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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아의 회심(행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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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른곰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1-01-2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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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아의 회심(행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루디아는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원래 두아디라 사람으로서 빌립보에 와서 자색 옷감을 파는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순종하여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마게도냐의 빌립보에 왔습니다. 빌립보는 로마식 도시로서 유대인들이 별로 없었으며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자 혹 기도처라도 있는가 하여 강가로 나갔다가 여자들 몇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14절 중반에 보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고 합니다.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잘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호 퀴리오스)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성령으로 복음 전파의 일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음을 열었다’는 것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해도 이 성령의 사역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자장가처럼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거스틴은 성령을 가리켜 ‘안에 있는 선생’(magister intus) 또는 ‘내적 선생’(interior magister)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말들의 소리는 귀를 때리지만, 선생은 안에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배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말의 소리로써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에 계신 선생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내는 소리는 헛됩니다.”(요한일서 2장 27절 설교/논문 중). 하나님의 기름 부음 곧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역사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중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의 설교는 냉랭합니다. 지적으로는 뭔가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은데 감동이 없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말하기를 (살전 1:5).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고 합니다. 바울은말씀’(로고스)으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령’과 ‘능력’으로 전하였습니다.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만 성령이 역사하여 말씀이 효력 있게 전파되겠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개혁교회가 약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개혁신학의 약점도 바로 이것입니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만 말하고 끝납니다. 개혁교회의 설교는 ‘오직 은혜’만 말하고 끝납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기도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개혁교회는 대체로 말씀만 강조하고 말았습니다. 원어 공부와 주석 훈련과 신학 공부 특히 교리 공부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는 목사가 되면 원문 분석을 잘해서 설교를 준비합니다. 대개는 교리적인 3대지 설교를 만듭니다. 준비가 다 되면 설교 원고를 타이핑해서 주일 날 강단에 올라가서 원고를 읽습니다. 개혁교회는 기도가 약합니다.

● 왜 개혁교회는 기도가 약한가? 나아가서 왜 서양교회는 기도가 약한가? 제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찾은 답은, 사실은 제가 찾은 것이 아니라 다른 학자가 연구해 놓은 것을 제가 발견한 것인데, 그것은 헬라 철학의 영향 때문이란 것입니다. (☞ 변종길, “서양 교회와 한국 교회의 기도”. 다음 카페 말씀나라에 있음. 유튜브에 강의 녹화도 있음.)

구약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은 소리 내어 기도했습니다. (렘 33:1~3) 0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0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다윗도 하나님께 아뢰고 부르짖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의 기도 습관을 따라 소리 내어 기도하였습니다. 그 증거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따라갔던 세 제자들은 졸면서도 주님의 기도를 들을 수 있었기에 성경 복음서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소리 내어 기도하였는데, 빌립보에서 옥에 갇혔을 때 바울과 실라는 밤중에 소리 내어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죄수들이 그 기도를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핍박을 받았을 때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여 기도하였고, 그때 땅이 진동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화적인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차차 약해졌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후기 플라톤주의 철학과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철학자는 플로티누스(Plotinus)와 포르피리(Porphyry)입니다. 그 핵심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영지주의 사상입니다. 순수한 영인 신에게 나아가는 합당한 수단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더러운 입술로 기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영으로, 침묵으로 나아가야 한다. 절대 침묵, 완전한 정숙을 강조합니다. 이런 사상이 기독교회에 들어와서 점차 확대되었으며 중세 교회에서는 침묵기도가 보편화되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침묵기도와 관조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깊은 단계로 올라가면서 이 땅에 일들은 무시하게 됩니다. 그것이 참 기도일까요?

제가 말씀을 전해 드렸지만? 기도는 하늘에 계획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힘인 것이고, 감사와 찬양과 섬김은 이 땅에서 올려 드리는 것으로 하늘에 쓸 것을 미리 쌓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부르짖고 더 담대히 영혼을 구하는 간절함이 묻어 나오는 것이지? 자신의 욕심이나 채우는 인본적인 기도로 조용히 기도해도 된다는 식의 거짓 믿음의 가식이 아닙니다.

16세기에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했지만 주로 교리 개혁교회 체제 개혁에 치중하였습니다.

물론 예배와 삶의 전반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신학자들조차 기도생활에는 오히려 덜하였습니다. 그 결과 개혁교회는 개인 기도를 주로 조용히 하고, 모임에서는 한 사람이 대표기도를 합니다. 전반적으로 조용히 기도하는 것을 좋게 여기고 침묵기도도 합니다. 음악 소리도 모기소리처럼 작게 틉니다. 그러니 10분쯤 지나면 다 가버리고 없습니다.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니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본적인 기도는 그 자체가 가식이며 중언부언이 됩니다.

뜨거운 사랑이 넘치는 부흥되는 교회를 보면 즉, 성령 충만한 교회의 기도회에 가 보면 제법 크게 왕왕거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살아 움직이고 생기가 있습니다. 설교도 대개 쉽고 실제적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신학은 안 좋은데 사람들은 많이 모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교회는 사람들이 잘 안 모입니다. 가면 답답하다고 합니다. 꽉 막힌 것 같다고 합니다. (물론 좋은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만 대체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선 기도가 약합니다. 조용합니다. 답답합니다. 그리고 설교가 너무 신학적입니다. 교인들은 아무 관심도 없는데 구조 분석하고 문맥 따지고 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냅니다. 또 구속사적 설교를 한답시고 너무 신학적으로 구도에 짜맞춥니다. 너무 객관적으로 치우치고 성도의 실제 삶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청중은 지겹다, 잠 온다고 합니다. 심지어 짜증난다고 합니다.

전문적인 말과 언어를 구사해야 지식을 얻는 것 같으니 당연히 지식을 구하고 지식을 말하려 하는가? 본데 사실 가장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은 알아듣는 말과 실제적인 문제를 들어 주시는 것 아닙니까? 최소한 사역자들이나 직분 자들이라면? 하나님께 기도하여 물어 보면 좋겠습니다. 쉬운 방법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쉬운 것이 다 저질이거나 나쁜 것이 아님을 우린 압니다. 이렇게 잘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약하니 성령의 역사가 약합니다. 그리고 설교의 내용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신학도 진짜 바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드러내어야 하고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배운 지식을 전하니 은혜가 안 되고 감동이 없고 지루한 것입니다. 찬양과 기도는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싫어 부르짖어야 됨.

(사 12: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6)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사 14:7) 이제는 온 땅이 조용하고 평온하니 무리가 소리 높여 노래하는 도다.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사도 바울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나아가서 온 집이 믿고 세례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였고, 밤낮으로 심히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도 잘 전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쉽게, 핵심을 잘 짚어서, 조리 있게, 효과적으로 잘 전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갓난아이들이나 어린이들도 그리고 학생들도 부모가 교수식으로 가르친다면? 참 졸리고 어려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어려운 말 삼가고 쉬운 대화와 동행하는 즐거움을 나눈다면 실제적인 질문과 미래를 다양하게 말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재미있으면 뛰어 놀고, 큰 소리로 신나해 하는 것처럼 예배와 기도회도 성도들의 물 좋은 거룩한 구별됨과 즐거움이 넘쳐서 40일을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금식을 하려 애 쓰지 않아도 누리는 참 즐거움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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