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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주일] 성서적 자연관. (롬 8: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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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수인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4-06-0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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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주일] 성서적 자연관. (롬 8:19-23)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봉독한 본문은 성경의 자연관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바울 사도의 자연관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지금 모든 자연이 탄식하고 있고,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통 중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들에 핀 한 송이 백합을 보며 그 꽃이 하나님의 솜씨를 뽐내고 있다든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하지 않고 그 한 송이 백합화가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이해하십니까? 바울이 이 글을 쓴 것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인데 그때 환경이 파괴되어보았자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그때 환경파괴 라는 말이 있기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피조물이 허무와 파멸의 종살이를 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자기들을 구해 주기를 소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바울의 자연관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17절 이하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범한 것은 아담인데 애꿎은 땅마저 저주를 받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저주를 받은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자연까지 저주를 받아야 합니까? 부당하지 않습니까? 실제 그때부터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고, 누구도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범죄 하기 전에는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아도 에덴동산에서 얼마든지 자연을 즐기며 수고하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어제 권사님들이 교회 밭인 웰빙 촌에서 풀을 뽑았습니다. 잡초 씨를 뿌린 적이 없는데, 잡초가 훨씬 더 잘 자랍니다. 제대로 야채를 먹으려면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잡초를 제거해야 먹을 수 있습니다. 수고하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고, 수확할 게 없습니다. 잡초가 더 잘 자라기 때문입니다. 근데 이것은 땅이 저주를 받아서 그렇습니다.

노아 때도 그렇습니다. 창세기 6장 5절 이하입니다.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사람의 죄가 세상에 가득한데 왜 육축과 공중의 새까지 쓸어버리십니까?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세상 창조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을 지을 때는 말씀으로 짓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특별히 당신의 형상대로 흙으로 지으십니다. 사람도 자연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별종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겁니다. 사람 몸도 광물질입니다. 흙입니다. 자연은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은 자연입니다. 창세기 3장 19절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허무의 노래가 아니라 인간도 자연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과 자연은 원래 하나입니다. 우리말에도 신토불이(身土不二) 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과 자연은 한 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타락하면 자연도 타락하고, 사람이 저주받으면 자연도 저주받고, 사람이 새로워지면 자연도 새로워집니다. 왜냐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도 신음하며 구속을 기다린다는 바울의 자연관을 보며 우리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이보다 탁월하게 해석한 말씀은 없습니다. 자연과 사람은 한 배를 탄 공동 운명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하나의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사람은 결코 자연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은 전적으로 무(無)로부터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자연에 대한 절대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선악과를 보십시오. 절대 따 먹어서는 안 되기에 금단의 열매인데, 그런데도 그 선악과는 은밀한 곳에 있지 않고 공개적인 자리 곧 동산 중앙에 있었습니다. 선악과는 너무도 유혹적이었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며 따 먹으면 지혜가 생길 법도 한 과실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따 먹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걸 절대 따 먹으면 안 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계시적인 의미가 있겠으나, 그 중 한 가지는 내가 그 과실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유혹을 해와도 주인이 따로 있기에 그걸 먹으면 안 되는 겁니다. 자연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 그게 내 것이라면, 자연이 내 것이라면 얼마든지 따 먹을 수 있습니다. 그건 내 주권의 행사입니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먹음직스럽게 보이고 지혜를 얻을 것 같아도 손대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따 먹었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벌 받은 겁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통해 자연이 인간의 소유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나오는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원어상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자연을 지배하라는 뜻이 아니라 돌보고 관리하라는 말입니다. 자연에 대한 선한 청지기, 착하고 신실한 관리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자연에 대한 소유권은 하나님이 가지시고 관리권만 인간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던 것’처럼 그 상태를 유지하도록 관리하고 돌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우리는 인간중심적으로, 아전인수로 해석해왔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우리는 파괴해도 된다는 말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이 이토록 참혹하게 된 겁니다. 인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연쯤은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자연이 인간의 희생물이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노아의 방주는 생각보다 큰 배입니다. 축구장만한 크기의 배입니다. 이게 3층이니 연면적을 따지면 축구장 3개 크기의 배입니다. 거기에 무엇이 실려 있습니까? 왜 하나님이 120년 동안 그 큰 배를 만들게 하셨습니까? 방주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의 8식구뿐입니다. 8식구 구원하자고 120년 동안 그 큰 배를 만들게 하셨습니까? 적재 구조를 보면 1-2층은 다 짐승이고, 3층에는 짐승의 식량이고 그 3층 귀퉁이에 노아의 8식구가 기거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뿐 아니라 자연을 살리기 위해 그 큰 배를 만들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만 사랑하신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벌레 한 마리도, 이름 없는 들풀도 사랑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 ‘공중의 나는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새 깃털에 예수 믿으라는 말이 새겨져 있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저 미물도 다 하나님이 보살피고 계심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너희를 안 돌아보시겠냐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절대 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센다고 하시는데, 자연도 그렇게 세심히 보살피십니다.

자연은 분명 숭배의 대상도 아니지만 파괴와 학대 그리고 약탈의 대상도 아닙니다. 관리하고 사랑하며 돌보아야 할 우리의 영원한 이웃이요 반려입니다. 절대 자연은 우리의 천적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구원받고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갈 우리의 동반자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이사야 11장 6절 이하입니다.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요한계시록 22장 1절 이하입니다.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천국은 자연이 완벽하게 회복된 나라, 결코 오염이 없는 곳, 생명나무 실과가 날마다 새로이 열리는 나라, 저주와 아픔이 없는 나라입니다. 천국은 인간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회복된 자연과 함께 살게 될 나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국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자연은 인간의 죄 때문에 인간과 함께 저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회복되어야 자연도 회복됩니다. 인간이 치료가 되어야 자연도 치료가 됩니다. 진정한 자연회복, 환경 운동은 인간이 새로워지는 중생 운동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이르기를, 자연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거듭난 인간들을 기다린다는 겁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자연이 저주를 받아 지금도 자연이 신음하며 탄식하며 구속의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황당한 소리로 치부하지 마시고 더욱 이 말씀 앞에서 응답하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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