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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신을 가르치라(롬 2: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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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수인
댓글 0건 조회 912회 작성일 22-04-2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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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27. 수요예배. 9. 네 자신을 가르치라(롬 2:17~29)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 서니라.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우리는 나 자신을 바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실존이 어떤 것인가를 바로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6세기의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서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말은 옛날부터 있어 온 헬라의 성현들이 주장해 온 철학적 명제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에 대한 성경적 대답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의식하나를 완전히 수정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네 자신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대단한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우선 유대인들은 순수 혈통을 유지하고, 전통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고 모세의 율법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 의식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생각했고, 그들의 자존감을 한껏 높여 주는 것이 바로 선민의식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보존하고 믿음을 지키는 방법으로 자녀에게 율법을 교육해 왔습니다. 참으로 유대인들의 교육의 열정은 한국사람 못지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의 회당에서는 6세에서 12세까지 율법을 의무교육으로 받았습니다. 6세에서 8세까지 3년간 율법을 초급으로 배우고 9세에서 12세까지는 고급반으로 배웁니다. 이렇게 12세까지 배우면 율법을 두 번 배움으로써 정통 유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12세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사들과 성경에 대한 논쟁을 벌인 것도 이미 예수님이 교육을 다 마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철저한 유대주의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남을 잘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가슴에는 자기들은 이방인과 달라서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말씀이 오늘 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네 자신을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남들은 잘 가르쳤으나 자신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바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 같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을 갖고 있는 것도 영광되고 귀한 것이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도리어 욕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의 할례만 받으면 그 특권이 유지되는 줄 알았지만 할례도 구원을 얻는데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마음의 할례를 강조했고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혁명적인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무할례자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말씀대로 살면 할례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중대 성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자부심인 율법도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본문 롬 2:1에 있는 대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입장에서 남을 판단하는 데는 도가 트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남에게 가르치고 비판은 잘했지만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깊은 뜻을 살피면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비춰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도 세례를 받았다느니 또는 직분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마치 이제는 신앙의 성숙한 자리에 이른 듯이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사실은 가장 초보적인 순종의 첫 걸음마에 불과합니다. 유대인들은 의식을 신뢰하고 마음과 행동의 일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말은 잘하는데 행동이 뒤따르지 않을 때 위선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의 모습인 동시에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본문에서 핵심으로 쓰는 말은 유대인들의 오만한 콧대를 꺾으면서 네 자신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사실 오늘날로 보면 유투브나 페이스북 등 다양한 소통의 자리에서 많은 유투버들도 남은 잘 가르치는데 자기 자신을 가르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남을 평가하거나 자료를 입수해서 편집하면서 자기 말이 옳다고 가르치려고만 덤비고 자기를 가르치지 않으니 회개가 없고 반성이 없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옳게 못 가르치니 다른 사람에게도 할 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고 자기를 가르칠 줄 모르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네 자신을 알라고 했으나 성경은 네 자신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가르치려고만 들면 우리의 심령이 강퍅해 집니다. 남이 하는 것을 보니 자기도 다 할 것처럼 덤빌 때가 많습니다. 흔히 우리는 정치가 틀렸고 경제가 틀렸다고는 하지만,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성경에도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옛날의 유대인을 너무나 많이 닮아 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남을 가르치고 비판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가르치고 자기 자신을 비판할 줄 알아야 진정한 크리스천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다 비슷합니다. 남을 가르치기는 쉬워도 자기를 가르치기는 얼마나 어렵습니까?

● 저도 20년 가까이 남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깨닫는 것은 나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뵙기 원한다면 나를 가르치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 방법론은 책도 많고 논문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책 한 권이 없는 사실이 이상합니다. 세상의 교육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말하나 성경은 자기 자신을 가르쳐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만하다는 말은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고 자기 자신은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사실상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부부 생활에 많은 갈등도 따지고 보면 서로가 자기를 가르치는 훈련이 부족한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할 것 없이 자기 방식과 경험으로 상대방의 문제만 지적하고 항상 선생님 노릇하려고 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오늘 우리들 가정의 생활에도 자기를 주관적으로 보고, 객관적으로 보는 훈련이 없었습니다. 상대방의 약점과 잘못을 지적하고, 자기 자신을 가르칠 줄 모르는 것은 사실은 인간의 타락에서 오는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가르치는 기능은 마비되고 도리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에는 발달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강력한 도전을 읽으면서 형식과 외식에 화석화된 종교 생활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배웠습니다. 자기를 가르치는 기능이 마비되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면서 도적질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 간음하고 우상 섬기지 말라고 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벌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기득권이나 전통이 인생을 인생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본문의 마지막 말처럼 <다만 하나님에게 서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를 잘되게 하고, 잘하라고 말하면서 내가 가르친 사람 그 잘하는 사람 가운데 자기를 높여 안전하게 살고자 하는 환경을 바꾸려는 잘못된 이기주의적 기본의식이 우리 안에 모두 있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몇 가지를 제시해 보고 싶습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자기는 죄인인 것을 알 때 자기 자신을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고 베드로는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되고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자기 자신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빌립보 2장 3절에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라고 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기 전에 자기 허물을 볼 줄 하는 사람은 자기를 가르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셋째는,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유일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딤후 3:16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화무쌍한 오늘의 삶 가운데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의 유일한 표준이 됩니다. 말씀을 믿는 믿음은 삶을 변화시킵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 믿음은 아직도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남의 허물을 보는 눈은 지나치게 예리하고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은 퇴화되어 버린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은 <네 자신을 가르치라>고 속삭여줍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나 자신을 주님 앞에 날마다 세워서 성화되어 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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