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희생하는데 인정받지 못하는 삶과 보이지 않게 섬기면서 인정받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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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희생하는데 인정받지 못하는 삶과 보이지 않게 섬기면서 인정받는 삶.
행 15:36-41.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요셉이란 사람인데 바나바라 불리우고, 그 뜻은 위로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눅 10:40-42.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의 삶. 마르다는 지금 이곳에서 예수님을 야단칩니다. 자기는 지금 바쁘게 일하는데 나를 안 봐주고 누굴 봐주느냐? 이런 뜻인 것이죠.
“남의 필요를 돕고 위로하는 인생” 이런 유의 사람의 존재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남의 필요를 돕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순수한 것은 알지만 점점 자신이 힘들어 집니다. 왜 그럴까요? 헌신적이며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브리지(다리) 역할도 참 잘합니다.
마르다 같은 이런 유의 성도들이 칭찬을 처음에는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돕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이나 피곤해 하게 됩니다. 예전 교회에서나 캠프에 가면 간혹 식사 때에 권사님들이 “배가 부르니 조금만 주세요.” 하면 그러지 말고 많이 드세요~ 하며 마음껏 부어주시는 분들! 왜냐하면, 상대가 원하지 않아도 도움을 주려하는 자기만족에서부터 상대를 압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이 처녀인 자매인 경우 고시나 어려운 공부를 하는 형제를 만나면 그 형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만족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찌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가득한 것입니다. 사랑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의로 포장된 집착 수준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점점 남자에게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면서 귀찮게 하게 됩니다. 어머니 같은 모습이 만들어 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어떤 남자가 어머니 같은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됩니까? 버리자니 어머니 같아서 버릴 수도 없고 같이 살자니 어머니 같아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치게 헌신하는 맹목적인 헌신자들.
안디옥 교회의 일꾼인 바나바는 지나치게 돕습니다. -자아실현-
▮반면? 바나바는 무서운 사울을 선한 사울로 변했다고 말하며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연결 시켜 주는 다리 역할도 참 잘합니다. 이런 분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말을 인용한다면 “나는 너를 돕는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 나의 존재확인입니다.
●행 4:34~ 37.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남을 보이지 않게 돕습니다. 그러나 전혀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전 제산을 다 팔아서 돕는 완전 헌신자입니다. 간이라도 빼줄 사람들입니다.
● 그런데 여러분은 긍휼의 뜻을 잘 아시나요?
긍휼의 의미와 뜻 긍휼은 불쌍하다는 의미보다는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아이를 생각하는 어미의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도와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마치 산모가 태중 아이를 도울 수 있고 품을 수 있느 s한계를 두신 것입니다. 철저한 상대를 위한 베려와 사랑입니다. 집착이 아닙니다.
▮긍휼히(merciful) 여기는 자의 복 ●(마 5:7) "긍휼히(merciful)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로마서 9장15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긍휼한 마음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는 다릅니다. 이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가능한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긍휼을 베푼 가장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0장25-37절에 기록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며 불쌍한 마음이 생겨서 일차적으로 감정적으로 돌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끝까지 즉 그가 회복될 때까지 그를 돌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한 마음입니다. 감정적으로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어느 정도 돌보다 그만 두는 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듯이 실천(행함)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4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8장44절에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 다닌다고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가족이나 이웃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고, 용서하지 못하며, 성내며,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죄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죄는 밉지만, 죄인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가운데 들어가더라도 주님의 긍휼함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25편 6-7절을 보면, 긍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즉 긍휼의 근원지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소시(my youth)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여기에 쓰인 '긍휼히'라는 헬라어 '엘레에몬(ἐλεήμων)'은 '긍휼히 여기다' '동정하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 '엘레에오(ἐλεέω)'에서 나온 형용사이며 '엘레에오'는 '긍휼'이라는 중성명사 '엘레오스(ἔλεος)'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물론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좋으나 이 긍휼은 내 태중의 아이를 불쌍하다는 관념으로 키우지는 않기 때문에 좀 거리를 두는 것이죠.
▮성경에는 '긍휼'에 대하여 3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며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긍휼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자비하심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신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엡 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은 마지막 심판날에 심판주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충성을 다한 주님의 일꾼들을 구원해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딛 3:4-7)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셋째로 인간의 긍휼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긍휼이라는 선을 베푸는 훈련을 해야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긍휼을 어떻게 베풀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모양으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긍휼의 대상은 한정되어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처럼 모든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의 종들과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과부와 가족이 없는 이들을 돌보는 것을 원하시며 가족과 이웃과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며 긍휼을 베풀기를 명령하고 계십니다.▮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긍휼의 마음이며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주기도문을 결코 정상적으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면서 주기도문을 습관적으로 외우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미안하다" 또는 "잘못했다"라고 해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지옥불이 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결코 긍휼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긍휼한 마음은 마음이 가난하여 오직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주님의 법을 어긴 것이 생각나서 애통하며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잠도 자지 못하고 눈물로 회개하는 가운데 주님의 용서하심을 받고 위로를 받아 회복되므로 그의 강퍅하고 딱딱하게 굳어진 상처 투성이였던 마음이 예수님처럼 온유한 마음이 되어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에 나올 수 있는 마음입니다.
자녀에 대한 자기만족의 헌신 자, 애인에 대한 꾸준한 측은지심을 통한 자기만족의 헌신.
1. 기질과 성격에서 나오는 헌신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을 통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2. 내 감정의 굴곡이 아닌, 상대의 유익을 배려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ex)
● 나병환자를 위한 병원을 세우는데 자신의 열정과 욕심만 가지고 세우면 안 됨.
나병환자들이 말합니다. “이 병원은 나병환자의 천국이 아니라, 지은 자들의 천국이다.”
● 선교지에서 돕는 모든 모습과 교회를 세우는 것 까지도 그들이 원하고 그들이 세우도록 기다리고 기대해야 합니다.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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