우들이 무대 중앙에서 관중들의 시선을 받으며 멋지게 무용을 할 때에, 그녀는 주연 배우들의 뒤에서 조명도 받지 못한 채 여러 무용수들과 함께 춤을 추다가 사라지는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무명의 발레리나 강수진 씨는 참혹할 정도로 많은 연습을 했습니다. 그 것만이 남들보다 뛰어난 발레리나가 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루에 적게는 15시간에서 많게는 19시간을 연습했다고 합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발레 연습에만 몰두했다는 것입니다. 밥 먹을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말입니다. 발레리나는 ‘토슈즈’라는 신발을 신고 무용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토슈즈 한 켤레를 2-3주에 걸쳐 신지만, 강수진 씨는 하루에도 네 켤레씩 갈아 신기도 했습니다. 계속된 연습 때문에 남들은 2-3주 신는 신발이 그녀에게는 하루도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발레단 물품 담당자가 ‘제발 토슈즈를 아껴 쓰라’고 사정을 할 만큼 쉬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습니다. 그런 연습 때문에 1년 동안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진 것입니다.

토슈즈 안에는 나뭇조각이 덧대어져 있다고 합니다. 가볍게 날아올랐다가 사뿐히 내려앉는 동작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그 토슈즈 안에 있는 나뭇조각에 발가락이 수천 번 짓이겨지는 고통이 따릅니다. 연습을 할수록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발톱이 빠지고 살이 짓무르고 피가 나서 토슈즈에 엉겨 붙습니다. 그러면 토슈즈를 벗을 때에는 생살을 떼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상처들은 시간이 지나 아물어도 보기 흉한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니 그의 발이 성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피나는 연습의 결과 입단 7년 만에 솔리스트로 발탁이 되었고, 1996년에는 주연을 맡은 ‘프리마 발레리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간판 스타이자 슈투트가르트에서 가장 사랑받는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발레리나, 한 사람의 스타가 탄생하는 것은 결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발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지만, 이 흔적은 오늘의 그가 어떻게 탑의 자리에 오른지를 보여주는 모습니다.

이제 우리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아프카니스탄에서 순교한 배형규 목사님을 아실 것입니다. 2007년 7/25일 그분이 책상에 붙여 놓았던 것인데 “완전한 헌신은 나의 마지막 것을 드리는 것이다” 영원한 진리,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마지막 것까지 바칠 수 있는 헌신, 그 흔적이 순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책상머리에는 무엇이 붙어 있습니까? 혹 책상 앞에 아무것도 붙여두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늘 생각하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마지막인 생명을 바쳐서라도 꼭 이루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늘 생각하고 꿈꾸는 간절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세계일주 한번 하는 것입니까? 지금보다 더 크고 근사한 집으로 이사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소망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생을 걸쳐서 생명 바쳐서라도 꼭 이루고 싶은 일, 바로 그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참으로 목숨을 바쳐서도 아깝지 않은 가치 있는 것,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 그것을 발견해야 하며 또 그것을 위해 내 삶을 드리는 헌신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7절에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는 말은 ‘자신이 예수님의 종이라는 분명한 인식표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여기 ‘흔적’이라는 말은 낙인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노예가 되면 주인은 자기의 노예에게 ‘이 노예는 내 것’이라는 표시로 이마에 낙인을 찍었습니다. 노예는 그 낙인이 이마에 찍힌 채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 낙인이 찍힌 노예는 어디로 도망을 갈 수 없습니다. 도망가더라도 이마에 찍힌 낙인으로 인해 금새 어디서 도망쳐온 노예인지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의 책 『주홍글씨』에 나오는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이 그의 가슴에 ‘간통녀’라는 뜻을 가진 A자를 평생 달고 살아야 했던 것처럼, 옛날의 노예들은 평생 이마에 주인의 것이란 표시의 낙인이 찍힌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낙인이 자랑스러운 것이겠습니까? 부끄러운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부끄러운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낙인을 지워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 낙인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내 몸에 예수님의 낙인이 찍혔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 낙인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낙인(흔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자랑스럽게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낙인)이 찍혀 있다’고 자랑하듯이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지금 바울이 이렇게 피를 토하듯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외치고 있는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그가 처음 이 갈라디아 지역에 와서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그는 당시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 짐이 되는 자신의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갈 3:14절에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 바울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강력한 지도자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한번 결심하면 앞만 보고 전진하는 유형의 지도자입니다. 그런 바울에게도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느껴야 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여기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바울에게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질병인지는 많으누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바로 나를 힘들게하는 것! 즉 잘난 족보와 스펙과 경험과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영적교만과 십자가의 삶을 모르고 죽어가는 동료들이나 백성들을인 사람들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불평입니다. 여튼 그 병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 때문에 바울에게 몹시도 큰 고통을 주었음에는 틀림이 없었고 또 성도들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울을 거절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천사같이, 바울의 약함을 감싸주었고 오히려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 줄마음을 가진 만큼 바울을 사랑하는, 어떻게 보면 사제지간의 사랑이 담뿍 담긴 아름다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다음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간사한 것입니다.

바울이 떠난 2,3년 후 이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이 아닌 거짓진리를 가지고 들어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아픔입니까? 이 얼마나 큰 충격입니까? 자신의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로 사제지간의 사랑이 넘쳤던 교회, 가르침의 열정 앞에 단순히 배우는 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성장하던 교회가 이젠 변질된 타락의 길로 가게 될 때 가르치는 자의 그 고통을 여러분, 그 심정을 아십니까?

얼마나 통증이 컸으면, 그는 갈 3:3절에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렇게 사랑했던, 자신이 가르쳤던, 성도들이 하나 둘 진리에서 떠나고, 변질되어 가는 안타까움 앞에 그 상황을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얼마나 찹찹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바울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전심으로 죽을 힘을 다해 달려 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보니 자신의 나약함인 겨만과 울분이 올라오게 되는 병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변명이나, 자신의 입신양면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바울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시다시피 그는 누구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무서운 핍박자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자가 어떻게 변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참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고 유대전통과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성장했기에 헬라의 문화와 철학, 그리고 로마의 정치와 법에 익숙한 ?을 살았습니다. 또 그는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로마의 시민권을 돈으로 사기도 했지만 태어나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졌다는 말은 대단한 가문의 배경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당대 석학으로 알려져 있는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지성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바울이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 감옥에 집어넣고 교회를 핍박하게 된 것은 그냥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철학과 신학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앞장을 섰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에 모든 생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예수 믿는 사람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러한 열심은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생을 송두리째 변케 한 사건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이 가졌던 세상적인 지식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 온갖 고난, 수모를 겪었습니다. 결국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순교를 당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우린 모두 억지로라도 효도하려고 부모에게 용돈을 드리며 명절만이라도 찾아 뵙고 정을 나누며 스스로 이정도면 내가 도리는 하는 사람이지 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깨달음이 있는 성도는 어느 순간부터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알아서 부모님을 섬기고 순종과 감사와 은혜 갚음을 기쁨과 감사로 누리고 삶을 살 때 비로소 부모가 칭찬하는 자녀가 되듯이 우린 기독교라는 종교의 선택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명의 거듭남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객관적으로 바울을 따져 보면 그에게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돈이 있었습니까? 가족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건강이 있었습니까? 외모도 시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을 묘사하는 글을 보면 머리는 대머리였고, 얼굴도 못 생긴, 볼품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나마 좀 가지고 있었다고 할 만한 그의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 마져 그는 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거대한 도시인 에베소에 나타났을 때, 아름다운 건물로 가득한 고린도에 나타났을 때, 누가 그를 주목해 보았겠습니까? 명함에 찍어 내세울 만한 근사한 이름 하나 없었던 그가 가진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이루어진 수많은 기적들을 우리는 알고 있고 또 지금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바울이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본질, 자기의 정체성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까?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로써 일본 도자기 계의 대명사인 사쓰마야키의 15대 주인인 심수관씨가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지 40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긍지가 그대로 있는 가문입니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 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수관 소년을 작업실로 부르더니 구슬만한 흙덩어리를 뭉쳐 도자기를 빚는 물레 위에 올려놓고 바늘 하나를 조심스레 그 중심에 꽂았습니다. 그리고 물레를 돌리면서 무엇을 느끼는 지를 물었습니다. 수관 어린이가 물레는 도는데 바늘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자 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습니다. "움직이는 물레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찾는 것이 앞으로 너의 인생이다"

그때 수관 어린이는 아버지의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장한 뒤에는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야 그것은, 타국에 끌려온 조선도공의 피와 얼을 이어 받은 조선인의 후손으로써 확립하지 않으면 안될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가르침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의 패자로 눈물을 흘리며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무려 400년 동안이나 타국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움직이는 물레 속의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찾으라'는, 이 한마디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앙이란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중심을 찾아야 하는 것이요,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인식과 확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마 오늘 여긴 모인 여러분들도 이 각오와 자세를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헌신도 우리의 열정도 이 혼탁한 세상 탁류에 묻혀 사라질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내 몰아 죽게까지 한 정말 무서운 세상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미 악한 권세를 짓밟고 승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선 내 모습은

머리 잘린 삼손처럼 외형은 멀쩡한 것 같은데 우리 속은 텅 비어버린 능력도, 열정도 살져 버린 모습이 아닙니까? 한때는 오뉴월의 신록처럼 활력 넘치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리고 기쁨이 사라지고 열심히 식어지고 말았습니까? 왜 시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요? 왜 관심과 생각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속된 것에 기울어질까요? 혹시 진리의 말씀을 붙잡는 일에 기도로 진검 승부하던 그 일에서 점점 멀어지지는 않았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바울처럼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낙인)이 찍혀 있다’는 이 외침이 있나요? 늘상 말씀을 드리지만,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아-멘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 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아-멘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여러분인 것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나라의 장왕이 밤에 궁정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연회석장의 촛불이 모두 꺼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신하 중의 한 사람이 왕비의 가슴을 더듬었습니다. 깜짝 놀란 왕비는 자신의 가슴을 더듬은 그 신하의 갓끈을 뜯었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이 사실을 고합니다. ‘왕이시여, 불이 꺼진 틈을 타 어떤 놈이 제 가슴을 만졌습니다. 그 놈의 갓끈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갓끈을 왕에게 줬습니다. 그러자 왕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일제히 갓끈을 끊으시오.’ 다시 불을 밝히고 보니 모든 신하들의 갓끈이 떨어져있었습니다. 누가 왕비의 가슴을 만졌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지요.

그 후에 전쟁이 일어나 장왕이 적에게 완전히 포위됐습니다. 죽음 직전에 말을 탄 한 신하가 포위망을 뚫고 왕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왕비에게 갓끈을 뜯긴 신하였습니다. 왕이 자신을 용서하고, 살려주었기에 자신도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왕을 위해 충성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그토록 처참하게 달려 죽으셨는데 주님을 위해 목숨 걸고 달려본 적이 있는지요? 주님을 위해 달리기는커녕 맨 날 상처받고, 그 상처를 싸매어주기만 바라고 있지는 않는지요?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해야할 시점에서 뒤만 바라보고 주저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바울처럼 십자가 앞에 주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환경이나 사람이나 핍박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십자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음을 믿음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할 수 없어도 주님이 내게 능력 주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죽은 사람은 언제나 기뻐합니다. 항상 기도합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사순절 기간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예수는 분명 고난의 종입니다. 내 죄를 위해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희생의 터 위에 우리가 누리는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를 저주와 심판의 굴레를 벗지 못한 나를 이처럼 은혜 주신 하나님 앞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자기의 의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여전히 잠시 있다 사라질 육체의 자랑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비록 사도들이나 순교했던 분들 같은 흔적은 남기지 못할 지라도 무릎을 꿇고 ‘기도한 흔적은’ 있어야겠습니다. 우리의 얼굴에 ‘눈물의 흔적이’ 있어야겠습니다. 우리의 손에 열심히 교회에 ‘충성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내게 주신 행복한 환경과 재물에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계기판을 점검하십시오. 혹시 내 영혼의 배터리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내가 주님의 십자가보다 더 소중하게 붙잡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시간 다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어야합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손을 펴야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 안에 다시 살아나십니다. 내 손에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자랑으로 방전되었던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충전하는 비결입니다. 고갈되어 말라비틀어진 우리 영혼의 저수지를 풍성하게 채우는 비결입니다.

이제 거친 광야를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십시오.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과 함께 힘차게 세상을 향해 복음 들고 나아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내 영혼의 배터리를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그 십자가의 힘과 능력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영광스런 새날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내 안에 이 은혜의 흔적, 십자가의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고 새날을 열어가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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