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신 이유. 말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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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신 이유. 말 1:2-3.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이스라엘의 이름을 받은 야곱과 장자인 에서의 장자권을 쉽게 생각한 결과로 놓친 이름>
홀로그램 사진은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과 색깔이 달라집니다. 매우 다양하여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성경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읽을 때는 한 가지 교훈에 만족하고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읽으면 ‘아하, 이런 뜻이 더 있었구나.’하며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너무 신기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의 한 곳일 듯싶습니다. 본문은 난해 구절로 취급되기도 하고, 많은 설교의 본문 내지 보충문으로 인용되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나쁜 해석이 있습니다. 일부 외골수 칼빈주의자들의(일방적인 운명론자들) 오해인데,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의 증거구절로 착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내 맘대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뭐가 문제냐?’는 듯이 아주 쉽게 생각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절대주권’이라고 힘주어 강조하곤 합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홀로그래프의 교훈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외골수 칼빈주의적 해석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간 차원의 지능으로 크게 오해한 결과입니다.
만약 본문을 ‘절대주권’ 하나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폭군’ 이미지가 될 수밖에 없어집니다.
동서양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막강권력을 휘둘렀던 절대군주들과 유사한 이미지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를 통달할 방법은 없지만, 제한적이나마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은 알고 있습니다. 영원, 전능, 전지, 공의, 사랑, 용서 등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느 한 가지 속성만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는 매우 위험합니다. 사랑만의 하나님일 수 없고, 공의만의 하나님일 수도 없습니다.
다른 모든 속성들을 공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본문에 대한 칼빈주의적 해석의 가장 큰 과오는 오직 ‘절대주권’만으로 해석했다는 점인데, 사려 깊은 성도라면 최소한 2가지 속성을 더 고려할 것입니다. 공의와 전지입니다.
‘공의’란 공평과 동의어입니다. 누구에게도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고 똑같은 룰을 적용한다는 뜻입니다. “야곱아 너는 이유없이 귀엽다. 무조건 천국가라. 에서야 넌 주는 것 없이 밉다. 지옥가라. 난 하나님이니까 절대주권으로 결정했다. 어때 공평하지?” 이러한 이해는 절대주권에는 부합되겠지만 공평과는 배치되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공의의 하나님과도 맞지 않는 현상입니다.
‘전지’란 ‘모든 것을 아시는 능력’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의 범위를 생각해야 합니다. 공간적으로는 ‘우주’를 포괄하며, 시간적으로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를 포함합니다.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하나님의 전지성을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상조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폭군처럼 강압적인 절대주권을 행사하여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최소한 에서에게도 야곱처럼 ‘돌아올 경우의 용납’은 허락되었어야 합니다. 뉘우치고 돌아왔는데도 ‘넌 이미 결정됐으니 안 돼!’라고 한다면 이는 공평한 처사가 아닙니다. 공의에 반합니다.
▶야곱과 에서의 일생을 다시 살펴야 합니다. 야곱은 잘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남을 무수히 속였고 또 남에게 속기도 많이 했습니다. 살기 위해 부모도 떠났습니다. 꾸역꾸역 자기 욕심만 채웠습니다. 반면 에서는 남자다웠습니다. 포용력도 있었습니다. 부모를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삶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로 돌아왔느냐 아니냐.’는 것뿐입니다. 야곱은 만신창이와 같은 삶을 살았을망정 결국은 절름발이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에서는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의 삶을 열심히 살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들의 일생 전체를 알고 계셨습니다. 전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서와 야곱의 일생 전체를 보고 판정하셨습니다.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미리 입력시켜 놓은 각본 때문도 아니요 절대주권을 휘둘러 에서로부터 선택의 기회마저 박탈하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야곱과 에서 모두는,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야 했고,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고 기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눅 15:11-32).
둘째는 아버지를 떠나 온갖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야곱처럼 말입니다. 맏이는 아버지 집을 한 번도 떠나지 않고 혼신을 다해 일했습니다. 에서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왔으나 맏이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신앙의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느냐 아니냐.’입니다.
●구약에서 “내게로 돌아오라.”(호 12:6; 14:1) 절규하셨던 여호와께서는, 신약에서도 “오라.”(마11:28)고 외치십니다. 돼지우리의 오물로 범벅이 되었든, 공적은커녕 무수한 과오만 넘쳐날 뿐이든, 그냥 돌아오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눈물 흘린 손
어느 대학 식당에서 일하는 맘씨 좋은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성격도 좋고 친절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점심 식사시간에 쟁반에 음식을 담아 가지고 나르다가 그만 손에서 쟁반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식당 안은 소란스러워졌습니다. 학생들은 아주머니의 실수를 보며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나이스!' 하며 영화감독이 연기를 잘했을 때 보내는 사인 흉내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식당 관리인이 달려왔습니다. 그때, 잠자코 서 있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말했습니다. "여..여러분... 죄송합니다. 내 손이 아마 눈물을 흘려서 미끄러웠나 봅니다. 오늘 아침에 군대에 간 아들이 전투 중에 전사했다는 소식을 받았거든요. 내 아들이 잡기 좋아했던 이 손도 슬퍼서 아마 눈물을 흘렸나봅니다. 내 아들도 여러분과 똑같은 대학3학년 때 군대에 갔답니다." 식당 안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여학생들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학생들은 아주머니에게 다가갔습니다. "어머니...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이제 저희들이 어머니라고 부르겠습니다." ⓒ최용우
◆상대의 의도를 모르면 함부로 말해선 안 됩니다. 모든 일에 상대의 중심을 듣기 전에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일방적인 운명론자들의 생각처럼 좁아터진 의미로 제한시킬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오직 돌아오기만 하면 다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마음까지 읽어내는 지혜를 구하고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깊은 의미를 더 음미해야 할 귀한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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